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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문화포털에 소개된 광주(廣州)와 광주안씨

작성자안재중|작성시간10.06.15|조회수184 목록 댓글 0

출처 : http://www.gangdong.go.kr/site/contents/culture/html00/html04/html00/index3.html

 

강동과 관련된 고려시대 광주의 연혁과 산물

 

서울특별시 강동구 지역은 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을 한강 남쪽에 쌓아 수도를 삼으면서 정치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위례성은 강동구와 인접한 몽촌토성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설, 강동구와 인접한 하남시 이성산성·춘군동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설 등이 있어 왔다. 근래에는 몽촌토성 근처의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이 진척되면서 풍납토성 일대에 백제 초기의 도읍이 자리잡았으리라는 주장이 각광을 받고 있다. 백제 초기의 수도가 어디에 위치했었던지 강동구는 백제 초기의 수도 내지 수도권에 속하였던 것이다.

 

온조왕은 즉위한 지 14년이 되는 해에 수도를 ‘한산(漢山)’으로 옮겼는데 이를 『고려사』지리지에서는 남한산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도 16년에 ‘한산’으로 천도하였는데 『고려사』지리지에서는 이를 남평양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가 남한산성으로 천도한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그러한 사실은 인정해도 될 듯 싶다. 남한산성 천도는 이후 남한산성과 그 북쪽 지역(하남시 춘궁동)이 이 일대의 중심지로 떠오르도록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백제의 왕도(王都) “한성”은 고구려의 공격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고 대신 고구려가 한강 일대를 장악하면서 강동구 지역은 고구려 남진의 전략적 요충지로 변화하였다. 그후에는 신라가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 북진의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인 문무왕 때 한강 일대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으며, 중간에 남한산주로 고쳤다가 경덕왕 15년에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한주의 영역은 한강 이남은 물론 이북도 아우르는 광범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이 한주의 중심 지역은 ‘광주(廣州)’로 불려졌으며 읍치는 강동구의 남쪽에 맞닿는 하남시의 춘궁동 일대 혹은 남한산성으로 여겨진다. 강동구 지역은 넓게는 한주, 좁게는 광주의 중심권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23년(940년)에 지방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오늘날의 강동, 하남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이남 지역을 광주로, 그리고 한강 이북을 양주(楊洲)로 정하였다. 제6대 성종은 2년(983)에 처음으로 12개의 목(牧)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광주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하였다. 그러니까 광주는 광주목이 되고 목사(牧使)가 파견된 것이다. 성종14년(995)에는 10도(道)가 신설되었으니 우리나라 처음으로 ‘도(道)’제가 시행된 것이었다. 이때 12주목(州牧)은 12군(軍)으로 개편되고 목사 대신에 절도사(節度使)가 파견되었다. 이에 따라 광주는 봉국군(奉國軍)이라 불려져 절도사가 파견되었으며 10도중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되었다. 현종 3년(1012)에는 절도사가 폐지되고 대신 5도호(都護)와 75도(道) 안무사(安撫使)가 설치되는데 광주에도 안무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현종 9년(1018) 안무사를 혁파하고 4도호 8목이 설치될 때 광주는 8목의 하나로서 광주목이 되고 목사가 파견되었다. 이로써 광주는 가장 중요한 지방 행정 단위인 8개의 목 중의 하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고려 지방 구획의 큰 단위로 보통 북방의 양계(兩界)와 남방의 5도를 든다. 안찰사(관찰사의 전신)가 파견되는 5도제는 제16대 예종 무렵에 대략 윤곽을 드러냈다. 중부지역은 양광도(楊廣道) 혹은 충청도(忠淸道)로 일컬어지다가 전자가 대세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양광도는 바로 양주와 광주가 합쳐진 용어였으니 이를 통해서도 광주가 이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가 한양에 정해진 후에도 광주는 소속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되었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主郡)·주현(主縣)이 있었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군(屬郡)·속현(屬縣)이 있었다. 도의 장관인 안찰사는 조선시대 도의 장관인 관찰사보다 자신이 파견된 지역에 대한 장악력이 약하였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재상급에 임명되었지만 고려시대 안찰사는 5~6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안찰사보다 오히려 품질이 높은 3품 이상의 관직자가 임명되는 경·도호부·목의 장관이 계수관(界首官)이라 불리며 중앙과 군현을 중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지방행정은 주군·주현이 독자적으로 중앙과 연결하여 처리하였으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계수관을 통하기도 한 반면, 안찰사는 자신이 관할하는 도를 돌아다니며 감찰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니까 강동 구민들은 양광도 안찰사의 감찰을 받았지만 오히려 주군·주현의 장관이자 계수관인 광주목사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광주는 오늘날의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경기도의 하남시, 광주군, 성남시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천녕군(여주군 홍천면), 이천군, 죽주(안성군 이죽면), 과주(과천 일대), 용구현(용인 일대), 양근현(양평읍) 등의 속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광주는 더욱 광범위하였다. 광주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은 그 안의 구체적인 지역을 가리키기보다 그냥 ‘광주’라 하여 포괄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강동구 지역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조선후기에 ‘면(面)’이라는 지방행정 단위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을 때 강동구 지역은 광주목의 구천면(龜川面)에 해당하였다. ‘면’제가 실시되지 않은 고려시대에 ‘광주’라 언급된 경우 그것이 강동구 지역과 관련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강동구 지역과 명백히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 한 ‘광주’로 나오면 일단 소개대상을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 광주의 읍치(邑治)가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조선 후기 인조4년(1626)에 남한산성 안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와 같은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중기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 따르면 덕풍역은 주 북쪽 5리에, 일장산(남한산)은 주 남쪽 5리에, 검단산은 주 동쪽 7리에, 망월봉은 주 서쪽 10리에 자리잡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주(州)’ 즉 광주의 읍치는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검단산이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된 점도 그러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광주의 관청 소재지에 대해서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이 쓴 ‘청풍정기’가 참고된다. 이곡은 충정왕 원년(1349)에 고향인 한산(韓山 : 충남 서천군 한산면)을 다녀왓는데 개경에서 내려갈 때와 고향에서 개경으로 올라올 때 광주 지역을 경유하였다. 내려갈 때 한강을 건너 낙생역(樂生驛 : 현재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 이르렀다. 목표지가 서해안의 한산이었으므로 광주 치소 근처에 위치한 덕풍역 쪽으로 가지 않은 것이었다. 이곡의 남행을 안 광주목사 백문보(白文寶)가 낙생역에 사람을 보내 관사의 북쪽 절경에 자리잡은 옛 ‘청풍정(淸風亭)’터에 정자를 새로지었으니 와서 기(記)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직산(천안군 직산면)사람인 백문보는 이곡과 함께 대학자 이제현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한 동년(同年)이었다. 이곡은 고향길이 바빠 올라오는 길에 들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올라오는 길에 광주 치소를 들렀는데 백문보는 이미 개경으로 돌아갔고 대신 친우 이군(李君)이 새로운 광주목사로 부임해 있었다.

