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와 어린양 5 (계 5:9-10)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이 시간에 "두루마리와 어린 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두루마리는 성경이고, 어린 양은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하신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어린 양에 의해 비밀에 갇혀 있던 성경이 인봉을 떼고 활짝 열리는 본 사건은 성경해석학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속사(구원사)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찬반 혹은 여러 형태의 구속사적 입장이 있지만 성경이 구원의 책이라는 점에서 그 주장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대해 차영배 박사는 “구속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사를 일컬음인데, 성경은 단순한 말씀이나 추상적 진리를 담은 것이 아니고, 창조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이르기 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일련의 행동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신약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즉 신구약의 모든 기록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언하거나 설명하는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기타 삶의 구체적인 교훈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본문은 그 내용이 구속사적인 바탕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또 그 수혜자인 우리들이 찬양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이 열릴 때 그 때 우리는 여기 네 생물과 24장로들과 같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이 열리면 어떻게 됩니까?
1. 새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구세주 예수를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계시록에서 네 생물은 4복음을 상징합니다. 4복음은 예수님이 구원의 주로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각도로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24장로는 교회의 대표이기도 하고 신구약의 복음의 사역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새 노래가 무엇일까요? 4장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노래가 있었고, 여기 5장에는 어린양에 대한 노래인데 새 노래라니 그 의미는 뭘까요? 그들이 부른 새 노래의 내용을 보면 죽으심으로 승리를 가져다 주신 어린 양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새 노래는 성경에서 복음을 아는 자만이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우리에게 예수 안의 새 사람, 새 세상, 세 차원, 새 희망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고, 골3:9-10에서도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했습니다.
성경을 알기 전에는 몰랐는데 성경을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실 뿐 아니라 성령으로 부르셔서 예수 믿어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며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옛 것은 죽고 예수와 함께 새 사람이 되고 부활 승천까지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새롭게 된(과거형) 자신의 정체와 자화상을 발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했습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나는 물론 남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 대상을 복음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고 우리의 생각부터 복음화시키시기 바랍니다.
“나 구원 받겠네.” 가 아닙니다. “나 구원 받았네.”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행복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권세자입니다. 성경을 알았다면 이제는 불행한 자화상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자화상으로 바꾸고 활짝 웃고 사시기 바랍니다. 드리는 기도 역시 이방인들과 같이 불신앙의 바탕에서 얻어내려는 간구성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관계 속에서 믿음과 감사의 기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가치관 세계관 물질관 인생관 내세관 자화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직 성경을 모른 것입니다. 꽃게가 껍데기를 수없이 벗으면서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이 진리에 서는 훈련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세속적 습관 때문에 새로운 삶이 서툴기 때문입니다. 구속사 입장에서 성경을 깨달을수록 이러한 새 노래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2. 대속의 진리를 찬양하게 됩니다.
9절 하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대속이라. 즉 대속(代贖)이란? 대신 대에 바칠 속, 그러니까 나 대신 다른 사람이 값을 치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대속의 노래의 시제가 중요합니다. “일찍이 -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과거형입니다. 이건 대속의 역사가 우리가 나기도 전에 이미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대속하셨어요.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대로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는데 일반적으로는 구원의 역사가 세계적이라는 것입니다. 족속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나라가 다른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그렇게 평이한 내용을 서술하는 책이 아닙니다. 지금 이들은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라고 한 것을 주목하세요. 이 말씀은 바벨탑으로 혼미하게 되고 흐트러진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거기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마치 계18:4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한 대로 세속의 바벨론에서 놀랍게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족속이니 방언이니 백성이니 그런 단어들은 우리가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도 아니고 일상적인 성격과도 먼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이 다양한 분류를 중히 여겨서 자주 등장시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전과는 달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를 예수 안에서 본질적으로 한 족속 한 방언 한 백성 한 나라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신앙적이지 않는 다양한 환경과 사상과 생명과 언어와 습관과 사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혹은 각 족속은 옛 사람, 방언은 불신의 입술, 백성은 수효와 여론의 상징이듯 잡다한 육신의 생각들, 나라는 통치의 개념이니까 자아의 상징 등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자행자지하는 우리였는데 거기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이 이렇게 세부적이고 구체적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일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 모든 불의는 낱낱의 죄를 말합니다. 대충 씻어주시지 않아요. 이처럼 낱낱의 죄 즉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이토록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태가 어떻든 늘 넘어지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넘어진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한 잘못이지만 그래도 복음에 서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 우리 옛사람도 박혔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믿음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라시기 바랍니다.
3.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립니다.
10절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성도는 이미 나라요, 제사장이요, 왕권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원한 영광으로 구원한 사실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을 때 비로소 누려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볼 때 깨닫는 영광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중세 사람들은 하나님과 합일에 이르기 위해서 고행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프란시스의 영향으로 겸손과 사랑이 강조된 것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 이전에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미 생명적으로 하나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기초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구속사의 신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이 진리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알아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 한 일이 없는데 이미 하늘 사람이라니 처음에는 쉽지 않습니다. 날마다 복음을 노래하고 감사했지만 이 신비를 흔들림 없이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양심의 평안과 구원과 승리를 누리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복음에 서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한 것처럼 성도는 예수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육신을 이기고 사탄을 이긴 자입니다. 이제 이긴 자라는 믿음에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태적으로는 심히 한심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긴 자입니다. 이 진리에 설 때 진짜 사람에서 이긴 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되 예수 안에서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몰랐을 때는 해달라고만 부르짖었지만 성경을 알고 보니 예수 안에서 이루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에 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시인하여 비로소 풍성히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두루마리를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총을 진실로 깨닫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위대한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하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래 - 옛날 자료
성령론 2 (계 5:9)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 충만히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계속하여
그럼, 성령은 어떤 분이실까요?
