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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생애와 예술 프란시스코 데 고야 (Francisco de Goya ;1746-1828)
[천사들로써 신의 이름으로 찬미함] The Adoration of the Name of The Lord, 1772, fresco, Cathedral of El Pilar at Saragossa.
프란시스코 데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사 부근 펜테토도스 마을에서 평범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는 공증인의 아들로 도금업에 종사했고, 어머니 그라시아 루시엔테스는 펜테토도스 마을의 소지주 출신이었다. 고야가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사라고사에 살던 부모가 경제적 이유로 잠시 동안 이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난 주변 환경은 18세기 스페인의 대부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화려한 궁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영주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메마르고 황량한 땅 이런 곳에서는 자연에 대한 관찰도, 시적인 감흥도 불가능했다. 이웃간의 접촉이 유일한 체험이었고, 이러한 접촉은 인간조건에 대한 인식을 눈뜨게 했다. 화가로서 고야가 겪었던 우여곡절과 다양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작품은 스페인적인 토양에 근거한다. 그는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삶 또한 다분히 스페인 사람으로서의 삶이었다.
펜테토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야는 1748년 가족을 따라 사라고사로 이주했고,1756년 에스콜라피오스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4년 동안 다녔다. 그 후 호세 루산이 마르티네스라는 화가에게서 데생과 유화를 배웠다. 루산은 평범한 화가였고, 그가 유일하게 학생들에게 기여한 것은(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제자들에게 되도록 판화를 많이 모사하도록 하여 다양한 종류의 판화에 익숙해지게 만든 것뿐이었다.
당시 고야는 훗날 그의 생애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두 사람을 만났다. 한 명은 마르틴 사파테르였는데, 고야가 생을 마칠 때까지 이 진실한 친구와 편지를 교환했다(그 덕분에 후세의 전기 작가들은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 또 한 친구는 나이는 좀 많았지만 같이 학교를 다녔던 프란체스코 바예우이다. 훗날 고야의 처남이 되는 바예우는 어느 때는 고야의 보호자이자 동지가 되었고 어느 때는 최악의 적이 되기도 했다. 사파테르와 바예우는 1763년 멩스의 초청으로 마드리드에 갔으나, 그들을 따라간 고야는 그들처럼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었다. 3년 뒤 그는 다시 입학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고야가 어떤 작품을 제출하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카데미가 제시한 주제가 고야의 취향에 그다지 맞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통에서 벗어난 표현을 찾으려는 고야의 본능적인 성향- 아직까지는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찾지 못했지만-이 전통에 사로잡힌 심사위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프란시스코 바예우 초상]Portrait of Francisco Bayeu. c. 1795.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당시 마드리드 미술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복잡하고 혼란한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 궁정은 지아퀸토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과 우아세, 방 루 같은 프랑스 화가들을 뜨겁게 우대했다. 18세기 후반 전통적인 양식과 새로운 양식, 서로 대립하는 두 진영에서 각각의 '위대한 전통을 확립한 두 명의 화가가 나타났다. 1761년에 멩스가, 1762년에 티에폴로가 스페인을 찾아왔던 것이다. 바로크 양식의 계승자와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는 서로 자웅을 겨루었으며 많은 화가와 미술 애호가들이 취향에 따라 그들의 추종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고야는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1771년 고야는 파르마에 있는 아카데미아 디 벨레 아르티의 입학심사에서 2등을 했다. 이 학교의 기록에는 그의 출품작을 호평하는 글이 남아 있다. 그 기록에는 고야가 주제에 좀더 충실하고 색채 사용에 있어 자연색에 좀더 유념했더라면 1등이 되었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글은 아직 무명의 청년 화가에 불과한 고야가 당시에 이미 전통에 맞서는 반항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마르틴 사파테르의 초상]Portrait of Martín Zapater, 1797 Oil on canvas, 83 x 65 cm Museo de Bellas Artes, Bilbao
1773년 고야는 마드리드에 있었고 여기에서 호세파 바예우와 결혼했다. 처남 바예우는 고야를 마드리드 사교계에 소개했다. 고야가 잡은 최초의 행운은, 멩스의 지시로 산타 바르바라에 있는 왕실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태피스트리(벽걸이 융단)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멩스의 지시는 아마 바예우의 건의에 따른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바예우는 당시 젊은 아카데미 화가의 일원이었고 어느 정도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것은 고야가 왕실 주변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제와 기법의 선택에 있어서 상당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치였다. 또한 태피스트리가 지니는 특성상 작품을 세심하게 완성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행운이었다. 스타일이 성숙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능란한 솜씨를 발휘하기는 했지만 아직 천재의 징후를 나타내지는 못했다.