 

이곡은 청풍정에 올라 주변경치를 둘러보고는 “광주의 주(州) 됨은 삼면이 모두 높은 산이고, 북쪽은 비록 광원(曠遠)하나 지세가 평평하고 낮아 관청과 민가가 마치 우물아래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청풍정은 후에 광주목사 홍석(洪錫)에 의해 청풍루(淸風樓)로 탈바꿈하는데 객관의 동북쪽에 위치한다고 되어 있다.

 

이곡의 아들인 대학자 이색도 광주를 들른 적이 있는데 “ 사면의 구름낀 산이 관사를 감싸고 한 줄기 강물이 어대(漁臺)를 감돌아 흐르네”라고 읊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동쪽에 검단사, (서쪽에 이성산), 남쪽에 남한산, 동남쪽에 용마산 등으로 둘러싸인 춘궁동 일대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춘궁동 일대는 강동구 상일동을 넘어서면 맞닥뜨리는 곳이니 강동구 지역은 광주목의 중심권에 속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이남의 경우 개경에서 동경(경주)를 잇는 교통망이 가장 중요하였다. 제1로는 개경-> 청교역->양주->평구->원주->단양->죽령->안동->영천->동경이었다. 제2로는 개경->청교역->남경(한양)->광주->이천->충주->계립령->문경->상주->해평->대구->동경이었다. 제3로는 개경->청교역->남경->용인->양지(용인군 내사면)->죽산(안성군 이죽면)을 거쳐 충주에서 제2로와 합쳐졌다. 고려 때는 제1로와 제2로가 제3로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광진을 통과해 강동구 지역을 거쳐 덕풍역이나 경안역 방향으로 내려가는 제2로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처럼 강동 일대는 고려시대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주로 거쳐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문종21년(1067)정월에 2,800간이나 되는 유명한 흥왕사가 낙성되어 그것을 기념하는 연등대회가 5일 밤낮 동안 펼쳐졌다. 그런데 이때 광주는 왕의 칙명에 따라 백사(百司), 안서 도호부, 개성부, 수주(수원), 양주, 동주(철원), 수주(부평), 강화현, 장단현과 함께 이 행사에 동원되었다. 동원된 사람들은 대궐 뜰에서부터 흥왕사의 문까지 시렁대인 채붕(綵棚)을 서로 연달아 얽어 잇닿게 하였으며, 왕의 행차길 좌우에 등을 밝힌 인공산과 횃불을 밝힌 인공나무를 만들었다. 보통 강화, 장단 정도까지가 수도 개경 주변의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조금 벗어난 광주와 그 인접지역 사람까지 차출되었으니 흥왕사 낙성 축하행사가 얼마나 거대하게 열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강동 지역 사람들도 차출되어 이 행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양주에 남경이 설치된 후에는 광주가 남경의 수도권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의종21년(1167)8월에 왕이 남경에 행차한 후 가돈원(加頓院)에 이르렀을 때 광주에서 의장대와 악대를 갖추어 어가를 맞이하고 말 2필, 견여(肩輿)1개, 양산 3개를 바쳤다. 광주는 지방행정 중심지인 8목의 하나였으므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팔관회 때마다 축하사절을 보냈다. 고종 40년(1253) 11월 국왕이 팔관회를 개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을 때 여러 도에서 축하하는 표문을 올린 곳은 몽골과의 병란으로 인해 남경(한양), 광주, 수주(부평) 뿐이었다 한다. 이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몽골과의 항쟁기간에도 광주가 어느 정도 제 기능을 수행하혔음을 말해준다.

