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아디라 교회.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소아시아의 서쪽, 고대의 루디아 지방의 성읍으로 오늘날 토이기의 성읍 아키사(Akhisar)이다. 신약성경에 4회 인용 되었다.(행 16:14. 계 1:11. 2:18,24). 버가모의 동남 64㎞ 헤르무스 강(R. Hermus)의 지류 루코스 강(R. Lycus)의 북방에 펼쳐져 있는 기름진 평야로 버가모와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성읍은 셀로우코스Ⅰ세(Seleucus Ⅰ, BC 312-280)에 의해 설립되었다.(딸 Qugavthr의 출생 소식을 듣고 지은 이름이다)
BC 19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후에 버가모 왕국의 지배가 BC 133년까지 계속되고, 그 후 로마의 통치로 들어갔다. 원래는 소아시아를 횡단하는 간선도로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 전초기지로 건설되었다. 로마 평화(rac Romana)의 군사적 목적이 상실되자 통상로를 가졌다는 유리한 점에서 상공업 도시로 발달하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동세공, 피혁가공, 염색, 양모 방적, 아마포 등의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 있었다. 루디아는 자주(紫紬) 장사였다.(행 16:14)
로마 제정기(帝政期)에는 튜님노스(태양신)와 아폴로를 절충하여 아폴로 튜님노스(Apollo-Tyrimnos)와 황제 예배가 있었다. 또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을 우상으로 섬기는 풍속이 있었다. 신당에는 그 사신(邪神)의 신탁(神託)을 받은 여선지가 있었다.
미약한 교회는 충돌을 면하려고 타협의 길을 취했다. 신자들은 조합의 지도에 따라서 우상 관계의 연석(宴席)에 참예한 듯하다.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음란한 일에까지 유인되었을 수 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책망은 이와 같은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계 2:20-24).
(1) 이름과 시대상
일곱 교회 중에서 두아디라에 보내는 편지가 가장 길듯이, 일곱 교회 중에서 중세 암흑시대가 가장 길었다. 중세 암흑시대는 왕도 교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교황청에서 파면해 버린 시대였다. 다시 말하면 로마 교황권이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였다.
중세 기독교는 4세기, 5세기에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어서 전 세계로 놀랍게 퍼져 나갔다. A. D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하여 A. D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교회는 화려했다.
좋은 건물과 권력, 명예와 부를 다 가졌다. 모든 예술가들은 로마 교황청 하나를 위해 존재했다. 웨스트민스터 교회는 하나의 예술품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타락하였다. 신앙이 무너진 부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믿음이 떠난 물질은 흉기다. 왜냐하면 영혼을 죽게 하기 때문이다.
① 의미
'두아디라'라는 단어는 합성어다. '두아'와 '디라'인데, 그 뜻은 '관 쓴 여자, 면류관을 쓴 여자'다. 다른 좋은 의미도 있다. '수고의 향기, 희생' 등의 뜻이 있다. 중세 교회가 국교가 되어 핍박이 없고, 모든 영광을 누렸던 그 시대를 의미한다.
② 상징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며 풍요 속에서 신앙이 죽어버린 시대를 예언적으로 예표하고 있다.
(2) 화폐
두아디라 지역에서 통용되었던 화폐의 디자인은 사단의 깊음을 의미하는 주문 이였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① 불꽃같은 눈
두아디라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예수님, 예리한 눈으로 통찰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을 통찰하시므로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다.
인간이 투시기를 통하여 온 몸을 살피는 것처럼 그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보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감춘다고 감춰지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투명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해준다.
