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5: 16 - 18 육체의 소욕과 성령
5. 육체의 소욕과 성령 ( 5: 16-18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 5: 16 성령을 따라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거듭나는 것도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 결과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도 하나님의 영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행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표현한다.
* 엡 1: 13-14 -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은 후 죄를 이기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삶 곧 성화(聖化)의 과정도 성령께서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일이다. 본문은 바로 이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율법주의자들은 인력으로 조문(條文)을 하나하나 실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성도는,
(1) 사랑의 동기로 행하면서 율법을 괴로운 짐으로 여기지 않고 순종한다.
(2) 성령님의 도우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실행력이 강하 된다.
(3) 그의 행실에도 약점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신자 육체의 욕심대로 따라가는 자는 아니다.
첫째,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따라'라는 원어(프뉴마티)는 단순히 '성령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라는 말이다. 그것은 '성령을 좇아, 성령을 따라,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행하다'는 원어(페리파테오)는 '걷다(walk), 행동하다, 살다'는 뜻이다.
2]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화는 나의 힘, 나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성화는 성도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에서도 밝히 입증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6 장 이하에서 성화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8 장에서 성화가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이루어짐을 밝히 증명하였다. (개역 성경은 성령을 '영'으로 번역함으로써 인간의 영처럼 잘못되었다.)
* 롬 8: 4, 13-14 -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사는 자,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였다. 구약 역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을 입증하였다.
* 렘 17: 9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렘 13: 23 -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에스겔 36: 24-28은, 하나님께서 장차 당신의 영을 인생들에게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법을 지키게 하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 겔 36: 24-28 -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갈 5: 17 육체의 소욕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육체는 타락한 사람의 옛 본성을 좇아 행하는 죄악된 삶을 의미하고, 성령은 거듭난 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거룩한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를 좇아 행한 삶의 열매(19-21절)와 성령을 좇아 행한 삶의 열매(22-23절)는 확연하게 다르다.
1]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둘째, 성도가 성령으로 행해야 할 이유는, 자신 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 원문에는 이 구절 첫머리에 '왜 그런가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앞 절의 이유를 보여준다.
성령을 좇아 행함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육체를 거슬러 싸워 육체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 속에도 이런 대립과 싸움이 있기 때문에, 만일 그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실패할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만일 성도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한다면, 그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
성도의 싸움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성도의 싸움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본문에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단순히 '몸'(소마)을 가리키지 않는다. 로마서에서 '육신'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 부패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영이나 육의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육의 통일체로서의 인간 본성의 죄악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도에게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속성이다.
본문의 '성령'이 원문에서 단순히 '영'(프뉴마)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것이 혹시 인간의 영을 가리키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명백히 잘못이다.
성경 그리스어 사전에 보면, '영'이라는 말(프뉴마)은 111회나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단지 49회만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여러 구절들에 성령이라는 말이 원문에서 단순히 '영'이라고만 나온다(3: 2-3, 5, 14. 4: 29. 5: 5, 16-18, 22, 25. 6: 8).
두 구절만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 3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씀했고, 또 4: 29은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했다.
2]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움으로 인하여 육체(인간의 부패한 성질)의 소원이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영전(靈戰)은 참된 성도에게만 있다. 영전이 있으므로 죄악에 대한 승리가 온다. 이 세상 전쟁에 있어서는 언제나 필승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전에 가담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이다.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물론 인간의 본성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가 있다. 로마서 7 장은 그것에 대해 잘 입증한다. 거기 보면 사람이 중생한 후에도 그 속에 죄의 원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진정한 내[자아]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했다(17절).
진정한 나는 구원받은 후 성향이 새로워졌다. 전에는 무지와 부도덕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의롭고 선하게 살고자 한다.
성도 속에 남아 있는 죄악성을 바울은 '육신'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여전히 죄악 되고 연약하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했다(롬 7: 18).
그러나 성도 속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또 한 원리가 있다. 그것을 바울은 '속사람', '마음의 법', 혹은 '마음'(누스, 생각, mind)이라고 표현하였다(22-23, 25절).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 즉 육신과 마음이 있으나, 그것은 성화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일 뿐이다.
중생한 자의 새 마음, 새 성향만으로는 성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다(24절).
그러나 로마서 8 장에서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계시며(9절), 성도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의와 선을 이룰 수 있음을 간증하였다(4, 13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다(14절). 이러한 진리들은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싸움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패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성도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부패성을 극복해 나간다.
갈 5: 18 성령의 인도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1]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는 것은 무엇으로 식별할 수 있는가?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진심으로 육체(옛 사람)를 죽임이니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버림이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친구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허탄한 이 세상 쾌락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패하고 더러운 열매를 내어 버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좋다는 것들을 버리고 그 대신 고난(환란)을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특징이 아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역사이다."(Vorlesung ber den R merbrief, 1965, s.270).
루터의 이 말은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된 자들의 그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위의 표준에 맞지 않는 행동 곧, 결점이 전연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결점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회개(悔改)가 있다.
칼뱅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자기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벧후 1: 21).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정죄를 면한 자이니(롬 8: 1),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실에 허물과 결점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허물없는 것과 같이 보아주신다."
셋째, 성도가 구원받은 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산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의 성도의 죄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를 표현한다.
로마서 8: 14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고 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은 구약의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구약의 제도 아래서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율법의 요구는 한마디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었다. 구약 아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죄책과 정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줄 뿐, 죄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율법에 암시된 메시야께서 오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들을 위한 의(義)가 되셨다. 그것이 신약의 복음이다.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 '의'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의'가 갈라디아서가 강조하는 자유의 근거이다.
로마서 8: 1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이 '의'에 근거한 성도의 자유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뜻의 자유가 아니라고 갈라디아서 5: 13에서도 말씀했다. 그러나 이 자유야말로 성도의 기쁨과 평강의 근거요 보장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 때때로 실수하여 죄를 범한다 하여도 다시 진심으로 뉘우치며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의'와 이 '자유'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은 것이다. 성도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성화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과 같다.
본문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첫째, 성도의 성화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성화의 방법이다.
둘째, 성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 속에 내적 싸움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 정도가 아니고,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패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성도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극복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이를 위해 우리 속에 계신다.
셋째, 성도가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비록 때때로 실패와 실수가 있을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더 이상 그를 정죄(定罪)하거나 두렵게 하지 못한다. 성도는 연약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으며 새 힘을 얻어 점점 더 거룩하여진다.
여러분은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는가?
여러분은 이제 성령으로,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