 

고려시대 사정이 상당히 반영된 『세종실록지리지』광주목에 따르면 비옥한 토지와 척박한 토지가 반반이라고 하였다. 이 중 비옥한 토지에 해당되는 지역의 대부분은 낮은 구릉과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남한산 이북에 위치한다. 특히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한강 연안 지역은 한강이 범람할 때마다 축적된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로 고려시대에도 벼농사가 많이 지어졌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풍부한 수자원을 갖고 있는 광주 지역에도 가뭄으로 고통을 겪은 적이 더러 있었다. 고려 문종 11년(1057)에는 음력 5월 예부가 아뢴 바에 따르면 초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았는데 특히 광주는 전야(전야)가 건조하여서 거의 흉년을 면치 못할 듯 하다고 하였다. 이 가뭄에 대한 대처로 송악, 산천, 박연 등에서 비를 기원하는 기도제가 행해졌으며 광주에서도 기우제가 행해졌다. 이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열흘만에 비가 내려 광주 사람들도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종 18년(1064) 11월에 호부가 아뢴 바에 따르면 광주목은 봄부터 가을까지 오랫동안 가물어 비가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박까지 거듭 내려 수확할 화곡(禾穀)이 조금도 없었다. 광주 사람들은 최악의 기근에 직면하였던 셈인데 이에 대해 정부는 양전(量田)을 정지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그 외에 어떤 구휼정책을 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광주지역은 고려 문종 때 가뭄으로 최악의 위기를 맞았었는데, 그래도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한강 연안 지역은 강물을 끌어들일 수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 반면 강동구 지역은 고려시대에도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피해를 종종 입었을텐데 확인할 수는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광주목에 따르면 광주의 토의(土宜)로 오곡, 잡곡, 대추, 옻(칠), 닥나무, 완(왕골), 뽕나무를 들었다. 토공으로는 진즙(띠, 짚), 지초(芝草), 약재로는 우여량(禹餘粮), 안식향(安息香), 사자족(獅子足), 애현(艾玄), 호색(胡索), 진봉0, 토산(土産)으로는 은구어(銀口魚)를 들었다. 또한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여러 개 실려있다. 『동국여지승람』 광주목에는 토산으로 사(絲), 마(麻), 자기, 도기, 은구어, 눌어(訥魚), 금린어(錦鱗魚), 해(게)가 실려 있다. 이러한 광주 지역의 산물에는 조선전기만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사정도 어느정도 반영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分阮)이 마련되어 광주 일대는 관청에 도자기를 공급하는 도자기의 중심 산지가 된다. 이처럼 광주가 도자기의 산지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이미 고려시대 때 마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려 충렬왕 3년(1277) 5월에 중 육연을 강화에 보내 유리 기와를 굽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많은 황단(黃丹)이 사용되었으므로 광주 의안의 흙을 취하여 구워서 만들었다. 품색이 남상 즉 중국 남쪽의 상인이 파는 것보다 나았다 한다. 이를 통해 광주에서는 도자기나 기와를 굽기 위해 사용되는 최상의 흙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도자기 공업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고구려시대 강동 지역의 역사

 