[호세파 바예우] Josefa Bayeu (or Leocadia Weiss) c. 1798 or 1814 Oil on canvas, 81 x 56 cm Museo del Prado, Madrid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는 일은 태피스트리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전원 스타일이나 네덜란드의 나이프 스타일 같은 전통적 양식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관대한 통치자였던 카를로스 3세는 주제를 바꿔보도록 지시했다. 이때부터 태피스트리는 스페인의 생활풍경을 묘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련의 평범한 작품들을 그리는 데 그쳤던 고야는 카를로스 3세 덕분에 그의 적성에 맞는 주제를 찾아내어 이를 마음껏 표현했다. 그리하여 1776~77년경부터는 재료의 자유로운 사용과 작품의 완성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만사나레스 강둑의 피크닉],[만사나레스 강변의 춤], [양산], [마드리드의 장날], [도자기를 파는 여인]과 그 밖의 여러 태피스트리 밑그림에서 스페인 생활의 정수를 직접 재현한 고야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인생과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만사나레스 강둑의 피크닉] Picnic on the Banks of the Manzanares, 1776,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만사나레스 강변의 춤] Dance of the Majos at the Banks of Manzanares, 1777 Oil on canvas, 272 x 295 cm Museo del Prado, Madrid
[양산] The Parasol, 1777,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도자기파는 여인들] The Pottery Vendor, 1779,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산체스 칸톤은 고야에 대한 우아세의 영향을 강조한 바 있었다. 그는 고야가 우아세의 풍속화와 종교화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지적했다. 고야는 우아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자연스러움을 높이 평가했다. 이때부터 고야는 성공을 거듭하여 궁정과 일반 대중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이 아카데미의 속박에 굴복할 수 없음도 분명히 깨달았고 자신의 위치와 미래에 대한 생각도 정립했다. 멩스가 죽은 이후(그의 명성과 엄격함은 고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고야는 아카데미의 진부함에 도전하는 고독한 위치를 굳혔다. 이러한 도전은 고야 자신으로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윽고 나온 일련의 밑그림들은 그 스타일과 주제 해석에 있어서 날로 성숙함을 더해갔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고야가 대중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작품에 구사된 근대적 기법보다는 표현된 주제 때문이었다. 1780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카데미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이 작품은 아카데미의 감상적 취향과 꼼꼼하고 정확하게 묘사된 형상의 기호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화가로서 고야의 성격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열쇠가 된다. 한편 고야는 성격이 강하지 못했고 실패와 빈곤의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결에서 항상 타협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자비심이 많았고 이를 자연스럽게 회화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컨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을 보라) 예술미적 타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도덕적 감성의 표현이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직선적이고 진지했다. 인간의 손과 마음이 의지를 이겨내는 일은 흔히 있다. 따라서 현대회화에 대해서 무지한 이들도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어째든 고야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작품이 지니는 회화적 가치에 매혹되어 그의 작품들이 사실 얼마나 큰 논쟁의 소지를 품고 있는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궁정에 들어간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1777-78년에 벨라스케스의 작품 몇 점을 동판화로 만들어 사파테르에게 보냈다.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작품과 사실주의에 크게 고무되어 그때까지 고수하던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확신을 다지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성모]
