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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한뿌미 글쓴이:조의선인
치우천왕과 황제가 탁록대전을 벌이다 중국 학술계는 중화 민족의 대융합을 유행처럼 연구하고 있다.
베이징대학의 교정은 옛 황궁의 일부와 어느 유명한 화가의 정원이 합쳐진 터라 중국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그곳 웨이밍후(未名湖) 호수가 옆 고즈넉한 사합원(四合院) 안에는 중국의 중고역사(中古歷史)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있는데 금년 여름방학은 세계 각 국에서 찾아온 학자들로 몹시 붐볐다. 중고(中古)시대의 중국 한족과 주변민족과의 융합을 연구하는 <중화 민족의 대융합>에 관한 역사학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학회가 끝나고 대회 참석자들은 몽고로 학술탐사를 떠났다. 몽고는 내몽고와 외몽고로 갈라져 내몽고는 이미 중국 안으로 철저히 동화되었고 외몽고와는 민족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지역이다. 몽고 여행으로 분주해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과연 권력과 분리된 순수한 학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베이징 대학에서 90년대 초·중반에 연구할 당시에는 수 년 동안 <중국 전통문화 뿌리 찾기>열풍이 대부분 학술대회의 공통주제였다. 유사한 학술대회가 너무도 많아 당시 어느 중국학자에게 물었더니 전통문화 관련 주제의 학술대회에 관하여 정부에서 학술지원금을 제공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온통 <중화민족의 대 융합>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서북공정이니 동북공정이니 하는 것도 모두 그 일환이고 말이다.
황제의 자손에서 염황(炎黃)의 자손으로 중국의 신화와 역사, 민족상징, 시조신(始祖神)에 관해서도 연구경향이 크게 달라졌기는 마찬가지다. 수차례 강조했듯이 중국의 신화 속에는 용 토템, 수신(水神) 숭배의 황제(黃帝) 화하족(華夏族) 계열과 새 토템, 태양신 숭배의 치우(蚩尤) 동이족(東夷族) 계열의 신화가 공존한다. 중국 학술계에서 90년대 이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신화학자 위안커(袁珂)와 미학자 리자이허우(李澤厚)는 이 두 계열의 전혀 다른 신화체계가 상호 투쟁을 거쳐 용 토템의 화하족이 승리하고 봉황 토템의 동이족 신화가 흩어진 것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경향은 과거에 오랑캐로 몰아세웠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로 설정하여 중화민족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봉건중국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라고 비판하면서 신중국의 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대문호 루쉰(魯迅)이 “헌원을 위해 피를 쏟으리라”고 했을 때 헌원(軒轅)은 황제(黃帝)의 이름이자 그들 한족의 유일무이한 시조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시조신으로서 황제는 물론 염제(炎帝)를 추앙하여 염황(炎黃)의 자손이라 하고, 심지어는 황제의 오랜 적으로서 극악무도함의 대명사로 미움을 받았던 치우(蚩尤)마저 중화삼조(中華三祖)로 받들어 모심으로써 너무나 놀라운 포용력을 혹은 너무나 치밀한 계산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문화의 원류를 용토템 계열과 봉황토템 계열로 설명하는 중국학자 왕다여우(王大有)의 『용봉문화원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적이다. 그것은 10여 년에 걸쳐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봉황-태양숭배 문화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동이(東夷)족, 묘만(苗蠻)족, 아메리카 인디언간의 뿌리적 친연성을 캐어내는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 즉 황하 하류 산동성, 하북성, 동부 연해안 지역의 동이족 계열과 양자강 중하류, 운남성, 귀주성 일대의 묘만족 계열은 봉황-태양숭배 민족으로서 상호 친척관계이며, 이들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착륙함으로써 마야 문명의 원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가설은 중국 중앙텔레비젼의 지원을 받아 10부작 다큐멘터리 <중국용(中國龍)>을 찍게 되었는데 다큐멘터리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이족 문화를 철저히 중국 것으로 소화해 냄으로써 다시 중화민족의 위대성을 반증하는 자료로 사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용 토템 계열의 화하족과 봉황 토템 계열의 동이족을 상호 배타적인 전혀 다른 두 문화계열로 파악하면서도 동시에 양자를 모두 중국인이자 중국 문화의 일부인 것으로 아울러서 동이족은 중국인이므로 동이문화의 확장은 곧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는 물론 아메리카까지도 영향력을 뻗친 중국문화의 위대성을 보여준다는 식의 논법을 전개하고 있다. 근자에 고구려사 문제로 우리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더욱 분명해진 사실이지만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속한 모든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중국 것이라는 중국적 문화제국주의는 역사시대는 물론 신화시대에 까지도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태양의 신 염제와 우뢰의 신 황제가 대적하다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여씨춘추(呂氏春秋)』「탕병편(蕩兵篇)」, 『회남자(淮南子)』「병략편(兵略篇)」, 『열자(列子)』「황제편(黃帝篇)」, 『태평어람(太平御覽)』권79 인용『용어하도(龍魚河圖)』등의 자료를 재구성한 위안커(袁珂)의 『중국신화전설』「황제·염제편」을 빌어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탁록대전(𣵠鹿大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태양의 신 염제(炎帝)는 자애로운 신이었다. 당시 붉은 새 한 마리가 입에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벼의 모를 물고 날아와 염제가 이를 밭에 뿌리니 오곡이 자랐다고 하여 그들 농업의 신인 신농(神農)이라고도 부르고 또 여러 약초의 성질을 알아내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해서 의약의 신이라고도 불렀다.