통일신라가 약화되면서 전개되는 후삼국의 전란 시대에 광주 지역은 영웅들이 차지하고 싶은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원주의 양길 밑에 있다가 명주(강릉)에 입성하면서 독립한 후 철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송악으로 수도를 옮겨 ‘고려’를 칭한 궁예에게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는 광주 지역을 손에 넣지 않으면 남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궁예는 900년에 왕건에게 명해 광주, 충주, 청주, 당성(화성군 남양면), 괴양(괴산)등의 군현을 공략하도록 하였으며 왕건은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이후 광주는 궁예의 ‘고려’, 왕건의 ‘고려’에서 남진할 때 거쳐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가 후삼국의 통일을 완수한 이후에는 수도 개경에서 남쪽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거란족 요나라의 침략으로 개경이 위험해지자 현종은 원년(1010년) 말에 나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는데 역시 광주를 경유하였다. 왕은 임진강을 넘어 적성현 단조역과 창화현을 거치는 동안 반란자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였다. 이를 극복하고 다음해 정월에 광주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신하들이 많이 도망하여 수행하는 자들이 적었으며 두 왕후는 행방불명되었다가 요탄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거란군이 계속 남하하였으면 교통의 요충지인 광주 지역이 먼저 피해를 당했을 터이지만 다행히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격퇴당하였기 때문에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 지역은 무사할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이 몽골에 쫓겨 고종 3년(1216)부터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 거란족은 고종 6년에 평양 부근의 강동성에서 포위당해 항복하였지만 그 여파는 상당기간 존속하여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최우 무신정권기인 고종 9년에 진위현(현재 평택군 진위면)사람인 영동정 이장대와 직장동정 이당필이 같은 현 사람 별장동정 김례와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많은 무리를 불러모아 현청을 습격하여 현령의 신표를 겁탈하였으며, 창고를 열어 구휼하니 촌락의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호응하였다 한다. 그들은 인접한 고을에 통문을 보내 스스로 정국병마사, 자신의 무리를 의병이라 칭하였다. 그들이 장차 광주를 침입하려 하자 왕은 낭장 권득방, 산원 김광계 등을 보내 안찰사 최박과 함께 광주와 수주(수원)의 군사를 발하여 치게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인들은 봉기군에 호응하는 사람과 봉기군을 진압하는 사람 양쪽 모두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니 선택의 기로에서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중앙정부는 충주, 청주, 양주 방면의 군사까지 동원하고서야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고려의 거의 전 지역이 전장으로 변하는 몽골군의 침략때는 광주 지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며 교통의 요충지라 우선 공격대상이 되었다. 몽골군의 침략은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권80 식화지 3 진휼조에는 광주가 신묘년(고종18년)과 임진년(고종 19년)에 몽골군에게 포위공격을 당했으나 굳게 지켜 함락당하지 않았으므로 요역 징발을 면제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광주 지역 사람들이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1차 침략과 2차 침략을 굳세게 막아내 승리했으며 그 공을 포상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광주가 고려시절에 중도 즉 국토의 중간 방면의 큰 진이자 남로(南路)의 요충지로서 이 성이 함락당하면 나머지 지역도 위태롭게 될 만큼 중요한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 묘지명의 끝에 실린 명에 “남쪽 벼리를 광주라 하는데 요충에 자리잡았네. 황제(고려국왕)가 의지하고 중히 여기니 온 나라를 보호할 만하도다”라고 한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위 묘지명에 나타난 광주의 성은 일장산성 즉 남한산성으로 판단된다. 몽골의 2차 참략 대군이 남한산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해 수개월 동안 공격했지만 오히려 많이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하는 피해를 보고 물러갔던 것이다. 위 묘지명에는 남한산성 전투의 승리는 오직 중앙에서 파견된 산성의 방어 책임자 이세화의 탁월한 지휘능력으로 인한 결과물로 묘사되었다. 물론 그의 뛰어난 능력과 공을 인정해야겠지만 이 전투 승리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성 안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운 광주민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고려사에는 누락된 전투상황이 이 묘지명에 의해 복원되어 광주를 명예롭게 만들었으니 광주민은 이규보와 이세화에게 감사해야 한다.

 

제1차와 제2차 몽골 침략군을 광주산성(남한산성)에서 막아내 빛나는 승리를 거둔 광주민 속에는 당연히 오늘날 강동구 지역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외적이 침략해오면 당시 광주 관내의 사람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것이 당연하며 더구나 강동구 지역은 이 산성에 인접하였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최우 무신정권은 몽골의 2차 침략 직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모든 고려의 백성들은 반드시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그러하지 않은 경우 처벌까지 하였다. 남한산성을 함락하지 못한 몽골군은 남진하여 용인의 처인성으로 공격하였지만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는 수모를 겪은 끝에 철수하였다. 그러니까 처인성의 화려한 승리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광주산성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남한산성 전투의 승리는 강동민을 포함한 광주민의 명예로운 족적으로서 우리나라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광주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이 위험해지자 복주(안동)로 피난할 때도 거쳐간 곳이었다. 공민왕은 10년(1361) 11월에 임진강을 넘고 양주의 영서역을 거쳐 광주 경내에 들어왔다. 왕은 사평원에서 개경 감무로부터 말 100여필을 받고 광주에 이르렀다.

 

오늘날 강동구 지역을 통과해 광주의 치소가 있는 하남시 지역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하지만 향리와 백성은 모두 산성에 올라가고 주관만이 있었다 한다. 왕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전부터의 전통에 따라 외적의 침입 우려가 있으면 광주산성에 들어가 생존하는 것이 보다 더 절실했던 것이다. 왕의 행렬은 광주 관내의 경안역과 이천현을 거쳐 음죽현, 충주를 경유해 안동에 도착해 전열을 정비하였다. 안정을 되찾은 고려군은 공민왕 11년 정월에 홍건적을 대파해 경성(개경)을 수복하고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개경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12년에 그동안의 공로를 포상했는데 경성을 수복한 2등 공신에 광주목사 송양우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강동지역을 포함한 광주민들이 송양우의 지휘하에 개경수복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음을 시사해준다 하겠다.

 

공민왕의 후원을 받아 중 신돈이 집권했을 때 신돈이 재상과 함께 광주 천왕사의 사리를 개경의 왕륜사에서 맞이한 적이 있었다. 이 천왕사가 광주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을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음은 틀림없다. 당시는 불교시대였으므로 아마 강동구 지역 주민들도 많이 천왕사를 찾아 사리에 참배하였을 것이다.

 

우왕 14년(1388)에 임견미·염흥방의 세력이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력에 패배해 관련자 1,000여명이 살해당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 때 살아남은 임견미·염흥방 당의 아내와 딸들은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광주를 경유하였다. 한양의 풍양현 출신으로 광주의 몽촌 고탄성에 우거하고 있던 조운흘이 그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몽촌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정짓기 어렵지만 몽촌토성이 있는 송파구 올림픽 공원에서 강동구 둔촌동에 걸쳐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살아남은 임견미·염흥방 당의 아내와 딸들은 배로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지역을 통과해 남쪽 멀리 유배갔던 것이다.

