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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팔현목사

롬 5: 2 은혜에 들어감 5: 3 환난은 인내를 5: 4 소망을 이루는 줄

작성자jung8h(정팔현)|작성시간21.11.23|조회수151 목록 댓글 0

롬 5: 2 은혜에 들어감    5: 3 환난은 인내를    5: 4 소망을 이루는 줄

 

 

롬 5: 2 은혜에 들어감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의 은혜를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이제 이 칭의의 은혜 안에 서 있다.

 

성도는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의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본 절은 칭의의 또 하나의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임을 증거 한다. 이 즐거움은 미래의 영광스런 세계, 곧 하나님의 영광으로 단장된 천국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만 사죄와 칭의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롬 3: 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1] 또한 그로 말미암아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 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2]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 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엡 2: 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 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 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 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 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 23 주석을 참조하라.

 

본 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 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 '카우코메다'가 1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혹은)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과 본 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과도 조화가 잘 된다(3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다.

 

요 14: 3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7: 24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히 2: 10 -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벧전 5: 4 -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2. 환난과 소망 ( 5: 3 - 4 )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 인내는 연단을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 3 환난은 인내를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1)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

 

고후 4: 18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요 14: 1-3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모든 환난이 유익한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환난을 받은 자가 견디어 낼만한 미미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환난 자체는 유익하지 않다.

 

환난에 얽매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통하여 유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바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그 환난이 유익한 일이 되고, 환난으로 인하여 더욱 강건하게 된다.

 

운동선수가 평소에 많은 훈련을 통하여 기술과 능력을 쌓아 기량이 훌륭한 자로 변화한다면 훈련기간 중의 환난은 유익한 것이다.

 

즉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일하시도록 허용할 때, 그 환난은 인내를 낳고, 그 인내는 연단으로 이어져 마침내는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2] 이는 환난은 인내를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

 

마 13: 20-22 -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롬 5: 4 소망을 이루는 줄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인내는 연단을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환난은 고통스러우나 성도에게 크게 유익하다.

 

 

1] 인내는 연단을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 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

 

벧전 1: 7 -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 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 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2]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1)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

 

행 28: 20 -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

 

고전 15: 12-19 -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 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 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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