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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나누기

다스림. 누림. 가짐. 버림

작성자작은 물고기|작성시간22.04.22|조회수61 목록 댓글 1

다스림. 누림. 가짐. 버림

창세기 :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느혜미야 :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창조하신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스리며 지켜서 "평안히 보존되게" 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하셨는데, 사람이 오히려 "종"이 되어 누리고 다스려야 하는 대상에게 거꾸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대상의 실체는 "허상"입니다. 그것들은 흙에서 나서 잠깐 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뿐이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그 허상들을 쫓아다니며 살고, 그 허상들에 의하여 영이 사는 길을 가는 것에 게으르거나, 망설임을 보이거나, 혹은 그것들로 인하여 살 기회를 놓아 버리고 말게도 되는 기막힌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 7:11]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영을 살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산 것도 죽게 하는 "허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란 돈, 부동산, 음식, 장신구, 보석, 자연, 짐승 등등의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나열한 허상들 중에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인생들이 마음을 섞고, 또 떼지 못하는 관계들인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형제자매, 친척, 선배, 후배, 선생님, 제자, 남성, 여성, 어린이, 청년, 노인... 이 모든 것 역시 "허상"에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들도 모두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이며, 잠시만 어린이고, 잠시만 청년이며, 나이가 60이라도 80 된 사람에게는 어린이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자식이 계속 사랑스러운 아기일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면 자식이 "기댐"의 대상으로 삼아지게도 됩니다. 물론 자기를 그렇게 사랑한다던 자식이 자신을 짐으로 여기게 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엄마, 아빠의 DNA 검사를 했더니 본래 부모가 아니더라"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고, 자식도 내 배로 낳은 아이인 줄 알았었는데 병원에서 바뀐 남의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뿌린 씨인 줄 알았는데 남이 뿌린 씨일 수도 있으며, 내가 뿌린 씨도 맞고 내가 낳은 것도 맞는데 정신박약아가 나오면 그 아이는 부모가 붙여 준 자기 이름도 알지 못하고 자기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또, 정상적인 아이가 나와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어도, 나중에 그 아이가 사랑스러운 자식이 아닌 "원수 같은" 자식이 되기도 하고 그 부모를 죽이게 되는 일도 발생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멋지거나 아름다운 청춘일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는 바로 늙은이가 되고 맙니다. 마음은 늙지 않으므로 멋지고 예쁜 기준은 그대로인데 사랑하는 그 대상은 반드시 안 멋지고 안 예쁜 상태로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고도 변모하고 변질되면서 전혀 다른 인간형으로 바뀌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과,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모든 허상들에 대한 "정의"나 "명제"는 절대 진리일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땅은 농부에게 곡식을 생산하는 수단이고, 땅을 일구는 목적은 배를 채움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배를 채우고 난 것은, 배부르고 나면 다른 음식이 안 먹히듯이 자기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잡초와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썩어 땅으로 돌아갈 것이니까요.

하지만 인생은 그 땅을, 먹고 남음이 있을 정도로 차지하고도 더 많은 땅을 매일 소망합니다. 그리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일해도 일손이 딸려 버겁게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땅을 늘리고 곡식이 아니라 땅의 많음에 배불러 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렇게 많아지면 소작하는 사람을 두고, 자기는 또 다른 땅, 즉 명예나 권력의 땅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국 그 인생은 평생을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아다니면서 살지만 정작 그것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쫓아다닐 뿐이면서 그것을 누린다고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작하는 사람은 그 땅 주인과 동일하게 그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인해 배부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자기가 다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의 땅에서 자기가 짓고 자기가 먹었고, 먹고 남은 것은 땅 주인의 것이므로 그 나머지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따질 필요도 없이 당연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소작농의 마인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이론상으로는 있는 듯도 하지만, 실상으로 들어가 보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타인에게 그런 듯이 비춰지게 한 것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는 본능을 가지지 않은 인생이 아닌, 신일 것이나 인생 중에 신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없으니, 그런 듯이 보이는 그는 분명히 위선자일 뿐입니다. 소작농 역시 자기 배를 불린 뒤에 주인에게 주는 나머지가 아깝습니다. 알면서도 아까워하는 그것이 사람에게 고민과 스트레스를 안겨 줍니다.

인생은 어차피 오늘만 먹고 오늘만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부자에게든, 소작에게든 보장된 내일은 없습니다. 소작농은 오늘 먹고 편하게 잠을 자지만 부자는 오늘 먹으면서도 만족이 없고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합니다. 소작이 떼어 먹을까 걱정도 해야 하고, 남은 것으로 다른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에게 천 년 정도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부자의 자손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땅을 늘리는 것은 어느 정도 옳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저 하루만 살 수 있을 뿐이고, 그렇게 주어진 어느 날, 그 하루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번에는 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인생들은 실제로 돈을 누리지 못하고 가지려고만 합니다. - 번 것을 쓸 줄을 모른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 목적이 있어서 돈을 법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했으면 이제는 돈을 더 벌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은 또 다시 새로운 목적을 만들고 또 돈을 따라 갑니다. 또 달성하고 또 따라가든지, 아니면 평생 달성하지 못하여 늘 고민 가운데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물론 사회 상황적 문제도 있습니다.