고야는 1780년 10월에서 1781년 6월 사이에 사라고사 소재 엘 필라르 대성당의 천장화 [순교자들의 성모]의 스케치를 부탁받았다. 그러나 고야는 그의 처남이자 이 작업의 공식적인 책임자였던 프란시스코 바예우와 근본적인 개념에서부터 마찰을 빚었다. 고야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스케치를 부분적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그렇지만 작업이 진행되어 가자 자신의 의견을 완강히 고집했다. 천장화는 당시의 전통대로 장엄하게 장식할 계획이었으나 고야는 풍부한 표정이 드러나는 형상들과 시원스러운 구도, 부분에 대한 섬세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지닌 생각들은 멩스의 미학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고 이것은 바예우에게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철칙이었다. 고야는 공식적인 견해와 늘 대립했는데 그 이유는 항상 똑같았다. 그는 작품의 구도, 주제, 목적을 당시의 취향에 따라서 설정하려 했지만 자신의 성향을 숨기지 못했다. 결과는 매번 달랐고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대성당을 위해 1784년에 완성한 ·[아라곤의 알폰소 4세에게 설교하는 성 베르나르디오]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아라곤의 알폰소 4세에게 설교하는 성 베르나르디오]
고야의 인기는 갑작스럽게 높아졌다. 고야는 초상화 작업을 기꺼이 맡아 초상화를 그리면서 점점 더 큰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당시의 초상화 작품으로는 1774년 [돈 페드로 알칸타라 데 수이고의 초상], 1781년 [코르넬리우스 반 데르 고텐의 초상], 1783년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이 있다 고야의 초상화 제작은 왕족, 특히 어린 돈 루이스의 초상화를 그리고 난 후 더욱 활발해졌다. 초상화 제작은 종교화의 경우와 동일한 스타일상의 선택을 하지만, 화가에게 심리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을 보다 넓게 제공한다.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 The Count of Floridablanca, 1783, oil on canvas, Banco Urquijo at Madrid.
 [마리아 테레사(친톤 백작 부인)]Maria Teresa de Borbón y Vallabriga. 1783. Oil on canvas, 132.3 x 116.7 cm.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이 시기에 그가 사파테르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우울한 마음과 평온한 심정이 엇갈리고 있다. 또한 이 편지들은 고야가 그의 미적관념들을 굳혀갔던 길고 어려운 과정을 증언해 준다. 성공은 거듭해서 그를 찾아왔다.
 [오수나 공작과 가족]The Duke and Duchess of Osuna and their Children 1789,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1785년 고야는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 미술부의 2인자로 선출되었고 1786년에는 공인 왕실 화가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메디나셀리, 오수나(초상화 몇 점, 발렌시아 성당 부속 가족예배당을 위해 성 프란시스 보르하의 생애를 그린 작품 두 점, 그리고 알라메다를 위해그린 일곱 점) 등과 같은 스페인 최고 명문 집안과 산 카를로스 은행에서 제작을 의뢰받았다. 또한 1786년부터 그는 다시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것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주제는 광범위했고, 그 표현도 지독히 감상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흔들리도록 사실적인 것도 있는 등 다양했다. 그러나 어떤 작품도 전통적인 회화의 범주에 넣기가 곤란한 것들이었고 새로운 장르에 속했다. 때로는 사회 풍자가 깃들이기도 했던 고야의 주제 표현은 전혀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예로는 [다친 석공]과 당시의 풍속도 [산 이시드로 평원]이 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이 밖에도 종교화, 초상화들이 있다. 예컨대 바야돌리드의 산타아나를 위한 유화 세 점,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발렌시아 성당의성 프란시스 보르하의 생애화, 그리고 마누엘 오소리고 데 수니가의 어린시절 초상화 같은 여러 점의 뛰어난 초상화들이다.