 

고려시대 강동 지역의 지배세력

 

광주목에는 중앙에서 목사와 보좌관들이 파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명환’조에는 고려 때 광주에 파견되어 정사를 잘한 지방관들이 몇 명 소개되어 있다. 목사 장선, 통판 홍자번, 참군 이혼, 사록 이진·안보·김부의, 그리고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해 파견되어 승리를 이끈 이세화가 그들이다. 이외에도 양광도광주등처절제사 겸 판광주목사 최운해, 목사 윤언이·최유청·설염임·송양우·백문보, 판관 이인정·김경용, 통판 김약온, 장서기 염신약, 서기 김류 등이 광주목에 부임하였다. 이들이 강동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목을 국왕과 중앙정부를 대신해 다스렸던 것이다.

 

이들 중 윤언이는 여진정벌의 영웅 윤관의 아들이었는데 묘청을 진압한 김부식과의 불화로 좌천된 것이었다. 최유청은 고려말의 영웅 최영의 먼 조상이었다. 홍자번은 충렬왕 때 수상에까지 오르는 인물이었다. 이진은 대학자 이제현의 부친이고, 이인정은 이진의 형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지방토착세력의 영향력이 커서 그들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도와 실질적으로 자신의 고을을 지배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23년(940)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에 토성(土姓)을 분정하였다. 토성은 호족 내지 호족의 후예로서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집단이었다. 그들은 향리가 되거나 중앙으로 진출하여 사족(양반)이 되었다. 고려는 조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지방의 힘이 컸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 즉 속군과 속현도 많았다. 고려의 향리는 조선의 그것과 달리 세력이 커서 자신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토호 내지 유지였다. 광주목에도 목사가 파견되었지만 토성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니 광주의 토성은 이 일대를 지배한 성씨집단이 된다.

 

고려시대를 어느 정도 반영한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광주목에 따르면 토성(土姓)이 이(李), 안(安), 김(金)등 셋으로, 가속성(加屬姓)이 박(朴), 노(盧), 장(張)등 셋으로 망성(亡姓)은 윤(尹), 석(石), 한(韓), 지(池), 소(素)등 다섯으로 나타난다. 망성은 대개 망토성(亡土姓)을 가리킨다. 조선중기『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성씨조에는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소(素), 그리고 ‘속(屬)’으로 표시된 노(盧)·장(張)·박(朴)이 실려 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 광주를 지배한 토호는 토성내지 망성으로 표시된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소(素)등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토성으로 표기된 이·안·김이 핵심 지배세력이었지 않나 싶다.

 

고려시대에 광주 출신으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왕규였다. 그는 그의 전(傳)에 ‘광주인’이라고만 되어 있어 광주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알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에서 왕씨는 확인 되지 않는다. 왕규는 원래부터 왕씨가 아니라 태조 왕건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을 사위로 둘만큼 광주의 대호족이었던 왕규는 토성인 이·안·김 등과 관련되었을 가능성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가문이 몰락해 토성으로 취급되지 않았을 가능성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왕규는 태조 왕건을 섬겨 대광(大匡)이 되었으며 왕건에게 딸을 둘씩이나 바쳤는데 하나는 제15비 광주원부인, 하나는 제16비 소광주원부인이었다. 특히 제16비는 광주원군이라는 왕자까지 낳았다. 나아가 왕규는 다른 딸 하나를 왕건의 아들인 제2대 혜종에게 들여보냈는데 후광주원부인이다. 왕규는 태조가 아파 죽음에 임박한 태조26년 5월에 염상, 박수문등과 함께 모시고 앉아 태조의 유언을 들을 정도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세력을 떨쳤댜. 그의 사위인 무가 제2대 혜종으로 즉위하자 그의 세력은 더욱 떨치게 된다.

 

