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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팔현목사

요한계시록 2: 1-7 에베소 교회 ( 박 조준 목사)

작성자jung8h(정팔현)|작성시간22.06.30|조회수55 목록 댓글 0

요한계시록 2: 1-7 에베소 교회 ( 박 조준 목사)

 

 

요한계시록 2: 1-7 에베소 교회 ( 박 조준 목사)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차례대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소아시아에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교회는 그 교 회들 중에 대표적인 교회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요한계시록은 숫자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가령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란 아시아의 전체 교회를 의미한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교회들에 대한 칭찬과 책망, 교훈과 격려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그 당시를 위한 교훈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에베소교회가 신약 시대에 있던 교회 중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요, 무역항으로서 동서양 문화의 교류점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에 설립된 교회입니다. 여신 다이아나를 섬기는 우상 숭배의 도시에 자리잡은 이 교회는 집마다 다니며 눈물로 경고하던 사도 바울의 전도 방식을 이어받은, 영적인 활기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에베소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자세히 알기 원하는 분은 사도행전 18~20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밀레도로 사도 바울을 찾아온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의 깊은 신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에베소”란 말은 “바라던 자”란 뜻입니다. 이 교회는 그야말로 온 교회사를 통하여 가장 바람직한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교회는 뜨거운 선교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많은 유대인들이 개심하여 이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8절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했습니다. 로마서 16장 26절에 복음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려고” 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보면 복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도 임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3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네 구절을 종합해 볼 때, 이방인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유대인이 개종해서 예수를 믿게 된 성도들에 의해서 초대교회가 그처럼 널리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7장의 예언의 말씀에 나타난 대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는 다시금 복음의 주도권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넘어가서 14만 4천의 유대인 성도들이 나가 복음을 증거하여 “인간이 능히 헤아릴 수 없이 큰 무리”에게 복음이 전파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먼저 칭찬하였습니다.

 

첫째, 에베소교회는 수고하는 교회였습니다. “내가… 너희 수고와 노력과 인내를 알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초대교회가 성도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사랑으로 수고하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충성된 봉사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며 모두를 기록해 두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봉사의 행위는 아무리 그것이 작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눈앞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이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순전히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애태우시고, 눈물 흘리시고, 고생하시고, 기도하시고, 주무시지 못하신 것을 저로서는 갚을 길이 도저히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이 사랑의 뜻을 여러분의 수고 위에 영육간의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과 인내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둘째, 에베소교회는 성별된 교회였습니다.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라 하는데 주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과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라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배는 물에 있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배가 산에 있으면 배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배 속으로 물이 들어오면 배는 물 속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주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주님의 교회도 세상에 속하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교회는 성별 되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세속적인 신자들과의 교제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17절에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했습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나 교회는 이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셋째, 에베소교회는 성결한 교회였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오순절 이후에 주님의 추수 밭에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이 가라지 중의 몇은 자기가 사도인 것처럼 위장을 했으며 초대교회 몇이 그만 속아넘어갔습니다. 그것은 그 교회에 성경의 사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교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영을 시험하여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고 속아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에베소교회도 바로 그런 교회 중의 하나로서 “거짓 사도”에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자기의 이익을 좇아 행하는, 십자가의 원수인 거짓 사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참된 하나님의 종인지 사람들을 시험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지 않다면 거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처럼 신사적인 교인이 되어 말씀에 비추어서 거짓 선지자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에베소교회는 참고 견디는 교회였습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구조로 보아 에베소교회는 꾸준히 복음 전파에 충성하며 잠시도 게으르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튼튼한 교회였습니다. 이 칭찬의 말씀으로 신령한 교회의 충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어떤 어려움도 견디었습니다.

