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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팔현목사

계 3: 20 - 22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작성자jung8h(정팔현)|작성시간22.07.12|조회수150 목록 댓글 0

계 3: 20 - 22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 여러 견해.

 

①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인 교제를 말한다.

 

렌스키[Richard C. H. Lenski] : 이 잔치는 천국에서 열려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인 사상이 내포되지 않았다. [성경주석 계시록, p. 138]

 

존슨[A. F. Johnson] : 이것은 동양의 풍습으로 가장 가까운 친구와 격의 없는 친교를 나누는 중요한 기회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 위하여 오시는 일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요 14:23]. [엑스포지터스 요한계시록, p. 385]

 

② 현세에서 시작하여 재림으로 완성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한다.

 

성도들이 회개로 주님을 영접하고 나누는 교제다. 현재로 시작하여 내세에서 온전히 누릴 때까지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본다.

 

핸드릭슨[W. Hendriksen] : 그리스도와 성도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특별한 우정과 언약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성도는 구주시요 주인이신 분과 더불어 복된 교제를 갖는다.[요 14: 23. 15: 5. 요일 2: 24] 이 교제는 금세에서 시작하여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으며 동시에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을 때인 내세에 완전하게 된다.[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93]

 

③ 종말론적인 의미의 식사를 의미한다.

 

본문은 미래적인 메시아 왕국 안에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누리게 될 교제의 향연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로버트슨[A. T. Robertson] : 메시아왕국 안에서의 교제를 말한다.[눅 22: 30. 막 14: 25. 마 26: 29]. 고린도전서 6: 13에서처럼 비유적인 의미가 분명하다. [신약원어 연구해설 요한계시록, p. 205]

 

백위드[Beckwith] : 상징은 완전히 종말론적이다. 성만찬의 의미는 전혀 없다. [마운스,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152]

 

(2) 저자의 견해.

 

영적 교제를 포함하여계 10: 10에서 작은 책을 먹어버림으로 약속이 성취되는 미래의 것으로 해석한다.

 

① 원어적으로 입증된다.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킨다(Morris, Ladd, Johnson, 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신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신다.

 

요 14: 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②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③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계 3: 21 아버지 보좌에 함께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21) 축 복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계 1: 6,9 -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아멘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5: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계 20: 4-6 -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눅 22: 28-30 -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딤후 2: 12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누가 이기는 자입니까?

 

'이기는 그'라는 의미가 역사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복음적으로는 전 세계 어느 시대, 어느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면서도 예언적으로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종말의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1) 내 보좌에 - 천국 보좌.

 

'보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드로노'(*)에는 '위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가 아니라, '안에'를 의미하는 '엔'(*)이 사용되어 단순히 보좌에 앉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한다(Plummer).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패자는 비참하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패자는 승자의 발에 입을 맞춘다. 왕이 나와서 적군들이 입을 맞출 때 발로 그 목을 눌러 버린다.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그의 노예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지면 사탄의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절대적으로 이겨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축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기셨다. 육적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이기셨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재림이 역사적으로 임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신앙으로 이겨야 한다.

 

마 19: 28 예수께서 이르시대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① 심판의 보좌.

 

② 영광의 보좌.

 

(2)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단 7: 13-14 -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엡 1: 20-23 -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자의 충만함이니라.

 

① 함께 앉게 한다.

 

② 함께 영광을 받도록 한다.

 

③ 함께 심판하신다. - 받은 고난에 대한 보응.

 

 

계 3: 22 성령의 말씀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

 

 

22) 성령의 하시는 말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들을 수 있는 영적 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질서.

 

(2) 계시의 말씀인 성경

 

계시의 영으로 분별.

 

(3) 영화에 이를 때까지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

 

마지막 종말 때에는 거짓 영과 세상의 지식으로 영계가 흔들림을 알고 기도로 무장하여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진리를 확신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목사의 문제는 미지근한 데 있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는 주께 대한 불신앙과 의심이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시력도 없었다.

 

그는 세상적 가치관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미지근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회개를 두려워 말자.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으로 회개해야 하며 주님을 마음에 영접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 즉 성경 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의 문의 열림과 그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기도의 응답을 경험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박 조준 목사)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부활하신 주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을 생각해 왔는데 이제 그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이 교회는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것, 훌륭한 것은 본받게 되고 나쁜 것은 미리 알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힘쓰게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라오디게아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로부터 약 40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내륙 도시로서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헬라의 문명과 학문에 기반을 둔 이 교회는 부유했던 것 같은데 에베소교회 근방에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교회의 문제였습니다. 라오디게아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본문 14절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하였습니다.

 

주님의 세 가지 모습을 봅시다.

 

첫째로,“아멘이시요”라고 합니다.‘

 

아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진실되다”는 말입니다. 말의 최종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드릴 때 “아멘”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참됩니다”하는 뜻입니다. 더구나 여기서 말하는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진리가 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공부하면 됩니다. 주님도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이면서 진리의 충성된 증인이 되십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한없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이십니다.