 [다친 석공]The Injured Mason. 1786-87.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산 이시드로 평원] The Medow of San Isidro on the Feast Day. 1788.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마누엘 오소리고 데 수니가의 어린시절 초상화]Don Manuel Osorio Manrique de Zuñiga, 1788, oil on canvas,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788년 고야는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아카데미의 미술책임자로 선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해 카를로스 4세가 왕위에 오르자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궁정 화가라는 직책은 공식적인 초상화가 고야의 위상을 확고히 했지만, 궁정에서 작업한다는 사실 자체와 아첨을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에서 인정받도록 처신하는 문제가 큰 자극이 되었다. 당시 그가 쓴 글 중에는 '자제를 배우고 사람이면 누구나 유지해야 하는 존엄성을 보존하면서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또한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인격에 필수적이라고 밝히는 내용이 있다. 그는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위한 작품 제작도 계속했지만 예전보다는 여유를 가지며 그림을 그렸다. 당시의 작품으로는 1786년의 [여름], 1789년의 [까막잡기], 1791년의 [지푸라기 인형]이 있다.
 [폰테호 후작부인]Marquesa de Pontejos, approx.1786,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여름] Summer. 1786. Oil on canvas, 34 x 76 cm. Fundación Lazaro Galdiano, Madrid, Spain

[마리아 테레사(친촌백작부인)Portait of Maria Teresa de Borbón y Vallabriga, 1783,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마녀들의 집회] Witches' Sabbath 1789, Oil on canvas, 43 x 30 cm Museo Lazzaro Galdiano, Madrid
 [까막잡기] Blind's Man Bluff. 1788. Oil on canvas, 41 x 44 cm.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까막잡기란 술래잡기 놀이의 일종이다. 이 ‘까막잡기’ 작품을 보면, 오른쪽 끝에 있는 여자, 즉 눈가리개를 당한 남자가 주걱으로 가리키자 몸을 한껏 뒤로 젖히고 있는 여자에게서 알바 공작부인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만든 고리 안에서 헝겊으로 눈가리개를 당한 술래는 바로 고야 자신이다. 눈가리개를 당하긴 했지만, 이마의 모습과 입, 딱 바라진 상체, 솟아오른 어깨 근육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게 고야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왕가를 빼고는 에스파냐 제일의 명문인 알바 공작 가문의 여주인이라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에게 주걱을 들이댄 것은 너무나 노골적이다. 게다가 이 밑그림을 토대로 짠 태피스트리가 걸릴 벽면은 마드리드 교외의 파르도 궁전에 있는 왕자의 신혼방이다. 그렇다면 고야는 조심했어야 했다. 알바 공작부인은 특히 왕세자비인 마리아 루이사의 라이벌로서 왕실의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감히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과시가 아니 었을까
[지푸라기 인형] The Straw Manikin 1791-92, Oil on canvas, 267 x 160 cm Museo del Prado, Madrid
1791년 고야는 산타 바르바라 공장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태피스트리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고, 따라서 같은 주제들을 회화로 그렸다(그는 그 전에도 모조품에서 이를 시도한 바 있었다), 투우장을 주제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1786년부터 고야와 알바 공작 가족 간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고, 고야는 여러 차례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고야와 알바 공작 부인 사이에 깊은 우정이 맺어진 것은 훗날, 그러니까 1795년에서 1797년 사이의 일이었다. 고야는 발렌시아에 일시 체류 중에 산 카를로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후 사라고사에 가서 마르틴 사파테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1792년에는 안달루시아와 카디스를 여행하며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의 초상화와 성정 수도회를 위한 세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 Sebastián Martínez, 1792 Oil on canvas, 93 x 68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그는 카디스의 마르티네스 곁에 머무는 동안 질병에 걸려 청력을 잃었다. 이 고난은 그의 생애와 회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블랑코 이 솔레르 박사는 마르티네스가 사파테르와 아라스코트에게 보낸 편지 및 고야 자신의 편지들로 미루어 보아 고야의 질병은 내이 신경마비 증상이라고 주장했다. 