3. 성령은 새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구세주 예수를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 새 노래의 의미가 깊습니다.
새 노래가 뭘까요? 4장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노래가 있었고, 여기 5장에는 어린양에 대한 노래인데 그 의미는 뭘까요? 새 노래의 문맥적 의미는 죽음으로 승리하신 어린양의 구원의 완성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이 노래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노래는 새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새 사람 새 백성 새 삶을 상징합니다. 우리 구원 받은 성도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골3:9-10에서도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즉 성령께서 죄인을 부르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며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자유와 기쁨을 얻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후사로 삼아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3-7)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구원의 무리 가운데 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신앙하게 하시며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시며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실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처럼 성령만이 우리를 새 사람이 되게 해서 새 노래의 자격자가 되게 하십니다.
4. 성령은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9절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자기 피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대속의 은혜라고 합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 대에 바칠 속, 그러니까 내 대신 다른 사람이 값을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대속의 노래의 시제가 중요합니다. “일찍이 -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건 대속의 역사가 우리가 나기도 전에 이미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대속하셨어요.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대로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는데 그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의미는 구원의 역사가 세계적이라는 것입니다. 족속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나라가 다른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평이하게만 해석하면 계시록의 상징성을 간과하게 됩니다. 상징적으로는 패역한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심을 말합니다. 각 족속은 옛 사람의 상징입니다. 즉 죄악으로 달려가던 옛사람이었던 데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방언은 함부로 말하던 우리의 입술이었는데 불신의 입술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백성은 수효와 여론의 상징이듯 이처럼 잘못된 온갖 지식과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고, 나라는 통치의 개념이니까 자아의 상징입니다. 즉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자행자지하는 우리였는데 거기서 구원해 주셨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철저히 죄에 물들어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한 흉악한 그 죄악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마세요. 그래도 믿습니다. 그래도 복음에 서세요. 이미 십자가에서 구원하셨어요. 예수 안에서 보면 이미 의롭다 하시고 이미 영화롭게 하셨어요(롬8:30).
그래서 엡2:1-3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씀하면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구원해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믿음 없을 때는 내가 내 것으로, 죄에 넘어질 때는 마귀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롬1:6에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면,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신약 성도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미 이루신 그 공로를 나를 위한 것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늘 고민에 봉착합니다. 주님이 이루신 일을 믿는다고 내 현실에 존재하는 차이의 괴리는 무엇이냐?
그러나 그 복음이 믿어지고 내게 실재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복음에 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면 성령께서 그 실재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믿으면 믿음만큼, 받으면 받은만큼, 엎드리면 엎드린만큼 성령의 은혜로 그 실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과 성령으로 실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십니다. 또 성령은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 충만히 임하십니다. 성령은 새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를 더욱 힘입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예비하신 공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론 3 (계 5:10)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오늘도 성령의 은혜에 관해서 계속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 성령은 우리에게 온전한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10절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여기 왕 노릇은 승리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승리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아세요? 그것을 알려면 실패자의 비참함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전쟁에서 패전하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앗수르 같은 나라들은 사람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손 발 코 귀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사람의 해골로 언덕을 만들어 공포심을 일으켰습니다. 젊은이는 노예로 여인들은 성의 노리개로 끌려갔습니다. 패전하면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도 승리하지 못하면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눈알이 뽑히고 저주의 맷돌을 돌리며 살듯이 영적 형편은 비참하기 한이 없습니다. 마음의 천국과 같이 마음의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성도가 땅에서 왕 노릇하는 이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할 수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승리하게 하시는 세 가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승리의 세 가지 은혜는 무엇일까요?
먼저, 소명의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라 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그곳에 있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부르심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시되 성령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벧전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불러내셔서 하나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의 은혜의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승리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시16:11에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했어요. 그리고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기만 해도 평안이요, 기쁨이요, 형통입니다. 거룩입니다. 구원입니다.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세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예배하는 삶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다음은, 권능의 은혜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기 "나라"를 삼으셨다는 생소한 표현이 있는데 영적 권세를 일컫는 말입니다. “나라”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분봉 왕입니다. 달리 말하면 승리자라는 말입니다.
누가 이런 권세와 능력을 주셨을까요? 성령께서 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면 권세와 능력이 임합니다.
이처럼 승리하려면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이 임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권능을 받으면 다 이겨집니다. 기적도 권능이지만 나를 이기는 능력도 권능입니다. 지상의 왕은 보이는 왕이지만 성도는 죄와 사망과 악의 세력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용서와 사랑의 영으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제사장들을” 삼으셨다 했는데 구약의 제사장은 먼저 자기 죄를 위해 제사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성령의 은혜로 보혈로서 죄를 용서받고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다음에 구약의 제사장은 남을 위해 제사했습니다. 이처럼 성령 받은 성도는 남을 용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웃의 죄를 해결해 줍니다. 성도는 죄를 사하는 능력은 없지만 기도로서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2-23)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을 삼으신 은혜를 저는 사랑의 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제사장직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자동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신령한 사랑의 제사장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된 승리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왕 노릇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있는 천상의 사람들에게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는 말씀입니다. 가령 지상의 성도일지라도 하늘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에 땅의 삶도 있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삶도 사는 신비한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말씀에서 천년 왕국론이 나오는데 천년 왕국론에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의 기간이 따로 있어 이 땅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전천년설과, 천년기 후에 재림한다는 후천년설,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천년왕국 기간이라고 보는 무천년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전천년설이 지지를 받았지만 요즘은 무천년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신 대로 우리는 지금 예수 안에서 임하는 하나님 나라 즉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국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땅이란 단순한 지구를 말 한다기보다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패역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의 지상생활의 승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베드로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주셨고 또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한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권능과 사랑의 제사장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