염제 조금 뒤에 뇌우(雷雨)의 신 황제(黃帝)가 나타났다. 그는 중앙의 신으로서 얼굴이 네 개라 동서남북 사방을 동시에 살폈다고 하며 태양의 신 염제(炎帝)와 끊임없이 크고 작은 패권싸움을 벌였다. 『여씨춘추』에 의하면 황제와 염제는 물과 불의 관계처럼 매사에 대립적이었다고 하며, 어느 날 마침내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대전투를 벌였는데 염제가 대패하여 남방의 구석진 곳으로 쫓겨 가고 천하는 황제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치우가 염제의 복수를 하고 천하를 제패하기 위하여 황제와 탁록대전을 벌이다 치우(蚩尤)는 용맹스러운 거인족의 명칭으로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나 쇳덩이, 돌맹이 등을 먹었으며 창, 칼, 활, 방패, 쇠뇌의 다섯 가지 병기를 발명한 뛰어난 군신(軍神)이었다. 황제가 서태산에서 천하의 신들을 불러 모아 배알을 받았는데 염제의 자손으로 염제의 복수를 늘 품고 있던 치우도 그 자리에 있었다. 치우는 황제의 실력이 소문만 못하다고 판단하고 81명(혹은 72명)의 형제들을 불러 모아 복수전을 계획하였다. 치우의 형제들도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한 전쟁의 고수들이었다. 이에 치우와 황제가 탁록(涿鹿)에서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되는데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 의하면 탁록과 판천은 불과 오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지역으로 황제와 염제가 싸웠던 바로 그 자리에서 치우가 다시 황제를 공격한 것이다.
묘족(苗族)이 치우를 도와 출전하다 당시 치우의 군대로는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80명의 형제들과 남방의 수풀가에 사는 도깨비들과 남방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묘족(苗族)과 요괴들이었으며 황제의 군대로는 사방의 귀신들과 곰, 비휴, 호랑이 등의 맹수들과 몇몇 인간 부족들이었다. 치우와 황제의 전쟁은 연일 치우의 승리로 끝났다. 치우와 형제들은 워낙 용감했을 뿐더러 각종 무기를 사용하였고 더욱이 치우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거느려서 비바람을 몰고 다니고 안개를 피웠으므로 황제 군대를 꼼짝 못하게 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제 군대가 나침반을 발명한 것은 치우의 안개공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였다고 하고 또 치우 군대가 용의 소리를 무서워하여 황제군대가 뿔 나팔을 불어 용의 소리를 흉내냄으로써 겨우 작은 승리나마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황제는 큰 비를 내기게 할 수 있다는 응룡(應龍), 몸속에 거대한 불덩어리를 안고 살며 가는 곳 마다 한발(旱魃)을 일으키는 자신의 딸 발(魃)의 도움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현녀(玄女)부인으로부터 병법을 전수받아 진을 새로 짜고 곤오산의 붉은 구리로 만든 보검(寶劍)을 획득함으로써 전쟁의 판도를 뒤집는다.
치우의 피가 흘러 단풍나무로 변하고 핏빛 연못을 만들다 치우는 탁록(지금의 하북성 탁록현) 지방에서 황제에게 사로잡혔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은 후에도 두려워하여 그의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채워 꼼짝 못하게 하고 머리를 잘랐다고 하며 그 족쇄를 대황(大荒)에 버렸는데 그 핏자국이 후에 단풍나무 숲으로 변하여 치우의 원한을 말해준다는 얘기가 『산해경(山海經)』「대황남경(大荒南經)」에 실려있다.
일설에 의하면 치우가 산서성(山西省) 해현(解縣)에서 잡혔다고 하며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의하면 그 부근에 붉은 빛을 띠는 해지(解池)라는 소금 연못이 있는데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라고 한다. 또한 황제는 치우가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할까봐 머리와 몸뚱이를 분리하여 산동성(山東省)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鉅野縣)에 각각 묻었으며 고대에 그 지방 사람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치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극악무도함의 대명사로 폄하된 치우 역사는 승리?愍? 편이라는 ?뼈? 무색하지 않게 황제를 위협하여 죽음에 몰았던 치우는 역사상 극악무도함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상서(尙書)』「주서(周書)」「여형편(呂刑篇)」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모두 치우를 제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킨 인물로 잔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싸우기를 잘하고 성을 잘 내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반면 황제는 “천지사시(天地四時)의 운행의 법칙에 순응하여 음양의 변화를 예측하였고, 산 자를 양육하고 죽은 자를 장송하는 제도를 연구하고, 국가 존망의 이치를 고찰하였으며, 때에 맞추어 곡식과 초목을 심어 덕화(德化)가 금수와 초목에까지 미쳤으며, 백성을 두루 이롭게 하여” 제후들이 다투어 그를 천자(天子)로 받들어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를 주제로 한 컴퓨터 게임 〈헌원검(軒轅劍)〉 중국에서 유행하는 중문(中文) RPG 컴퓨터게임 중 대표적인 것으로 〈헌원검(軒轅劍)〉 시리즈가 있다. 헌원은 앞에서 보았듯이 황제의 이름이고 헌원검은 황제가 현녀(玄女)의 도움을 얻어 곤오산의 붉은 구리로 만들었다는 보검을 지칭할 것이다. 이 PC 게임에서 황제는 등장하지 않고 여러 명의 주인공들이 헌원검을 차지하여 요괴를 물리쳐나가는 과정이 전개되는데 요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적이 치우(蚩尤)로 묘사되어 있다. 전설상의 묘사처럼 여기에서도 치우는 사람의 얼굴에 머리에는 소뿔을 달고 등에 커다란 날개가 돋아 날아다니는 괴물의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