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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보(乙亥譜,1935) 죽산안씨족보서(竹山安氏族譜序) - 김영한(金甯漢), 안경환(安敬煥)

작성자안재중|작성시간10.03.13|조회수628 목록 댓글 0

을해보(乙亥譜,1935) 죽산안씨족보서(竹山安氏族譜序) - 김영한(金甯漢,1878∼1950), 죽산20세 안경환(安敬煥)

 

1. 김영한(金甯漢,1878∼1950) 공의 서문

 

죽산안씨 족보서 역문 : 을해간(1935)

 

죽산보는 순조 신유(1801)에 초간하였고 철종 을묘(1855)에 재간하였으며 이제 또 삼간에 안옥순 군이 나에게 서문을 청해왔다.

 

대저 족보만든 규제(규범제도)는 이미 구서에 다 기술돼 있으므로 더 첨가할 것이 없으니 그 가문의 이어져옴을 밝힘이 옳지 않을까 한다.

 

살피건데 안씨는 순흥계통으로서 문성공 회헌선생을 상조(웃 선조)로 하고 선생증손 원형이 공으로 죽성군에 봉(공신에 대한 식읍의 은전)해져 죽산으로 관향이 옮겨지면서 비롯된 것이다. 여조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문족이 대대로 위령(위엄있는 신령)을 빛냈고 명망(이름 높은 이)과 덕업(덕 높은 업적)이 전해오며 벼슬이 이어져서 대동(한국)의 빛나는 가문이 되었다. 문강공 은봉선생에 이르러서는 도학(도덕을 추구하는 학문)과 절의(굳은 지조)가 높아 그 당시에 두드러졌고 후대에 태산(오악의 일)과 북두(북두칠성)와 같이 추앙받았으니 아! 성대하도다. 내가 사람들의 가문 이어옴을 보니 범인(보통사람)의 후손되기는 쉬우나 명현(이름 높은 어진이)의 후손되기는 어려운데 이를 산수에 비유(비교 설명)할 수 있다. 명현은 높이가 숭화(높은 숭산과 화산)같고 그 크기는 강하(큰물 양자강과 황하)같으나 범인은 고작 배루(작은 언덕)나 제잠(우마발자국에 고인 물)일 뿐이다. 배루는 숭화와 더불어 나란히 견줄 수 없으며 제잠은 강하와 더불어 같이 흐를 수 없으니 명현의 후손되기가 어렵지 아니한가. 배루나 제잠으로서는 기껏 배루나 제잠일 따름이니 이것이 범인은 범인으로 이어진다는 까닭이요 내가 쉽게 여기는 까닭도 이것이다. 이러므로 범인의 후손된 자에게 비록 작은 선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서로 칭송하나 명현의 후손된 자는 작은 하루(흠)라도 있으면 자신과 벗까지 초책(꾸짖음)하니 인정을 일으킴에 어찌 저에게는 후하고 이에게는 박한가. 그 이유는 사세(일되어 가는 형세)가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현을 조상으로 둔 자는 마땅히 계승하여 조술(선현이나 조상의 덕업을 기술하여 밝힘)할 길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다만 그 선훈(선대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 가학(가문의 전해온 학문)을 이어서 그 전형(모범과 본)을 떨어뜨리지 아니함에 있을 따름이다. 만약 조부는 원개(선인팔원팔개)가 되고 손자는 공두(요시의 악인공공과 환두)가 되거나 아비는 영건(안연과 민자건)이 되고 자식은 척교(대도 도척과 장교)가 된다면 어찌 세류(세속의 동류)라 하리오. 아! 문성공이야말로 여말의 뛰어난 분으로서 불도를 배척하고 유학을 일으켜 백세의 유종(유학의 으뜸자리)이 되었고 또 문강공은 건로(건주발신청의 정병호란)가 빙릉(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림)할 즈음을 당하여 춘추필법(대의명분을 밝히는 논법)과 존양(왕도를 높이고 호를 물리침)의 의를 지켜 밝고 빛남이 하늘에 걸린 해와 별과 같으나 이제 세태의 운세(사물의 되어가는 형세)가 양구(음사양오의 구재)에 가깝고 어두컴컴함이 날로 심하여 사특(간사하고 악함)한 논설이 시끄럽게 일어 성현의 글이 토자(흙과 두엄)에 묻혀가고 짐승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의관(의관한 군자)이 분양(똥과 흙)에 빠져드니 양현(문성공과 문강공)이 계셨던 세상에 비하면(퇴폐됨이) 십백배 아니 천만배 뿐만 아니리라 만약 양현이 이런 때에 있었다면 어떻게 처세하였을까 그야 반드시 죽음으로써 도를 지키고 현재의 위치에서 실행함으로써 하늘이 내린 참뜻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선성(옛날의 성인)으로부터 전해온 도를 잃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이해와 화복으로 의지가 꺾일 것인가. 무릇 그 후손들은 양현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고 양현의 학문을 자기의 학문으로 삼아 널리 양현의 정신을 밝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양현에게 믿을만한 후손이 있다고 칭송케 한다면 양현에게 광영이 되고 바야흐로 그 가문을 세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족보를 만들 때 종파와 지파를 분별하고 소목(신주모시는 차례)을 상고하는데 그친다면 이는 오히려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니 어찌 힘쓰지 않으리오 시경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너의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 또 너의 조상을 잊지 말라 오직 그 덕을 닦으라]고 하였다. 나는 이 족보에 동참하는 자를 위해 이 시구절을 들려 주노라.

