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은혜나누기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작성자kalitsma|작성시간18.04.21|조회수74 목록 댓글 0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로마인 이야기 15

 

2부 로마제국의 멸망(서기410~476)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것은 서기 476년이지만, 사실상은 410년에 이미 붕괴해 있었다.

p235

한편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자마자 마우리타니아 지방을 제압한 겐세리크의 반달족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순식간에 히포레기우스에 이르렀다. 지중해 연안의 이 항구도시를 공략하는 데 성공하면,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 카르타고와 반달족 사이에는 150킬로미터의 로마식 가도가 가로 놓여 있을 뿐이다. 보니파키우스는 이 히포레기우스를 방패로 반달족 군대의 진격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무려 14개월에 걸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고대 도시 히포레시우스의 유적은 오늘날 알제리의 도시 안니바에서 남서쪽으로 2킬로 미터 즘 내려간 곳에 남아있다. 그곳이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였던 서기 430, 14개월 이나 계속된 공방전 내내 그곳에 틀어밖혀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성인 반열에 오르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 도시의 주교였기 때문이다. 40세의 보니파키우스가 병력을 이끌고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을 때, 몇 년전 까지만 해도 그에게 북아프리카 방위에 희망을 걸었던 76세의 주교는 두려움에 떨며 절망에 뻐져 있는 신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쳐들어온 북방 야만족에게 파괴되고 살해당하는 것은 지상의 나라이고 우리 기독교가 안주할 땅은 죽은 뒤에 갈 신의 나라밖에 없다 고 그는 설교했다.

p236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354~430)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교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이 사람도 북아프리카(알제리) 태생의 로마인이었다.

 

신의 나라는 410년의 로마 겁탈에 충격을 받고 펜을 들었다는 작품인데, 사람들이 현재 직면해 있는 지상의 참상도 결국에는 신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로마 제국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로마인이 전통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비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읽어본 감상으로는 지상의 나라의 참상에 절망하여 기독교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신도들의 눈을 신의 나라로 돌려 그 선남선녀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쓴 것처럼 여겨진다.

 

p237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기 354년에 중앙정부가 파견한 속주 총독이 다스리는 북아프리카의 지방 자치단체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알제리의 수크아라스라고 불리는 도시다. 로마시대의 지방 자치단체란 로마에 정복되어 속주가 된 지방의 도시를 말하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몸에는 카르타고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지방의회 의원이었고, 죽기 몇해전까지는 로마의 전통신들을 숭배하는 이교도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는 했지만,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만 유일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교로 결정한 4세기 말까지는 아직 시일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가 공인되기는 했지만 다른 종교들도 모두 신아의 자유를 인정받은 시대에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셈이다.

 

양갓집 관례대로 부모 슬하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중등교육부터는 집을 떠나 2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받았다. 소년 시절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인 수사법을 배우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이 대도시에서는 학문에 몰두하기보다 인생을 즐기는 데 열중한 듯, 열여덟 살에 미혼부가 되어버린다. 경건한 기독교였던 어머니 모니카가 개탄해 마지않은 불상사였다.

p238

그래도 공부는 계속했는지, 3년에 걸친 카르타고 유학을 마치고 20세에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서 사설학원을 차렸다. 이 학원에서는 문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중등교육기관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대에 갓 접어든 다감한 젊은이, 게다가 대도시 카르타고의 생활을 경험한 젊은이에게 내륙에 있는 소도시의 생활은 너무 따분했다. 자기 아이를 낳은 여자와의 관계도 끊어지지 않았는지, 겨우 2년뒤에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7년동안 카르타고에서 수사법을 가르치며 지냈다.

 

이 카르타고 생활을 버리고 로마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또 재미있다. 학문을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염증이 났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학생들은 시끄럽고, 젊은 교사의 말 따위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양 과목에서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로마의 학생이라면 성실하겠지 하는 생각에서 로마에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학생들은 한술 더 떴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을뿐더러, 수업료를 내야 할 때가 다가오면 다른 학원으로 옮겨가 버리는 학생이 많아서, 수업료로 생계를 꾸리는 교사의 처지에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의 수도에 오긴 했지만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 이 젊은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사람이 당시 수도장관인 심마쿠스였다.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이자 수도장관이기도 한 심마쿠스는 자기가 추천인이 되어줄 테니 카테드라시험을 보라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권했다.