그런데 『고려사』권 127 반역 1 왕규전에 따르면, 태조가 세상을 뜨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규가 왕의 배다른 동생인 요(정종)와 소(광종)가 반역하려 한다고 참소하고 해치려 하였다. 혜종이 무고임을 알고 그 동생들을 더욱 잘 대해 주었으며 맏딸을 소와 혼인시켜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왕규는 외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어느날 밤에 부하를 왕의 침소로 잠입시켜 잠든 왕을 시해하려 하다가 왕이 깨어 반격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지만 왕은 추궁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밤에 왕규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에 들어와 벽에 구멍을 뚫고 침소에 침입하였다. 왕은 점술가 최지몽의 예언에 따라 이미 다른 곳으로 몰래 피신해 있던 터라 무사하였지만 역시 왕규의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왕규는 혜종의 후원자였던 대광 박술희를 평소에 미워하던 차에 혜종이 세상을 뜨자 정종의 명이라 꾸며 살해하였다. 혜종의 병이 깊어지자 정종이 왕규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비밀히 서경(평양)의 대광 왕식렴(태조의 사촌동생)과 연결하여 대응하였으며,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지키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왕규를 강화도의 갑곶으로 유배하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 참수하였으며 그 당여 300여인을 주살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개과정이 이른바 ‘왕규의 난’이며 그래서 왕규는 불명예스럽게도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세밀히 음미해보면 왕규가 사위인 혜종을 몰아내고 외손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막강한 호족인 충주 유씨를 외가로 두었으며, 태조의 사촌동생으로 서경의 군사권을 장악한 왕식렴과 친밀한 요와 소 형제가 정변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받는다. 요는 혜종의 뒤를 이어 정종이 되며, 소는 정종의 뒤를 이어 광종이 된다. 후삼국과 고려초기에 정국을 호령한 광주의 대호족 왕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인물조에는 고려시대 인물이 없는데 왕규 정도면 실리고도 남을 인물이다. 왕규의 외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은 가엾게도 왕규가 몰락하면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고 한다. 왕규의 몰락은 광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8목의 하나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과 교통의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행적을 나타낸 광주 출신 인물이 없다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광주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이곳 출신 인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의 토성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고려 말로 가면서 사회변동의 폭이 넓어지자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광주의 토성으로 이, , 김이 있었는데 맨 앞에 실린 이씨가 주목된다. 광주 이씨를 둔촌 이집과 석탄 이양중에 유의하여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인물조 ‘본조(조선)’항에는 이집, 그의 세 아들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 이지직의 세 아들 이장손, 이인손(우의정 역임), 이예손,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영의정 역임)등 광주 이씨들이 다수 실려 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며 교육열이 대단한 집안이라 하겠다. 이지직과 그 형제들은 고려 말에 급제하고, 이지직의 아들들은 조선건국 초에 급제하였다. 위 인물조에 따르면, 이집은 광주의 리 즉 향리로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다가 해를 입히려 하자 부친을 업고 경상도 영천에 도망해 숨었다가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경사(개경)로 돌아왔다. 본조(조선)에 벼슬하여 관직이 전교판사에 이르렀다. 학문이 고매하여 이색, 정몽주, 이숭인과 교유하였는데 모두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광주목의 말미에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변오(辯誤)조가 설정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이집이 ‘고려’항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이당이 본주 즉 광주의 향리였는데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하였다. 이집은 그 세 번 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이원령이었다. 고려 충목왕 때 급제한 그는 문장과 지절(志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서로 어울려 ‘ 경우(敬友)’가 되었다.

 

일찍이 신돈의 뜻을 거슬러 살해하려 하자 부친 이당을 업고 낮엔 숨고 밤엔 가고 해서 영천 최윤도의 집에 의탁하였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돌아와 이름을 ‘집(集)’, 자(字)를 호연(浩然),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은거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봉순대부 판전교시사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여주의 천녕현에 퇴거하여 궁경(躬耕)독서하였다. 공양왕(사실은 우왕) 정묘년에 졸하니 정몽주, 이숭인 등이 모두 시를 지어 곡하였다. 아조(조선)가 개창할 때 그 사적 전말이 여러 문집에 실려 있었는데도 역사를 편찬함에 미쳐 임사홍 부자가 이극감(이집의 증손)형제를 심히 미워하여 이집이 아조에 들어와 벼슬하였다고 무고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본조 인물아래에 잘못 기록되었다. 선조 때 경연관 홍적이 고치기를 청하니 인출(印出)할 때를 기다리라 명하였다. 상(上) 3년에 이 책을 간행함에 있어 공의 8대손 영의정 이덕형이 상서를 올려 유교(遺敎)를 준수하여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상이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개찬하여 거짓을 없애고 사실을 기재하도록 하니 출처와 대절(大節)이 명백하여 유감없이 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이집은 고려말의 인물로 정묘년(우왕13년:1387년)에 세상을 떴으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 인물조의 본조(本朝)항에 실린 것은 잘못이며 마땅히 ‘고려’항을 마련하여 실었어야 옳다는 이야기이다. 정몽주와 이숭인의 이집의 죽음을 곡하는 시가 이집의 문집인 『둔촌잡영』부록에 실려 있으니 이집이 조선에 들어와 벼슬하기는 귀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절의를 중시했는데 이집이 조선 건국 후에 벼슬한 것으로 되면 절의를 저버린 것이 되고 이는 그 후손을 깎아 내리는 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효종 3년(1652)에 11대손 이휴징이 쓴 이집 묘갈문이 『둔촌잡영』보편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이집광주 이씨의 시조라 표현되었으며 이집의 위로는 부친 이당만 언급되었다. 이당은 본래 주리 즉 광주의 향리로서 예비시인 사마시에 올랐으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등제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집이 두 번째 아들이라 되어 있어 세 번째 아들이라 되어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변오’조와 다르다.

 

이집의 묘갈문에는 부친까지만 언급되었지만 『씨족원류』의 광주 이씨 항에는 그 조상에 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향임 이자성 -> 향임 이군린(혹 이방린) -> 향임 이용수 (혹 이방의) -> 영동정 이한희로 이어진다. 이에 따르면 이집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리 집안이었다. 이집의 묘갈문에서 부친 이당까지만 밝힌 것은 향리를 천시하는 조선 후기의 인식이 반영되었지 않나 싶다. 대대로 향리를 역임한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씨족원류』의 광주 이씨편의 내용은 대체로 신빙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향리는 세습되는 것이므로 이당과 이집 부자가 향리였다는 것만으로도 향리 집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향리는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호족의 후예로서 지방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존재였다. 광주 이씨 집안은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여 광주를 지배하다 원 간섭기에 해당하는 이당의 대 무렵부터 중앙으로 서서히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말 ~ 조선초로 가면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져 조선중기에 이르러 명문세족으로 자리잡았다고 하겠다. 향리 집안이 출세하는 데는 과거 급제 외에 다른 길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집안은 자제들을 치열하게 교육시켜 급제자들을 대를 이어 무더기로 배출함으로써 명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변오’조나 이집 묘갈문에서 이집을 포함한 다섯 명의 형제들이 모두 등과(등제)했다고 되어 있다. 아들 셋이 과거의 본고시에 합격하면 대단한 일로 간주되어 포상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곤 하였으니 다섯 아들이 그랬다면 기록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 이집은 분명히 본고시에 급제하였지만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본고시에 급제한 것일까. 여기의 ‘등과(등제)’라는 표현은 혹시 과거의 예비고시 합격까지 포함해서 사용된 용어가 아닐까.