단지 자기가 먹고 살기에 충분하게 땅을 마련하고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목적으로 돈을 벌고 땅을 사서 농사만 짓고 산다면 돈에 대하여는 더 이상 목적을 삼을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벌어서 가지고 있는 돈은 반드시 재테크라는 것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아서 물가상승률을 수입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 이미 벌어가지고 있는 그 돈은 반드시 번 직후부터 마이너스로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가가 내려가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가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돈만 따라 살다가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당하는 세상에서의 허상들로 인한 "고민"은 모두 그 대상에 대하여 "가짐", "소유권 확보"를 추구하는 "욕심"에서부터 발생합니다. 연령대나 환경의 상황적 시기마다 사람은 그 대상을 바꾸면서 그 허상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문제는 이 모든 허상은 사실, 어느 누구의 "소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유는 사람이든, 부동산이든, 돈이든 잠시 동안만 소유가 가능합니다. 결국 인생은 잠시 동안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갖게 되는 마음과 모르면서 갖게 되는 마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허상인 줄 알면 "누림"은 하되 "소유"하려고 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또 그것을 모르면 자기가 그것을 "소유"한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것에 의하여 끌려다니게 되면서 "누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더 기막히는 현실은 이것을 아는 인생이 이보다 더 한심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허상인 줄 "알면서도" 소유하려고 하고 놓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것이 그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그 "누림"보다는 "소유"하기를 원하고, "나만의 것"이 되기를 바라며 주어진 오늘, 그리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한한, 죽음의 기약이 있는 인생이 허상 중 어떤 대상을 자기만의 소유로 삼은 후에는 반드시 누림을 누리지 못하는, 자기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스스로 변질을 시킵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영원할 수 없는 것들에게 있어서는 "진리"적 이치입니다.

그런 결과를 만나면 인생은 이제 그 대상에게 배신, 배반, 속임, 거짓, 허무라는 단정적 결과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점령한 "지옥"에서 허상을 따라 살면서 "불꽃 가운데서 갖게 되는 고민"입니다.

물론 그 부여된 배신 같은 정의까지도 실은 "참"이 아닙니다. 영원한 배신도 없고, 영원한 속임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허상으로 낳아져서 허상에서 살며 허상적 사고를 하다가 모든 것이 허상임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잠시 살다 가는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밤이 밤에게 전하는 진리"입니다.

이제 창세기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인생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어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므로 다만 "다스리고 지키게"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킨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가지려고 하면 반드시 "누릴" 수 없습니다. 누리고 싶으면 "가지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허상은 본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모든 허상의 진리적 "본질"입니다. 인생은 그 진리적 본질을 바꿀 능력도 없습니다.

그것을 바꿀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은 어떨까요?

그러나 하나님도 이미 그 허상의 진리적 본질의 성질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참인 자신의 마음과 동질성을 가진 "아들"을 얻으시기 위하여 신이 될 수 있는 "수단"인 인간을 만드셨기에 그 인간은 반드시 버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버려지게 행하였고, 그 버려진 상태에서 이번에는 에덴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제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므로 당연히, 결국에는 그 신이 되는 길을 모두 잃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근원적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 자신의 "버림"의 순서가 당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하나님은 "아들"을 얻으시고자 하셨으므로 "아들"을 "버리는" 본을 십자가로 보이기에 이르십니다. 이렇게 허상을 버리고 실상을 얻는 이치는 하나님도 사람도 거스를 수 없는 진리적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적 이치는 이렇게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사람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있던 것"을 변형하여 다른 물건을 만들어 문명을 일궈 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문명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발명의 과정에서 본래 있던 것은 파괴가 됩니다. 그 파괴 없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이미 인생은 모든 것이 그와 같은 이치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이치로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 이전 것은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허상이든, 실상이든 그 모든 것의 본래 주인이십니다. 내가 본래 주인이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내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으로서 주어진 오늘, 아버지의 소유인 그것으로 먹고, 자고, 입고 있다면 더 이상 채우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직 오늘의 당신에게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마인드가 없기 때문에 사단의 유혹에 마음을 이끌리며 고민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보십시오.

아이는 당신이 주는 먹을 거리를 먹고, 당신의 소유를 누리되, 땅을 늘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부름을 시키면 그것을 하고 칭찬 듣기를 바라되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더러운 인생의 물이 들기 시작하면서 변하게 됩니다.

당신이 세상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어린 아이"와 같아지지 않는다면 "결단코" 하나님의 안식에 들 수 없으며, 반드시 허상인 당신의 육체와 당신이 채워 가지고 있는 그 모든 허상들과 더불어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의 "왕"과 제사장으로 삼아지는 당신이 되십시오. 말로만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매일 만나는 모든 허상들과의 상황 속에서 그 마인드를 가지고, 또 실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갖고 싶은 허상을 버리고, 새것으로 다시 받아, 그것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다만 누리고 다스리면서 세상에 대하여 안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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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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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이 현채 @ | 작성시간 22.09.24 사랑하는 님이시여 안녕하세요?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성일을 준비하는 복된 하루 되시고 좋은 주말 되소서 ... ...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24장6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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