지난 주일 1부 예배를 드리고 장애인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아서 봉사조끼로 갈아입고 성도님들을 모시러 나가는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마침 그 날따라 봉사자들께서 작게 나오셔서 봉사손길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앞을 못 보시는 성도님 한 분을 아파트까지 가서 모시고 차를 타러 가는데 이 분이 절더러 자꾸 늦게 간다고 제게 타박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앞을 보시지 못하시는 분을 위해 일부러 천천히 가는데 절더러 천천히 간다고 말씀을 하시니 어쩔 수 없이 꽤나 빠른 속도로 걸었더니 이제야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걸을 수 있냐고 하시니까 저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순간 나는 내 앞이 깜깜할 때 얼마나 주님을 믿고 따르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주님 등에 업혀 버리면 되는데 보지도 못하면서 내가 걸어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짐을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가 요동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시편 55편 22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 3단지에 가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귀한 성도님들을 모시고 교회로 오는데 버스 한 대가 가득 찼습니다. 장애인 성도들께서 얼마나 저를 반겨주시던지 너무 고마웠습니다. 주의 종인 제가 그 분들을 사랑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분들이 더 좋아해져서 울적했던 기분이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 한 분께서 제게 ‘장애인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좀 있으면 교회에 도착할 것인데 웬 기도냐’고 그랬지요. 그러자 그 봉사자께서 제게 ‘오늘 장애인 성도님들이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해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 위해 차에 탄 성도님들을 보니 다 제각각이십니다. 어떤 분은 창밖을 보시고 또 어떤 분은 주무시고 또 어떤 분은 옆에 분과 사이좋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 전에 아주 쉬운 찬양으로 주위를 집중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 할렐루야 할렐루야! ” 그랬더니 장애인성도님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기 시작합니다. 얼굴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말씀으로 은혜받게 해주십사고 간단히 기도가 끝나자 말자 이쪽 저쪽에서 교회에 도착할 때까지 찬양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저는 찬양을 잘 못합니다. 오히려 박자를 잘 놓치고 높은 음도 불가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부끄럽게 고백하지만 2절만 넘어가면 가사를 제대로 아는 찬송가가 드뭅니다. 그런 제게 찬송을 인도하라니 이것 참 곤란했습니다.
찬송이라는 것이 뭔데 장애로 불편하게 지내시는 분들을 이렇게 밝게 만드는 것일까? 몸이 불편하고 장애인으로 차별을 받으며 가난을 평생 벗으로 지내 오신 분들이 이렇게 찬양을 사모하는데 나는 얼마나 찬양을 사모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나이다 라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나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얼마나 내 마음이 기뻐하고 즐거웠는가 반성하였습니다.
지난 주 새벽에서 설교한 시편 57편 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108편 1절에서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을 하는데 무슨 마음을 정하고 확정되었다고 하는가 라고 반문하실 수 있겠지만 다윗은 찬송할 수 없을 때 찬송하고 있습니다.
보통 노래를 부르고 찬송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즐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즐겁다는 것은 주위 환경이 내 맘대로 되고 좋은 일이 있을 때입니다만 다윗이 찬송하겠다고 할 때 다윗의 형편은 정반대였습니다. 그야말로 불안과 어둠과 절망이었습니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을 손가락 하나로 결정할 수 있는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려 해서 어두운 굴에 피신해 있는 다윗의 마음은 참으로 불안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확정하고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불안하십니까? 앞이 캄캄하십니까? 절망으로 숨이 막히십니까? 눈을 들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저주로부터, 사탄으로부터 건져주시는 우리 주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십시다. 피아노가 있으면 피아노를 치면서 기타가 있으면 기타를 치면서 찬양합시다. 그러나 피아노가 없어도 기타가 없어도 주님을 사랑하고 평생 주님만 높이겠다는 확정된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살 낙이 없고 앞이 보이지 않아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분이 오늘 계십니까?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이 특효약입니다. 절망상태나 우울한 마음을 오래 방치하면 큰 일납니다. 제가 사회에서 사업을 하다 일을 그르쳐 구치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거기서 한 사형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오랜 감옥생활로 인해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팠습니다. 게다가 사랑스런 딸이 있었지만 그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는 딸이 사형수인 자기를 부끄러워하면 어쩌나 하였습니다.
그는 잘 견디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절망이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죽인 사형수라 할지라도 정작 자신이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지낸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자살을 한 사형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절망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절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우울증에서 빨리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고침받기 위해서는 찬송해야 합니다.
아무리 깜깜하고 힘들더라도 나는 나를 구원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리라고 마음을 확정짓기 바랍니다. 주위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형편이 힘들면 힘들수록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찬양하리라고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시편 71편 14절 말씀대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좋아하는 찬송을 부르십시오. 아무리 춥고 어둡더라도 빛 되시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니 나의 새벽을 깨워진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찬양을 합니다. 그것은 죽음조차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에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마저 우리를 어쩌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고 저주받아 밖에서 울며 이를 갈 수 밖에 없던 내가 한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아 생명과 주님나라를 소망으로 받았으니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평생 주님 만을 높이고 그를 위해 새 노래를 지어 찬양하고 비파와 수금으로 찬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여 찬송하여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렘 17:14에 야훼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라고 말씀처럼 찬양이 있는 곳에 고침이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감히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할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다. 주여! 주여!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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