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 10 의인이 없다 3: 11 깨닫는 자도 없고 3: 12 하나도 없다
롬 3: 10 의인이 없다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1] 기록된 바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oral traditions)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 절에서 언급하는 '기록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인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DSS)을 통해 입증되었다(Kasemann).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 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 시 14: 3 -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 시 53: 3 -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2] 의인은 없나니
문자적으로는 시 14: 1보다 전 7: 20(LXX)에 더 가깝다.
* 시 14: 1 -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전 7: 20 -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세상에 아주'(엔테게) 없다는 것을 '하나도'(*, 우데 헤이스) 없다고 표현한 점만 다르다.
시편과 비교해 보면, '선을 행하는 자'(*, 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시 13: 1<LXX>, ', 포이온 아가돈, 시 52: 2<LXX>)라는 표현 대신에 '의인'(*, 디카이오스)이라고 변형시켰고, 시편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을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이러한 표현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의인'에 대해 혹자는 '올바른 도덕관을 갖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도 포함시키고 있으나(Matthew Henry)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 창 5: 24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창 6: 8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결국 죄에 오염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선'이나 '의'라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3] 하나도 없으며
헬라어 '우데 헤이스'(*)는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울이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몇몇 경건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빌 3: 6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의'의 개념조차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 묵시 문학 속에서도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면 의로운 자가 없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라는 구절은 신약에 기록된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Kasemann).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주장이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버렸다.
* 빌 3: 8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속에서 사용된 보다 권위 있는 구약의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3: 11 깨닫는 자도 없고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1] 깨닫는 자도 없고
시 53: 2에 대한 70인 역(LXX)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 쉬니온)의 목적어로 '하나님'(*, 톤 데온)을 최할 수 있다.
* 시 53: 2 -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시와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달음이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물론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예외이시다.
그는 유일한 의인이시다. 그 외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일치하게 사는 자, 참으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
또한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인간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있으며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2]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 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 28 a).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지 못함으로 이리 저리 치우쳤고 그들의 삶은 헛되고 무가치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쌓은 선한 업적이라는 것도 실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영원히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롬 3: 12 하나도 없다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본 절은 70인 역(LXX)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시 14: 3<LXX 13: 3>; 시 53: 3<LXX 52: 4>).
1] 다 치우쳐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 3에서는 '사르'(*)로, 시 53: 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 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여세클리난'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2] 함께 무익하게 되고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1: 21)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은 '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 '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 '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인 부사 '하마'(*)는 '모든', '다'(*, 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라는 의미도 갖는다.
* 행 24: 26 -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즉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3]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1: 31)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