병명이 무엇이든 간에 고야는 끝내 완쾌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그린 그림에는 재료 사용과 표현에 새로운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는 완전한 변신을 이룬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어쨌든 크게 성숙한 것 같았다. 고야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서의 곤란과 육체적 불편함으로 자신의 내면세계에 더욱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일반인에게는 으레 따르기 마련인 매개물이나 보호물이 없는 상태에서 실재와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야는 이전에도 실재의 가장 넓고 다양한 의미를 추출해 내기 위한 실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세부적인 사실이 무자비하게 묘사된 그의 그림에는 충만한 힘,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풍자적인 강렬한 힘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병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고야는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아카데미를 위해 11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 11점의 작품에 속하는 것이 어떤 작품들인지는 현재 분명하게 알 수 없는데, 이는 작품의 스타일만을 근거로 해서 제작 연도를 추정하는 일이 극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1794년 고야는 베르나르도 데 이리아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병에 대한 생각으로 굳어버린 나는 무언가에 몰두하기 위해, 또 와병 중에 지게 된 무거운 빚을 갚기 위해 거실용 연작들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주문 제작된 작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상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문제작돈 작품에는 변덕과 창의력이 충분히 표현될 수 없지만 제 작풍에는 변덕과 창의력이 가득합니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보통 [여인에게 덤벼드는 산적], [난파], [화재]를 꼽는데, 모두 크기가 매우 작은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인정되는 작품에는 이 밖에도 폭력과 천민의 생활을 다룬 작품 여러 점과 [악마의 램프], [마력], [올빼미의 비상]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 작품은 모두 1798년에 오수나 가족이 사들였는데, 제작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듯하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또 이 시기보다 다소 후에 제작된 작품들로 [고행자의 행렬], [투우장], [종교 재판소], [정어리 매장], [정신병자 수용소]를 꼽고 있다.
 [화재] Fire at Night, 1793-94 Oil on tinplate, 50 x 32 cm Banco Inversion-Agepasa, Madrid
 [고행자 행렬]A Procession of Flagellants, 1812-14 Oil on panel, 46 x 73 cm Museo de la Real Academia de San Fernando, Madrid
 [정어리 매장] The Burial of the Sardine, 1812-14 Oil on panel, 82,5 x 59 cm Museo de la Real Academia de San Fernando, Madrid
 [종교재판소] The Inquisition Tribunal, 1812-19 Oil on panel, 46 x 73 cm Museo de la Real Academia de San Fernando, Madrid
 [정신병자 수용소]The Madhouse, 1812-14 Oil on panel, 45 x 72 cm Museo de la Real Academia de San Fernando, Madrid
산체스 칸톤 같은 구세대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들을 고야가 회복 이후 그린 최초의 작품 군으로 분류한 바 있다. 어쨌든 문헌적인 자료의 결핍과 고야의 작품들을 스타일에 의해 분명하게 시대 구분하는 작업의 어려움 때문에 이상의 작품들의 제작 연도를 추정하는 일은 매우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800년 이후의 자료는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고, 이 자료들에는 위의 작품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1800년 이전에 제작된 것은 분명하다. 고야는 초상화 제작을 꾸준히 의뢰받았다. 1793년에 카베다의 초상화를 완성했고, 1794년에는 여배우 라 티라나, 리카르도스 장군, 라몬 포사다 이 소토 및 여러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1795년에도 비야프랑카 후작 부인, 그의 처남 바예우 (바예우는 이해에 사망하여 아카데미 미술부장 자리가 고야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알바 공작과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알바 공작부인은 고야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부인과 고야가 서로 열정을 나누는 관계였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두 사람 사이에 매우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1798년에 제작한 산 안토니오데 라 플로리다 왕실 예배당의 프레스코 벽화와 1799년에 출간한 『카프리초스]를 들 수 있는데, 이 두 종류의 작품은 각각 다른 측면이기는 하지만 고아의 성격이 지닌 전형적인 면모를 반영하고 있다.

