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 12 – 17 버가모교회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는 사탄의 권좌(위, 位)가 있는 곳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버가모 교회의 사자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 24).
장차 온 세상에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 윤리적 죄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악을 정죄하면서 죄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며 주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 12 – 17 버가모교회 ( 박 조준 목사 )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버가모교회는 1세기말 경까지는 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도시는 여러 가지 헬라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하였습니다. “사단의 위가 있는 데”란 말은 “사단이 앉아 있는 데”란 뜻입니다. 사단은 제 왕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그 왕국의 옛 수도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사단의 영을 입은 니므롯과 그의 어미를 통해서 바벨론에서 우상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한, 바벨론은 사단이 인간을 공격하는 좋은 발판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영광이 쇠하게 되자 황폐하게 되었고 사단은 그들의 기반을 옮길 수밖에 없게 되어 다른 곳을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버가모인데 그것은 버가모에 우상 숭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지방에 파견되어 있는 전도자들도 너무 이단에 치우쳐 있어서 사단이 거하기에 꼭 알맞은 장소로 생각되었습니다. 버가모교회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문도 다른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메시지와 같이 칭찬과 책망, 그리고 교훈과 격려로 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네가 어디 사는 것은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서머나교회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를 육성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교회를 핍박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콘스탄틴은 본래 기독교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던 황제인데 한 번은 그가 하늘에서 타오르고 있는 십자가를 환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의 기록이 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기독교를 잘 포용하게 되면 그의 적들을 모두 이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승인하고 자신은 기독교의 보호자이며 방어자라고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 자체는 콘스탄틴 황제가 진심으로 행한 일이라고 보아도 좋겠지만,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는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가졌거나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가령 로마 주교였던 유세비우스에게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성경 사본 50부를 만들도록 한 일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사본 중 몇 개가 지금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한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칙령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교회의 사업을 위해서 국고에서 공급해 주고 우상의 신당들을 교회에 넘겨주었습니다. 얼른 볼 때 좋은 때를 맞은 것 같지만 교회는 사실상 위기를 맞았습니다. 지도자들이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방 종교의 관습과 비슷한 것을 교회에 끌어들였습니다. 한 가지를 타협하다 보니 다른 것도 양보하게 되어 커다란 축복으로 보이던 것들이 나중에 가서는 커다란 저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약 300년 간 교회에는 적그리스도적인 관습들이 채택되어 교회의 뜨거움은 사라지고 선교적인 사명이 희미해졌습니다. 왜요? 황제가 기독교를 두둔하고 누구나 다 기독교인의 행세를 하려고 하니 전도할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사실 위험한 일입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선교열을 주어 왔던,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던 설(說)도 기독교가 국교로 되면서부터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세력을 얻게 될수록 점점 세상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이미 그리스도의 왕국이 왔고 주님은 천년왕국 후에나 오신다는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받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권력에게 옹호를 받고 권력과 타협하게 되면 교회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함을 강조할 때 교회는 열심을 내지만, 그 믿음이 깨지면 교회는 냉담해지고 무관심해지며 세속화되어 맥이 빠지고 맙니다.
이때에 버가모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나타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우상의 도시에 있는 이 버가모교회의 영적인 싸움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교회에 아주 적합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영적인 싸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였습니다. 사단의 어떤 계교도, 작전도, 활동도 말씀 앞에서는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모습은 버가모교회로 하여금 박해뿐만 아니라 간교한 유혹도 말씀으로 이기라는 뜻입니다. 날선 검은 우리의 병든 부분을 치료하는 메스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데도(요 17:17), 깨끗케 하실 때도(요 15:3), 기쁘게 하시는 데도(요 15:11), 평화를 가져다주실 때에도(요 16:33) 하나님의 말씀을 쓰셨습니다. 버가모교회와 버가모 시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했더라면 중세의 암흑 시대는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버가모교회를 향하여 칭찬하십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단은 300년 동안 로마 황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서는 절대로 그들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가모 시대를 통해서 방임과 상승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마귀의 역사는 다양합니다. 강압으로 안되면 살살 달래서 맥이 빠지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교회는,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는 칭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충성된 종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는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세상의 권력과 그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사단도 도전하지 못하고 물러가고 맙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축복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선배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거름이 되어 이만큼 자라게 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순수성을 저버리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버가모교회의 믿음 지킨 것을 칭찬하신 후 그들이 비록 교리적으로는 바르지만 행실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14절에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자세히 알기를 바라는 분은 구약 민수기 22~31장까지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로서 돈을 얻을 욕심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예언을 합니다. 모압의 왕인 발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쪽으로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발람 선지자를 돈으로 포섭합니다. 그렇게 해서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불리한 예언을 하게 하고 발람도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발람 선지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애를 쓰지만 오히려 축복의 말이 터져 나옵니다. 마침내 실망한 그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모압 족속과 동맹을 맺도록 선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 선지의 말에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모압 사람들과 통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회 전체가 영적으로 불결해지게 된 것입니다. 버가모교회가 교회적인 면에는 충실했고 순교자까지 냈지만 세상과 분리되지 못하고 이방 종교와 혼합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영향이 얼마나 큽니까? 믿는 사람들이 성령의 무한하신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짝하게 때 그는 자기에게 올무를 놓아 멸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발람처럼 세상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의 사명을 잊어버리면 안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도 망하고 따라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의 교훈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15절에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에 대해서는 에베소교회에서 본 바 있지만 에베소교회에서는 이것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니골라당이란 것은 세속을 장악하고 강력한 성직 제도를 내세우고 있던 파로 이들이 교회에 성령의 강한 역사를 일으키도록 도와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은 버가모 교회에 이와 같은 헛된 교훈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내인데 하나님만 섬기고 살아야지 다른데 마음이 팔리는 것은 음행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는 일을 하는 결과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 상태는 어떠합니까? 16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회개하면 됩니다. 아무리 더러운 죄, 아무리 무서운 죄라도 회개하면 삽니다. 하나님이 용서 못하실 죄는 없으십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의 죄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사실을 자진하여 뉘우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길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좌우에 날선 검”인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입의 검으로 싸우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와 그 말씀 앞에 누가 능히 숨을 수 있으며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장 31절에 보면 “우리가 스스로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버가모교회를 향하여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7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회개하면 큰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입니다.
“감추어진 만나” 만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내려 주신 하늘의 양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하여 공급하여 주시는 신령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교회적인 양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각자가 나아가 광야에서 만나를 주은 것처럼 각자가 자기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생이 어떤 역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들에게 “나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흰 돌” 돌은 변함없는 것을 의미하고 흰 것은 성결을 뜻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유혹 속에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킨 사람에게 흰 돌을 주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흰 돌이 무리의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나아와 용서와 구원을 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리라는 표시로 주었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흰 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영원한 무리의 선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흰 돌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새 이름”은 구원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우리 모두 감춰진 만나를 얻고 흰 돌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