 

거짓 종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말하는데, 골로새서 1장 15~17절에 보면 바른 대답이 나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요한복음 1장 3절에도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창조의 근원이시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만물에 대해 충성된 증인이시요, 가장 높은 권위자이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15절에 “미지근한 상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교회들의 미지근한 상태를 훤히 알고 계십니다. “뜨겁지 않다는 것”은 “착한 일에 대한 열심이 없다”는 말이고, “차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지근하다”는 것은 “무관심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무관심하다”는 것처럼 좋지 않은 말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관심하고, 교인이 교회에 무관심하고, 교역자가 교인에게 무관심하고, 정부가 국민에게 무관심하고, 국민이 국가에 무관심하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꼭 맞는 말입니다. 온갖 기구나 계획, 조직, 위원회 같은 것은 있지만 능력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후서 3장 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마지막 때의 교회들의 모습을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킨 일이 없는 이 미지근한 교회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연고로 많은 영혼을 속였습니다. 이런 교회가 대개가 복음보다는 사회 활동에 관심이 있고, 심령의 변화보다는 사회 개혁에 힘쓰고, 기도보다는 계획을 세우는 데 열심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결국 주님께로부터 토해냄을 받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교회의 비참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본문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도 악하지만 가장 비참한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와 그 시대는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그들이 물질적인 면에서 부요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풍성함이 우리 심령의 풍성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이 사실은 라오디게아교회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주님께서 그 교회에 대해 쓰신 사실과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이 “나는 부요한 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가 영적인 생명을 키워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도 라오디게아교회 같은 현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가 물질적으로 부요합니다. 제일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멋있는 건물과 물샐틈없는 치밀한 조직과 수십 수백 억의 기금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교인이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저희들 스스로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만 스스로의 궁핍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없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인간은 조직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설교를 하고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만이 인간의 생명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업이 인간을 영화롭게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을 시험해 보는 좋은 방법은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많은 재정을 가지고 많은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심판 날에 가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신 라오디게아교회는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저희는 곤고하고 가련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가산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세상 물질의 부요함이 인간의 갈급한 심령을 채워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는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이사야 선지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저희는 가난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지만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가난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셨습니다.

 

셋째로, 저희는 눈이 멀었습니다.

 

이 말은 육신의 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육신의 시력이 양쪽 다 1.2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지식의 눈이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에 눈이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의 눈이 어두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신령한 세계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갈이 어린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떠날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떠났는데 얼마 안가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어린애는 목이 말라 하는데 마실 물이 없습니다. 하갈은 기진해 쓰러져 있는 이스마엘을 땅에 눕게 한 후 어린 자식이 목말라 죽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한참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갈의 마음이 혼란해서 바로 보지 못하고 허둥지둥하였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이 말라 애타하면서도 그 눈이 어두워서 곁에 있는 샘물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방황하고, 초조하고, 절망과 좌절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샘물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있었습니다. 문제는 샘물이 없어서 목이 마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샘물을 발견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샘물, 우리의 갈한 목을 해갈하고도 남을 샘물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실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넷째로, 저희는 벌거벗었습니다.

 

저희는 종교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찬송도 부르고 신앙고백도 하고 기도도 드립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주님 없이 일하기 때문에 저희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의의 옷을 입지 못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권면하신 말씀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하십니다.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것을 가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어합니다. 거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참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참 부요가 주님에게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이 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가난하므로 무엇을 사라고 권면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흥미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서 5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초청하시면서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이란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그 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낮아져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참으로 부요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흰 옷을 사서 입으라”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존전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의의 옷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3장 5절에서 사데교회를 생각할 때 말씀드린 대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했는데 이것은 흰 모시옷을 입으라는 말이 아니라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1장 10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한 같게 하셨음이라” 했습니다. 흰 옷은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의미합니다. 의란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에게 값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값은 이미 주님께서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을 떠서 보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온전하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의 눈이 밝아져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서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찬송이 넘치시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2. 이 곳과 저 곳 멀잖다 주 예수 건너오셔서 내 손을 잡고 가는 것 내 평생 소원이로다

3. 저 묘한 화초 향기는 바람에 불려오는데 생명수 강변 화초는 늘 사시 청청하도다

4 청아한 음악 소리는 내 귀에 들려오는데 흰 옷을 입은 무리들 천사와 노래하도다.

(후렴) 영화롭다 낙원이여 이 산 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거듭 거듭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눈을 보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중을 해도 중단하지 아니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시던 발걸음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집어던지고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너는 내가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이때 바디매오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바로 구했습니다. 주님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생각만 하던 세상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넷째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십니다.

 

미지근하고 무관심한 상태에서 뜨거워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범사에 열심히 합니다. 전도도 열심히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성경도 열심히 읽습니다. 서로가 열심히 사랑합니다. 분위기가 뜨겁습니다. 뜨거울 때에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주시는 말씀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구원의 계획을 가장 간단하고도 쉽게 나타내신 글”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이라는 것은 인간의 중심 또는 그의 가슴 속에 있는 문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려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강제로 문을 걷어차서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두드리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마음의 문 열쇠는 안에만 있습니다.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예수님은 2천년 가까이 신실하게 참으시며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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