* 단 10: 6 -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 슥 3: 9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 슥 4: 10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 사 30: 26 -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② 빛난 주석 같은 발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말한다. 빛난다는 것은 번쩍이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심판의 발이다. 불과 같은 이글거리는 주석 발로 밟아 버리면 모든 생물이 살 수 없다. 중세가 너무 타락한 암흑시대이므로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
* 단 2: 41-45 -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만할 것이며 43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 풀무
* 겔 22: 18-22 - 18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끼가 되었나니 곧 풀무 가운데 있는 놋이나 상납이나 철이나 납이며 은의 찌끼로다. 19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다 찌끼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 20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철이나 납이나 상납이나 모아서 풀무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와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 두고 녹일지라. 21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되 22 은이 풀무 가운데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두아디라에서 숭배하던 태양신 '아폴로'와 거짓 예언자 '이세벨'(20절)을 염두에 두고 경고하신다. 그들의 우상 숭배와 행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당시 청동업이 발달한 두아디라에 사는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생생한 화면처럼 느껴지는 계시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Johnson, Ramsay).
③ 하나님의 아들
계시록에서는 '인자'라는 말로 두 번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는 여기서 유일하게 나타난다. 두아디라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면서도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너희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신다.
1949년 아일랜드 가톨릭 성직자들이 교황 레오 12세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 중재자이신 다른 예수'라고 했다. 교회도 집사 때는 조용하다가 장로가 되면 교회를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인간은 높아지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 위치까지 높아져 버린다.
미국의 경우도 청교도 신앙을 보고 하나님께서 각종 좋은 것으로 축복하셨는데, 지금은 각종 나쁜 섹스 문화, 타락한 음악 문화, 전쟁 문화, 사탄 문화가 나왔다. 처음에 먹을 것도 없던 그들이 하나님이 복주시니 어느 날부터 안주하면서 타락해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언급은 일곱 교회 서신의 서두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 중에서 본 절에만 나타난다. 이는 시 2:7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품성의 위엄을 강조하며(Charles) 두아디라 지방의 우상이면서 제우스의 아들로 여겼던 아폴로나 황제와 대조를 이루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4) 칭찬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칭찬은 두아디라 교회가 지닌 성숙함에 대한 것이었다. 본 절에는 다섯 가지 칭찬 덕목이 나타난다.
① 사업.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가'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연이어 언급되는 '사랑', '믿음', '섬김', '인내' 등의 제반 덕목을 포괄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 요 6: 29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② 사랑.
이것은 에베소 교회가 부족했던 덕목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규범이다.
* 마 22: 37-40 -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ㄷ)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고전 12: 31-13: 3 -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제다. 모두가 사랑을 노래한다. TV에서도, 극장에서도, 공연장에서도, 책에서도, 컴퓨터에서도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주께서 기억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랑이다.
③ 믿음.
주께서 믿음을 보시며 믿음을 아신다. 그러므로 큰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가나안 여인 같은 믿음, 백부장 같은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란다. 주님이 말하신 말세에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는 한탄처럼 말세에는 믿음 보기가 어렵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 되는 삶을 가리킨다. '믿음'보다 '사랑'의 덕목이 먼저 언급된 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믿음보다 '사랑'을 강조한 듯하다. 그래서 말씀과 믿음의 바탕이 없는 사람들이 '이세벨'같은 이단을 수용한 듯하다.
* 눅 18: 8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④ 섬김.
주님은 섬김을 아신다.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의 종이 되어 섬겼습니까? 그는 높아질 것이다. 자기 스스로 높아지지 말라. 스스로 높아지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때 주님께서 높여주시는 사람이 되라. 그렇다면 주께서 제자들을 섬김같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기 바란다. 이는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덕목이다.
* 롬 15: 25 -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고전 16: 15 -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⑤ 인내.
인내하는 사람의 심정을 누가 알까? 스스로 질문해 본다. 아무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주께서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지는 교회의 사업으로 처음 행위는 영혼구원사업이라면 나중 행위는 사회구원사업을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으로(4절) 두아디라 교회의 신앙 상태가 현저하게 진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에베소 교회가 믿는 도리를 강조하다 사랑을 잃었으나 두아디라는 사랑이 식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 사랑의 사업이 처음보다 더 많아졌음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