 

다섯째, 에베소교회는 자립한 교회였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니골라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이단적인 문제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감각적인 행위를 함으로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직제도의 규율을 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주교와 대주교, 추기경, 교황 등의 제도적인 계급을 만들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인간에 의해 좌우될 때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 채 주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제도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현재의 성직 제도와 같은 니골라당을 예수님께서 “나도 미워한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배워야 할 교훈, 그것은 어떤 제도나 기구, 주장이나 치리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내 영으로만 되느니라” 하신 귀중한 교훈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훌륭한 점을 들어 아낌없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였습니다. 먼저 칭찬을 들은 후 책망을 듣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책망을 받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칭찬하다가 책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의 뜻은 아무리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도 잘못된 것을 책망해서 그 잘못을 고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책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했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책망 들을 만한 일이 꼭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충성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어야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그 아름다운 체험들을 잊어버리고 평범한 일로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이 편지를 받을 무렵에는 그의 자녀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은 때였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이 신혼 시절에는 문자 그대로 밀월의 생활을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얼마나 간절히 사모합니까? 상대방하고 결혼하지 못하면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결혼을 못할 경우 함께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간혹 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이 인생의 전부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결혼을 합니다. “죽는다 산다”하며 소문을 내며 결혼을 합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어떤 경우에 이 결혼이 얼마 가지 못해서 파탄의 비극을 초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 생명을 버리려고 할 정도로 사랑하던 사람들 사이가 비극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어떤 이는 상대방의 가문을 봅니다. 어떤 이는 상대방의 재산을 봅니다. 어떤 이는 학벌을 봅니다. 어떤 이는 외모를 봅니다. 이런 세상적인 것은 얼마 안가서 시들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권태를 느끼고 싫어져서 종래는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병을 고쳐 주어서 따라다녔습니다. 배불리 먹게 해 주어서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어지자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은 사랑, 더 완전한 사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합시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이전보다 더욱더 사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처럼 비극은 없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처음 사랑을 지속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받고 영적인 체험을 할 때의 그 짜릿한 기쁨을 성도들은 끝까지 간직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사랑을 맛본 뒤에 점점 일상적인 생활로 후퇴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생활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새로 지음 받은 기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우리는 첫 사랑의 감격을 늘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세 가지로 훈계하신 것을 살펴봅니다.

 

첫째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초대교회 시절 그의 신실함을 기억하고 그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남은 것을 지키라고 엄히 훈계하십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버리게 되었나 하는 것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처음 믿어 신령한 체험을 하고 감격해 하는 사람이 있지만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사랑이 없고 감격이 없이 메마른 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찾아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회개는 그 죄의 원인을 찾아야 청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도 다윗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 정도의 일은 죄로 생각지도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죄를 덮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가 다윗에게 나타나서 비유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떤 동네에 부자가 있었습니다. 소도, 양도 많은 부자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양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그 양은 그의 재산이요, 식구나 다름없이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해야겠는데 자기의 소나 양을 잡으려니까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 그렇게 소중히 키우는 양을 빼앗아다가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윗이 본래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라 화를 벌컥 내면서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그 놈을 잡아다가 법대로 4배나 갚게 하라”하면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같이 호령을 했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는 정색을 하고 다윗 왕을 향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하면서 무서운 책망을 했습니다. 이때에야 다윗이 깨닫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하고 회개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의 시 가운데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였나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죄를 알아야 회개하고 청산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범하고도 죄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셔서 죄를 발견하고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를 알아야 회개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회개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완전히 방향을 180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적인 것과 정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회개도 인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셋째로,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훈 마지막 말씀으로 그들의 사랑을 시험해 보는 기준이 됩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말씀을 따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주님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무절제함과 헌신이 없는 것을 뉘우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가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리고자 하지 않는 신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면 아무리 큰 일을 맡아도 무겁지 않고 아무리 희생을 하여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을 얼마나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는가”하는 데 있습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경고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회개를 바라시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가 없어질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보면 에베소교회는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용하실 때 자주 쓰시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귀가 없는 자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육신의 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귀는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귀가 없다는 말은 영적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데 대하여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귀가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체험을 햇다고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5장에 보면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가 어려우니라”(히 5:11)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행위에서 표시가 나는데, 그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을 통해 심령의 귀가 열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분명히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생명나무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먹을 수 없었던 열매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이 나무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이기는 자뿐입니다.” 누가 이기는 자가 됩니까? 그 대답은 요한일서 5장 4~5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이 길 밖에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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