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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2세 안면(安勉) 선조님 기록 - 목은(牧隱) 선생 시(詩) 둘

작성자안재중|작성시간09.06.15|조회수220 목록 댓글 2

목은시고(牧隱詩藁) 29권

 

安勉同年子魯生。省親于鄕。歸致其父之言於僕。問無恙。因得訊其鄕先生申判事兄弟,權吉夫,金君濟及其尊公之無恙。吟成 一首。/ 동년(同年)인 안면(安勉)의 아들 안노생(安魯生)이 어버이를 뵈러 고향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나에게 자기 부친의 말을 전하였다. 이에 내가 두루 소식을 물어봤더니, 향선생(鄕先生)인 신 판사(申判事) 형제와 권길부(權吉夫)와 김제(金濟) 군 및 그의 존공(尊公) 모두가 무고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광주는 전라도의 승경이 모여 있는 곳 / 全羅勝槪在光州

벌써 백발이 된 나의 생애가 한스러워 / 自恨吾生已白頭

듣자니 의관들의 즐거운 잔치가 많다고 / 聞說衣冠多燕喜

구학의 풍류 얼마나 멋있을까 상상되네 / 想看丘壑最風流

 

산이 이어진 마을에 구름이 또 자리까지 / 山連里巷雲連座

물이 가득한 연못에 달빛이 또 누각까지 / 水滿池塘月滿樓

우리 태수님 세운 정자 더더욱 좋으련만 / 太守置亭應更好

과연 어느 분이 취옹의 놀이를 이을는지 / 不知誰繼醉翁

 

丘壑(구학)

언덕과 골짜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은둔자의 거처를 뜻함.

 

취옹(醉翁)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의 별호이다. 그가 저주 태수(滁州太守)로 좌천되어 나간 뒤에 그곳에 정자를 짓고 노닐면서 지은 〈취옹정기(醉翁亭記)〉가 유명하다.

 

김군제(金君濟) 및 그의 존공(尊公)에서 만약 김군(金君)이라 부르며 이름이 제(濟)라고 한다면, 고려말-조선초 동시대 인물이 한 사람 있어, 일단 그 기록을 여기에 적는다.

김제(金濟)

생몰년 미상.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백암(白巖). 김주(金澍)의 형이다. 고려 조에서 평해지군(平海知郡)으로 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이름을 제해(齊海)라 바꾸었다. 그리고 어느 날 벽에 시 한 수를 써놓고 바다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1798년(정조 22) 9월 7일에 조정에서 충개(忠介)라는 시호를 내렸다.

 

백암(白巖) 김제(金濟)의 충절시(忠節詩)

동해의 저 배야 노중연의 나루터가 어디냐 / 呼船東問 魯運津

오백년 고려조의 한사람 신하로다 / 五白年今一介臣

외로운 나의 영혼 죽지 않고 있다면 / 若使孤魂能不死

붉은 해 따라 단심을 비추고 싶구려 / 願隨紅日 照中垠

 

김주(金澍)

생몰년 미상.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택부(澤夫), 호는 농암(籠巖). 김제(金濟)의 아우이다. 고려(高麗) 충신(忠臣)으로 관직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말년에 중국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편지를 써서 종에게 주어 부인에게 전하게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1798년(정조 22)에 정조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18년 (1369) 기유(己酉) 공민왕 18년 기유방(恭愍王 十八年 己酉榜) [가족사항] [부] 김원로(金元老), [조부] 김우의(金右誼) [증조부] 김신함(金愼緘)

 

김효정(金孝貞,1383∼?)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할아버니가 김제(金濟), 아버지는 자연(自淵)이다. 1402년(태종 2) 동진사(同進事)가 되고,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0년 사헌부감찰이 되고 1420년 우헌납이 되었다. 이듬해 봉숭도감부사판관(封崇都監副使判官)이 되었고, 1427년 우사간에 임명되었다. 왕에게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고, 특히 충청·경상·전라·강원·함길도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차관을 보내어 병선과 군기를 점검하고 불우(不虞)에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곧, 좌사간이 되고 다시 우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왕에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치로써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헤아려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결성현감 유맹하(柳孟河)가 이전(吏典) 출신으로 재행도 없고, 특별한 공도 없이 수령의 직책에 임명된 것이라 하여 다른 직책에 제수할 것을 상소하고, 그뒤로 재행이 없는 자는 수령에 임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양녕대군(讓寧大君)은 광폐하고 태종에게 죄를 얻었는데, 그 자식을 성안에 거주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탄핵하였다. 한편, 승려들의 행동을 단속할 것과 예악문물을 갖출 것, 풍속 중 사월초파일에 연등회를 열고 남녀가 무리를 지어 복을 비는 것은 고려시대의 폐습이라 하여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유교질서의 하나인 명분을 바르게 세워 국가를 다스릴 것과 불효·불충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건의하였다. 집현전부제학을 거쳐, 1432년 호조우참의·이조좌참의를 거쳐, 1434년 예문관제학으로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437년 대사헌이 되고, 1452년(문종 2)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고려사절요》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주로 간관으로 지내면서 청빈한 정치와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노력하였다. 왕의 명을 받아 성리학에 관계된 여러 책들의 발문을 짓고 여러 지방의 이름난 곳에 대해 찬술하였다. 성품이 조용하고 깨끗하며 욕심이 없었으며, 시문에 뛰어나 시〈금성헌상운 金城軒上韻〉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조선문과방목의 [부] 김자연(金自淵), [조부] 김제해(金齊海), [증조부] 김원로(金元老), [외조부] 이문정(李文挺), [처부] 권후(權厚), 진치(秦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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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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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병주 | 작성시간 09.06.16 목은집에 두 편의 시는 우리 죽산안씨의 뿌리를 증명해 주는 아주 중요한 시입니다.
  • 작성자안남열 | 작성시간 09.06.17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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