을해(1935년) 6월 안동 김영한 서하다.

 

김영한(金甯漢, 1878∼1950)

조선 말기 문신. 자는 기오(箕五)이고, 호는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공암리(孔巖里)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5세손으로, 고조부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간근(金澗根), 증조부는 순조의 3녀 복온공주(福溫公主)와 혼인하여 창녕위(昌寧尉)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김병주(金炳疇), 조부는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 증 참정(贈參政) 김도균(金道均)이다. 아버지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錫鎭)이고, 생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김홍진(金鴻鎭)이다. 외조부는 해평(海平) 윤치보(尹致輔)이고, 처부는 좌부승지(左副承旨) 반남(潘南) 박가양(朴嘉陽)이다.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게 총명하여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7세에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09위로 합격하였다. 1898년(광무 2)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가지 않아 영릉참봉(寧陵參奉)으로 옮겼다. 효종 승하 180년 작헌례 때 승륙(陞六)으로 승전되어 영릉령(英陵令)에 제수(除授)되었다. 1900년(광무 4)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1년(광무 5) 용인군수(龍仁郡守), 이듬해 양근군수(陽根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며, 1903년(광무 7) 어진을 서경(西京)까지 봉안하였다. 그해 9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除授)되고, 헌종 계비 효정왕후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혼전(魂殿:왕족의 국상(國喪) 이후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기 전까지 3년간 신주와 혼백(魂帛)을 모시는 방)인 효혜전(孝惠殿)의 향관(享官)에 차정되었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나가지 않았다. 묘소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효정공(孝貞公) 김병주와 복온공주(福溫公主) 묘 남쪽이다. 그는 아버지 김석진 이래로 후손들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저서로 문집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2. 죽산안씨20세 안경환(安敬煥) 어른의 서문

 

산안씨 족보서 역문 : 을해간(1935) 

 

대저 족보란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공경하며 친족끼리 돈목(화목)하여 인륜(사람의 도리 오륜)을 밝힘으로써 다음 세대에 징신(믿음)케 함이다. 이러므로 정자(북송 정이)가 말하기를 종족을 거두어 풍속을 순후(순박하고 두터움)히 하려면 모름지기 보계(족속의 세계)를 밝힘에 있다고 하였고, 장자(북송 장재)는 사람이 각기 태어난 곳을 알게 되면 효를 생각하는 마음이 뭉클 일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족보를 만드는 원칙이다.  

 

우리 안씨는 본래 관이 순흥이었으나 회헌선생의 증손에 이르러서 충훈(충의와 공훈)으로 죽성의 봉(유공자 은전의 봉읍)을 받음으로써 자손이 관을 죽산으로 하였다. 대저 봉지(식읍)로 인하여 관을 받음은 옛 법이다.  

 

우리 안씨의 족보는 죽성군을 분파조(파갈림의 시조)로 삼은데서 비롯하였으니 죽성군의 경사(벼슬 등 영광스러운 일)가 쌓이고 인덕(인자스러운 덕)이 거듭하여 하늘로부터 응보(갚음)를 받아 창성한 후로도 덕업(인덕과 공업)과 벼슬과 학문과 충신열사가 연이어 끊이지 않았고 도학(도덕을 추구하는 학문)과 절의(절개와 의리)에 이르러서는 선현(선세의 현인)의 저술이 극진하게 밝혔으니 어찌 감히 덧붙이리오 아! 우리 종문의 수보(족보만든 일)는 지난 을묘(1855)에 있었으니 이젠 85년이 되는 사이에 수보 논의(상의)가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종의(문중 의논)가 일치 못하기도 하고 혹 파보를 만든 집과 못 만든 집이 있어서였던지 오래도록 온 종중의 깊은 한이었다가 다행히 문중운세가 잘 순환(돌고 돌음)되자 종의가 순동(의견이 일치됨)하여 3년만에 준공(일이 끝남)을 고하고 오직 바라건대 보첩을 보는 후손들은 전사(선대에 있었던 일)에 징험(경험의 징거)하여 후대를 계도(깨우쳐 인도함)하고 선대의 유덕을 잘 이어받아 그 뿌리를 잘 북돋아서 그 가지를 발달시키고 그 흐름을 따라서 그 근원에 거슬러 올라 윤리(인륜)를 서로 밝히고 친족의 정의를 서로 길러서 백세토록 길이 일가가 되면 충효지심(충성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뭉클 일어남을 누를 수 없으리라. 힘쓸지어다.  

 

을해(1935) 추 7월 기망(16일)에 죽성군 19세손 경환 삼가 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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