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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安氏) - 위키백과

작성자안재중|작성시간10.03.31|조회수720 목록 댓글 2

http://ko.wikipedia.org/wiki/%EC%95%88_(%EC%84%B1%EC%94%A8)에서옮긴 글입니다.

우리 신죽산안씨 기록은 없네요.

 

(성씨)

 

안씨는 한국 인구순위 18위 64만 명이다.

 

 

순흥 안씨

순흥 안씨의 시조는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보승별장을 지내고, 신호위상호군에 추봉된 안자미(安子美)로, 선조는 전하는 문헌이 없어 미상이다. 순흥 안씨는 안자미의 세 아들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를 파조로 하는 3파로 대별되며, 후손들이 순흥현에 세거하여 관향으로 하였다.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안창호, 안중근,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군인 안두희등이 있다.

 

죽산 안씨

죽산 안씨의 시조는 당나라 왕족 출신 이원(李瑗)이다. 이원은 신라 애장왕 때 건너와 정착하였다. 그에게는 이지춘(李枝春), 이엽춘(李葉春), 이화춘(李花春)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경문왕 때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 성을 하사 받았으며 지춘은 방준(邦俊)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광주 안씨

광주 안씨(경기)의 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안방걸(安邦傑)이다. 그는 광주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에 봉해졌다. 광주 안씨의 선조, 창성 유래는 전하는 문헌이 없어 미상이다.

 

탐진 안씨

탐진 안씨는 순흥 안씨 시조 안자미(安子美)의 6세손인 안목(安牧)의 셋째아들 안원린(安元璘)을 시조로 한다. 그의 후손 원린의 아들 안우(安祐)가 홍건적의 침략을 막은 공으로 오성군(鰲城君, 탐진의 옛이름)에 봉해진 뒤 탐진을 본관으로 하여 분관하였다.

 

관련 기록

죽산 안씨 족보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 이씨 였는데 서기 807년(당나라 헌종, 신라 애장왕)에 신라로 건너와 황해도 개성 송악산 아래에 정착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 때 갑신란이 일어나자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 아들 삼형제가 난을 평정한 공(功)으로 안(安)씨 성을 사성받았다, 라고 죽산 안씨가 대동보에 기록하고 있다.

 

안처현(安處玄)는 서기 888년 경주부(慶州府)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안강(安康, 경주에 속한 옛 지명)이다.(출처, 888년 동궁내양,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 안처현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안씨 인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강(安康, 경주에 속했던 지명)의 성씨 가운데 안씨는 본래 당나라 성씨로 기록돼 있다.

 

죽산 안씨는 본래 농서 이씨로 전하는데, 농서 이씨는 660년 나당 연합군의 장수로 들어온 연안 이씨 시조 이무(李茂)의 본관으로 농서는 당나라 수도 장한에 인접한 감숙성에 속한 지명이다. 연안 이씨의 본관이 확정된 것은 고려 개국 이후로, 신라 시대에는 농서 이씨로 불렸는데, 황해도에 세거하였던 농서 이씨(현- 연안 이씨)의 후손들이 안(安)씨 성으로 개성한것이지, 죽산 안씨 세보대로 신라 애장왕 때 당나라에서 농서 이씨가 동래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순흥 안씨의 추원록(追遠錄)에는 이황(李璜)의 형인 이경(李瓊)의 아들 3형제가 안(安)씨가 되었다고 하고, 죽산 안씨 세보에는 이황(李璜)이 형인 이원(李瑗)의 아들 3형제가 안(安)씨 됐다고 하고 있는데, 이황(李璜)의 형의 이름이 이원(李瑗), 이경(李瓊),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 후기 한국에 건너온 당나라 10학사, 또는 10경공은 당나라 황제가 사성한 이름과, 본래 초명, 두 가지 이름이 있었다.

 

 

최근에 다시 내용이 개정되어 올려져 있군요.

 

죽산 안씨 족보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 이씨 였는데 서기 807년(당나라 헌종, 신라 애장왕)에 신라로 건너와 황해도 개성 송악산 아래에 정착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 때 갑신란이 일어나자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 아들 삼형제가 난을 평정한 공(功)으로 안(安)씨 성을 사성받았다, 라고 죽산 안씨가 대동보에 기록하고 있는데, 안원(安援)이라는 인물이 중국과 한국 기록에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아서, 죽산 안씨가 조상을 미화하기 위하여 허위로 족보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있다.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경주부(慶州府) 안강(安康) 888년 동궁내양(東宮內養) 안처현(安處玄)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안처현(安處玄)을 사람으로 추정한다면,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안씨 인물이다. 안강(安)이라는 지명은 마을의 평안을 바라는 주민들의 바램을 담아 편안하다는 의미을 강조하여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안직숭(安稷崇, 1066~1135)은 문종 20년(1066)에서 인종 13년 1135년 까지 고려 문신이다. 안직숭(安稷崇)의 초명은 안직서(安稷諝)로,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왕을 떠나지 않고 보도(輔導)하여 국자좨주 좌간의대부가 되었다. 안직숭의 묘비명에는 상조 안락(安樂)은 고려 태조(재위 918-943) 공신이었고, 증조 안인표(安仁表)은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 조부 안정화(安鼎和)는 소부감, 아버지 안신조(安申祚) 대자대부로 추봉됐으며, 안직숭의 장남 안거중(安居中) 수주판관 예빈주부, 차남 안거정(安居正)은 장사랑 양온령동정(將仕郞 良醞令同正)을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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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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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노송 | 작성시간 10.05.03 죽산안씨 족보가 僞譜라는 증거는 [광주 安씨]다음카페에도 자세히 밝힌 것입니다. 죽산안씨는 濬. 令儀를 시조로 하는 두 문중 同姓同本으로 각각 1744년 1805년이후 족보를 간행하며 오다가 1976년(병진)에 합보하여 중국사람이라는 李瑗이라는 가공인물을 시조의 선계라고 하더니 22년 후 1999년 에 이원이 당나라 宗室사람이라고 신분?을 변경하여 참으로 허황한 거짓족보를 만들어 한점 관련없는 광주안씨를 거기에 끼워 기록하는 실제적인 성씨침범행위로 범죄행위를 자행한 것입니다.
  • 작성자노송 | 작성시간 10.05.03 그들의 거짓족보기록은 신라 경문왕때 外亂. 倭亂 평정에 有功하여 賜姓.封君이니 하는 거짓만으로도 증거가 됩니다. 외란. 왜란이 당시에 없고. 통일신라때 사성 봉군 制가 없고 또 지명이 당시에 竹山. 廣州.竹城이 없고. 당나라 종실사람이라는 이원은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에서 종실계보를 열람해도 없는 사람이니 모든 기록이 다 거짓입니다. 이런 고찰은 우리 광주 안씨를 침범하는 행위를 증거하여 여러 史書. 문헌들을 다 고찰한 것입니다. 이 상세한 내용은 [광주 安씨]다음 카페에도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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