[알바공작 부인] The Duchess of Alba,1795 Oil on canvas, 194 x 130 cm Collection of the Duchess of Alba, Madrid
 [알바공작 부인]Portrait of the Dutchess of Alba 1797. Oil on canvas. The Hispanic Society of America, New York, NY, USA
고야는 드디어 수석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고, 왕족 및 궁정을 출입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탁월한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1799년 작품 [카를로스 4세의 초상], 그리고 자유주의자 [마리아노 루이스 데 우르키호의 초상] 등이 있다. 1800년에는 가장 유명한 집단초상화 중 하나인 [카를로스 4세가족]이 아란후에스에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평민의 눈으로 본 스페인 왕정과 국가의 비전을 담고 있다. 고야는 1800년대 초반 주로 공식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고야의 임무는 모델이 된 사람들을 이상화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벨라스케스처럼 그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기에도 그는 민중의 생활상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이 작품들은 보다 진실된 표현을 담고 있었다.

[카를로스 4세와 가족] Charles IV and his Family, c. 1800 Oil on canvas, 280 x 336 cm Museo del Prado, Madrid
1806~07 년경에는 여섯 점의 소품으로 이루어진 연작 [산적 엘 마리가토의 체포]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그 행동과 역사적 감동의 생생함으로 새로운 작품세계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미술작품이 지니는 기능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고야의 외로운 모습을 통해 격동하는 유럽에 예고되었다. 이것은 쿠르베와 도미에의 사실주의보다 거의 1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고야의 작품은 거의 무시되거나 오해받았다. 정치적 폭풍우가 휘몰아침에 따라-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점령과 민중의 저항, 군주들의 부침, 자유주의자들의 높아가는 목소리-고야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본능과 천성의 솔직함이 궁정 화가가 취해야 할 조심스러운 태도보다 두드러졌다. 하지만 이 당시 고야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가 항상 자신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궁정과 아카데미에 대한 의무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날이 갈수록 현실 비판적이며 고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밀접하게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주요한 사건들을 묘사했을 뿐 아니라 그가 제작한 작품들의 사건 자체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작품의 질적인 완성도를 엿볼 수 있다.
1808년 나폴레옹군의 침공 위협이 높아갔다. 프랑스에 의한 해방에 희망을 걸고 있던 스페인 국민들은 아란후에스에서 봉기하여 카를로스 4세를 페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7세를 새로 옹립했다. 무능한 페르디난도 7세는 마드리드를 포기했고 위라(나폴레옹의 동생)의 군대는 저항 하나 없이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은 프랑스에 대해 무력 봉기해 아랍계 용병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복은 무자비했고 5월 3일 새벽까지 처형이 계속되었다. 스페인은 그 후 4년 동안 조제프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형)의 지배에 대항해 계속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고야의 친구들 가운데에는 친프랑스적인 지식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혁명과 헌법을 찬양했었다. 어쨌든 고야는 궁정 화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지켰고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솔직한 표현으로 페르디난도 7세가 말에 올라탄 모습의초상화를 그렸다. 또 하나의 쓸모 없는 전제군주를 공식적으로 신성화한 이 초상화는 이제는 구시대의 인물이 된 그들의 위치를 증명하는 기념비였다. 얼마 후 그는 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제작했다. 이 판화집에서의 주제와 표현은 철저히 그 시대의 첨단 움직임과 궤를 같이한다. 고야는 에칭 기법을 사용해 폭력과 야만성이 초래한 고통의 주제를 자신감 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에칭 작품들의 제작 연도는 분명치 않아 혹자는 이 작품들이 1808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카르데레라 같은 사람들은1820년에야 이 작품들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1808년 가을, 고야는 사라고사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고 기록했다. 프랑스군은 팔라폭스 장군의 저택에 보관되었던 그의 작품들을 찾아내 이를 모두 파괴했다. 마드리드로 돌아온 그는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궁정 화가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초상화 제작에 열중했다. 그에게 프랑스로 보낼 스페인의 그림 50점을 선택하라는 임무가 억지로 맡겨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비호를 받는 어용화가를 영입하기 위해 아카데미가 특별히 마련한 모임에 참석해야 했고 훈장을 받기도 했다.