원래는 의자라는 뜻이었던 그리스어의 .karthedra에서 유래한 라틴어 낱말 카테드라(cathedra)는 학생을 가르치는 강좌를 가질 자격을 의미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카테드라시험에 무난히 합격하자, 수도장관은 밀라노에 일자리를 찾아주기까지 했다.

 

서기384년 당시 44세 였던 심마쿠스는 바로 그해에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와 역사에 남을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계속 공세를 취하는 기독교 세력에 맞서서 로마 전통 종교의 존재이유를 주장하여 이교 로마의 자랑스러운 마지막 불꽃이라고 불린 심마쿠스는 30세의 아우그수티누스한테서 이 불꽃의 계승자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가톨릭교회의 으뜸가는 이론가가 되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시기에는 일자리를 잃은 젊은 고전학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밀라노에 간 것이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의 밀라노는 내가 가톨릭교회에서 으뜸가는 실무가라고 생각하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교재로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었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로마 문명을 이교의 문명으로 단죄하는 기독교에 매료되어 버렸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는 32세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벼락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다.

 

교사를 그만두고, 아들까지 낳은 애인과의 오랜 관계도 끊고, 어머니가 권하는 결혼도 마다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신에 대한 봉사에 바치기로 결심햇다. 세례는 이듬해인 3874월에 받았다. 35세 되던 해 봄이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도 세례식에 입회한 모양이다. 고향 타가스테에 돌아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일개 수도승으로 출발한다.

 

p240

학식이 풍부한 젊은 수도승은 주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는지 그의 주위에는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지극히 자연스럽게 수도원이 되었다. 이 무렵 사생아 아들이 죽었다. 9년동안 수도원 생활을 한 397, 43세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레기우스 주교로 선출된다. 일개 수도승으로 삶을 끝내고 싶었지만, 이것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수도원에서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교가 된 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교리를 앞장서서 옹호하는 기수의 길로 돌진하게 된다. 히포레기우스에 서는 교리에 대한 해석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공의회가 수없이 열렸다. 주교가 된 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 논쟁에서 점점 전투적이 되고

 

p241

그의 공격은 이단으로 몰린 도나투스파에 집중된다. 전에는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도나투스파가 가톨릭의 공세 앞에서 소수파로 전락한 것도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의 공으로 돌려진다. 그럴수록 도나투스파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더욱 격렬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서기 430년에 히포레기우스에 바싹 다가온 것은 북방 야만족인 반달족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던 도나투스파 기독교도였다. 진정으로 아주할 수 있는 곳은 이 지상에 없고 신의 나라에만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히포레기우스 방어를 단념한 보니파키우스와 휘하 병사들을 태운 선단이 이탈리아를 향해 항구를 떠나자 이 도시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도시를 에워싼 성벽이 파괴되는 괴음을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는 76년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 서기 430년의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가톨릭이 이단시한 아리우스파와 도나투스파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죽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동조하여 과격한 행동으로 치달은 가롤릭교도들은 지금까지 도나투스파 주교를 몇 명이나 죽이고 교회를 불태웠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산 채로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갈가리 찢겨 죽었을지 모른다.

 

이것을 두려워했는지, 신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신을 배에 실어 몰래 사르데냐 섬으로 피난시켰다. 하지만 중세에 사르데냐 섬을 습격한 사라센 해적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유골을 탈취했고, 그것을 되찾으려면 몸값을 치러야 했다. 몸값을 치르고 신자들의 손에 돌아온 유골은 북이탈리아의 파피아 교회에 성유물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신의 나라

라틴어로는 De civitate Dei,

영어로는 The City of God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도성혹은 신의 도성이라고 많이 번역함

 

2018421kalitsma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