 

정리하자면 광주의 향리 이당의 아들로서 역시 향리였던 이원령은 충목왕 3년에 과거의 예비시에 합격하고 공민왕 4년에 본고시에 합격해 관직생활을 하였다. 신돈에 거슬려 경상도 영천 친구집에 부친과 함께 살았다. 신돈 몰락 후에 돌아와 얼마동안 벼슬하여 3품인 판전교시까지 올랐다. 하지만 은거할 마음을 품어 이름을 이집이라 고치고, 자를 호연(浩然),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한 터라 곧 여주의 천녕현에 퇴거하였다. 목은 이색이 쓴 『둔촌기』에 의하면, 이원령은 맹자 ‘집의(集義)’의 집을 따서 이름을 삼고 맹자의 호연지기를 취하여 자(字)를 삼았다. 고려말의 성리학자들은 사서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이원령 즉 이집은 그 중에서도 맹자에 심취했던 것이다. 또한 둔촌기에 따르면 황야에 달아나 신돈 당의 화를 피하여 살아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적으로 ‘둔(遁)’에 기인한 것이어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둔촌’이라 했다고 이집이 이색에게 밝혔다.

 

이집의 본관이자 고향은 광주였으니 여기서 성장하고 조상 대대로 세습해온 향리직을 계승하였다. 급제하고 관직에 오르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친척들은 고향에 있었다. 그의 퇴거지는 여주 천녕현이었지만 광주에 들르거나 잠시 머무르곤 하였다. 『둔촌잡영』에 실린 “광주에서 동년 최 사관(史官)에 차운(次韻)하다‘는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강동구 둔촌동이라는 지명도 둔촌 이집이 이 지역에 은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하며, 둔촌동 뒤의 ’굴바위‘와 ’둔굴‘은 그가 은거했던 곳이라 한다. 또한 그는 뒤에 언급하듯이 암사동의 구암서원에 모셔졌다. 이로 보면 이집은 강동구의 저명한 인물인 셈이다. 이집의 광주 이씨 집안은 광주목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향리 내지 토호로서 강동구 지역과도 많은 연관을 맺었으리라 여겨진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당의 8촌인 이전사의 손자로 이양중이라는 인물이 있다.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기우집』권 2 두문동 72현록에 실려 있는데, 이양중이 이당의 형 이한의 증손녀 사위인 서견(이천인)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양중은 호가 ‘석탄’, 관향이 광주, 관직이 형판으로 조선건국 초 광주에 퇴거하였으며 유배당하고도 굽히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광주부읍지』인물조 고려 항에도 그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이집과 동종(同宗)으로 고려말에 관직이 형조참의였는데 조선건국 때 절개를 지켜 남한산 아래에 퇴거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아 유배당해도 굽히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잠저 때의 친구라 하여 우대하고 한성부윤에 제수했지만 받지 않자 그 장자인 이우생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태종이 이양중을 방문하였다가 만나지 못하고 유숙하고 되돌아가 그곳을 ‘왕숙탄(王宿灘)’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양중이 광주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강동구 암사동 지역에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구암서원에 이집과 더불어 모셔진 것으로 보면 강동구 지역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광주 토성의 두 번째로 올라 있는 안씨가 눈길을 끈다. 1871년경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의 인물조에는 고려 때 인물로 안방걸, 안기, 안국주, 안강이, 조선 때 인물로 안성이 실려 있다. 읍지에 따르면, 안방걸은 광주 사람이 난을 일으켜 그 주(主)를 살해하자 토평하였으며, 또한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자 고려 태조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광릉군에 봉하고 광주를 관향으로 하사하여 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방걸의 후손인 안기는 충선왕을 섬기고 공양왕 때 이부상서 판전농시사에 이르렀지만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병을 칭탁하고 함안에 퇴거했는데 82세에 세상을 떴다. 안기의 아들인 안국주는 중랑장에 이르렀지만 정몽주가 피살되자 함안으로 돌아갔으며 두 번 불러도 응하지 않고 89세로 세상을 떴다. 안국주의 아들 안강은 아버지가 물러나 벼슬하지 않자 역시 은거하였다. 안성은 과거에 급제해 관직이 개성유수에 이르고 후에 ‘사간(思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조종운의 『씨족원류』에는 광주 안씨의 계보가 안방걸(대장군) -> 후손 안수(安綏 문하시중)-> 안지(판군기시사) -> 안수(安壽 판도평의사사) -> 안해(판전농시사) -> 안기(판전농시사) -> 안성(개성유후, 사간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一本)에는 안수가 있으나 안기가 없고, 일본((一本)에는 안수가 없으나 안기가 있다고 세주를 달았다. 안수(安綏)가 수상인 문하시중을 안수(安壽)가 재상회의 도평의사사의 판사를 지냈다는 점은 추증직이 아니라면 신빙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재상직을 지낸 인물은 보통 정사에서 확인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에 안성은 조선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권 6 광주목 인물조 본조(조선)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개성부 유후(留後)에 이르렀고 후에 시호를 사간(思簡)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어 신상명세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다. 『기우집』권2에는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해 절개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안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성은 관직이 직제학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평양백에 임명하였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동문선』권16 칠언율시에는 안지상이 광주 촌장(村莊)에서 급제 동년으로 장원인 강화 만호 하을지에게 헌정하는 시가 실려 있다. 하을지는 충목왕 즉위년 11월에 박충좌와 이천 밑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런데 공민왕 22년(1373) 반남 박씨 준호구(准戶口)에 따르면 박수의 사위이자 박상충의 매부로 정산군 지사인 안길상이 실려있다. 또한 안길상은 본관이 광주이며 갑신년(충목왕 즉위년, 1344)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박수의 아들이자 이곡(이색의 부친)의 사위인 박상충은 고려말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박상충의 매부가 되는 이 안길상은 바로 안지상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광주 출신의 안지상(안길상)은 충목왕 즉위년에 좌주(座主 : 고시관)인 박충좌와 이천 밑에서 2등 즉 아원(亞元)이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급제하였던 것이다.