1812년에서 1814년까지의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고야에게 일어났던 몇 가지 일은 알려져 있으며, 이 밖에도 수는 적지만 분명한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그의 행적을 부분적으로나마 재구성할 수는 있다.
1812년 고야의 아내 호세파 바예우가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고야는 자신의 재산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간단한 설명이 붙은 고야의 작품 73점과 그가 숭배했던 화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목록은 귀중한 정보의 원천이 되었다. 이 목록덕분에 1812년은 이 목록에 포함된 작품들의 제작 연도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최종시한이 될 수 있었다. 목록에 기재된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그것이 어떤 작품을 지칭하는지 판단하기 곤란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스타일상의 변화를 감안하면 작품의 제작연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1812년경 이후에 제작된 작품을 가려보면, [물장수]. [술마시는 두 사람], [칼 가는 사람], [거인], [바위 위의 도시], [열기구], 동료를 사살하는 군인들]과 젊은 여인을 주제로 한 몇점의 그림, 그리고 현재 릴에 보관되어있는 [걷는 여인들], [노파들]을 들 수 있다.

[칼가는 사람] Knife Grinder, 1808-12 Oil on canvas, 68 x 50,5 cm Museum of Fine Arts, Budapest
1814년에 제작된 두 점의 작품[5월 2일]과 [5월 3일]은 근대 회화사에 있어서 이정표적인 작품이다. 고야는 스페인 국민의 저항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의 제작을 정식으로 위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하는 전통적 표현, 또한 아카데미화가들이 이런 류의 소재를 다루었던 상투적이고 거창한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고야의 이 두작품은 그 이전 또는 이후에 제작된 어느 화가의 작품보다도 이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표현하였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시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 광장] The Second of May, 1808 at the Puerta del Sol. 1814. Oil on canvas. 266 x 345 cm.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시민저항군의 학살]
The Third of May, 1808: 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
1814. Oil on canvas, 266 x 345 cm.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페르디난도 7세가 다시 돌아오자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박해가 뒤따랐다. 고야는 왕과 귀족들의 초상화 그리는 일을 계속했지만 그도 박해의 위협을 느꼈다. 고야는 오랫동안 종교적 주제를 멀리했고 종교화는 간헐적으로 그렸을 뿐이다. 그러나 1812년 그는 친촌 교구교회를 위해 [성모의 승천]을 그렸고 그 이듬해부터는 종교화에 대한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1819년에는 [호세 데 칼라신스 성인, 최후의 만찬]과 [감란산의 기도]를 제작했다. 이 두 작품은 그 스타일과 기법의 자유로움으로 현대 미술의 문턱까지 다다른 느낌을 준다. 고야의 그림의 현대성은 소묘와 에칭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의 능력에 기인한다. [카프리초스]와 [전쟁의 참화]는 자유로운 구성과 표현이 결합된 독창적인 작품집이다. [타우로마키아]와 [잠언]으로 알려진 일련의 작품들(모두 1819년이후에 제작되었다)은 독창적이며 뛰어난 구성을 보여준다. 1819년 고야는 만사나레스 강변에 있는 시골집을 한 채 구입해서 스스로 ‘귀먹어리의 집’이라고 불렀다.(마르게스 델 살티요의 연구에 따르면 이 집은 고야가 사기 전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고야는 1820~22년경 또 한 차례의 혹독한 투병생활을 치르면서 이 집을 그의 작품으로 채우는 데 시간을 쏟았고 그 결과 '검은 그림' 이 탄생했다. 이 작품들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고야의 열정이 극에 달했을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고야의 주제는 신속하고 의욕에 충만한 붓의 움직임에 따라 단순화되었고, 거대한 규모로 재현되었다. 고야의 시각 속에는 괴물들과 일상적 사물들이 서로 엉켜 있다. 이 거대한 시각에 대한 고야의 속기적 해석을 나타내는 하나하나의 붓자국은 인간적이고 친숙한 차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의식의 강렬함은 한눈에 드러난다.
'귀머거리의 집' 벽을 장식했던 거대한 작품들은 열네 점에 이르는데, 고야는 회반죽을 바른 벽에 직접 유화를 그렸다. 고야에 의해 명명되지 않은 채 남겨진 이 작품들은 오늘날 모두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당시에 이 작품들은 '귀머거리의집' 1층의 거실을 장식했다. 문 옆에는 [레오카디아]가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늙은 신부의 귀에 고함을 지르는 악마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었다. 이 그림의 양쪽에는· [산 이드로의 순례]와 [마녀들의 연회]가 있었다. 이층 서재에는[개], [수프를 먹는 두 노파]와 [책을 읽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양쪽에는[운명], [결투], [산 이시드로 샘으로]와 [아스모데우스]가 있었다.
이 그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뒤에 '귀머거리의 집'을 사들인 델랑헤르 남작은 이 작품들을 잘 보존했다. 그는 1873년에 이 작품들을 벽에서 떼어내 액자에 넣었다. 이 작품들은 1878년에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전시되었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프라도 미술관이 이 작품들을 사들인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고야는 변함없이 누리고 있던 공식적 위치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날이 갈수록 더욱 난처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옷을 입은 마하]와 [벌거 벗은 마하] 때문에 종교재판에까지 회부되었다 스페인왕정 복고와 이에 뒤따른 박해의 물결 가운데 고야는 그의 집이 압수될까 두려워 1823년에 '귀머거리의 집'을 손자 마리아노에게 상속했다. 다음해 그는 호세 두아소이 라트레의 집에 피신했고, 그 뒤 플롱비에르에서 온천치료를 받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겠다고 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사실상 망명길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곧장 보르도에 망명해 있던 옛 친구 모라틴을 찾아가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 후 그는 호아킨 마리아 페레르와 그의 아내를 데리고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옷벗은 마하]The Nude Maja (La Maja Desnuda), 1799-1800
Oil on canvas, 97 x 190 cm Museo del Prado, Madrid

[옷입은 마하]The Clothed Maja (La Maja Vestida), 1800-03
Oil on canvas, 97 x 190 cm Museo del Prado, Madrid
그는 다시 보르도로 돌아와 만년의 충실한 동반자였던 레오카디아 웨이스 곁에서 영원히 지내겠다고 결심했다. 스페인 궁정은 고야의 프랑스 체류 연장을 허가했다. 새로운 삶 속에서 고야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고 싶었고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제작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모라틴]을 그렸고 상아에 세밀화를 그리는 일에도 손을 댔다. 1826년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공식적인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나서 1827년 여름에 다시 보르도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그는 손자 [마리아노 고야]의 초상화와 종교화 몇 점, 그리고 유명한 [보르도의 우유 파는 아가씨]를 그렸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에 근접한 그의 만년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시인 모라틴의 초상] Portrait of the Poet Moratín, 1824 Oil on canvas, 60 x 49,5 cm Museo de Bellas Artes, Bilbao
 [마리아노 고야의 초상](고야의 손자) Portrait of Mariano Goya, the Artist's Grandson, 1812-14 Oil on panel, 59 x 47 cm Collection Duque de Albuquerque, Madrid
 [보르도의 우유 파는 아가씨]The Milkmaid of Bordeaux, 1825—27 Oil on canvas, 74 x 68 cm Museo del Prado, Madrid
1828년 고야는 호세 피오 데 몰리나의 초상화에 착수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그해 4월 16일 보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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