 

안길상(安吉常)은 또한 안길상(安吉祥)과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안길상은 충목왕 때 개혁을 담당한 정치도감의 녹사(실무진)으로 활동한다. 안렴사가 정동행성의 이문(理問) 윤계종이 이천 향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안길상은 윤계종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은폐하였다가 정치도감의 판사인 왕후와 김영돈에게 뺨을 얻어맞고 쫓겨났다. 충정왕의 공부를 돕는 시학으로 활동했던 전교승(典校丞) 안길상은, 숙부 공민왕에 의해 쫓겨나 강화도로 향하는 충정왕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가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의리를 중시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이후 안지상(안길상)은 고향 광주로 돌아와 은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하을지에게 보낸 시에 그의 불우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하을지는 공민왕 22년 7월에 강화만호로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처벌받았으니 광주 은거지에서 안지상이 하을지에게 시를 보낸 때는 공민왕 22년 무렵이 된다. 이로 보아 안지상은 공민왕 치세의 거의 내내 관직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공민왕 말년이 되어서야 지방관에 부임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는 이처럼 오랫동안 은거함으로서 자신이 모셨던 충정왕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안길상은 우왕 3년 6월에 정3품인 판전객시사로서 왜구를 근절시키기를 요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우왕 6년 11월에 병으로 그만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충목왕때 아원으로 급제하여 우왕 때까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안지상(안길상)은 광주가 본관이고 여기에 촌장을 갖고 있었다. 안지상은 처남인 박상충의 아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으로 보아 출신지가 광주 중에서도 강동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지상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 부친이 안생이라는 점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정황들로 보아 앞에서 소개한 안성 집안과 친척관계였으리라 여겨진다. 광주의 토성 안씨는 광주 사람 왕규의 몰락으로 불이익을 받다가 안지상, 안성 등의 예처럼 고려말에 가서야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았나 싶다.

 

요컨대 고려시대에 광주 출신 인물들은 건국초에 이곳 출신의 왕규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몰락하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소외되었다. 물론 이씨, 안씨, 김씨 등이 호족의 후예인 토성으로서 광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특히 이씨는 고려말 이집 때까지도 대대로 호장을 세습하였다. 안지상·안성의 안씨와 이집·이양중의 이씨 집안은 원 간섭기 무렵부터 서서히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특히 이집 계열은 고려말~조선초에 급제자를 대거 배출해 명문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871년 경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에 따르면 오사충, 박은, 유창의 묘가 광주의 구천면 즉 오늘날의 강동구 지역에 있다. 오사충은 정도전과 같은 계열을 급진파로서 이색와 정몽주를 비판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의 선대는 경상도 영일에 살다가 평안도 영원진으로 옮겼다. 그는 공민왕 4년 2월 이공수와 안보 밑에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집과 동년이었는데, 그가 광주 지역에 묻힌 연유가 이와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박은은 전라도 나주의 반남(潘南)사람 박상충의 아들로서 창왕 즉위년에 정도전과 권근 밑에서 급제하고 조선 건국 후에 활약을 많이 한 인물이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은 부친 박상충의 매부인 광주 안길상의 연고지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유창은 공민왕 20년에 이색과 전록생 밑에서 국왕의 친시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위에서 살펴 본 바에 따르면 바로 이집의 사위였다. 이집과 절친한 이색이 그의 문생(자신이 주관한 과거의 급제자)인 유창을 이집에게 사윗감으로 추천했지 않았나 싶다. 유창은 원래 강릉 사람이지만 처가의 마을에 뼈를 묻은 것이다.

 

출처 : http://www.gangdong.go.kr/site/contents/culture/html00/html04/html00/index4.html?menuId=null

 

오늘날의 강동구 지역은 조선시대에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구천면(瞿川面)에 속하여 있었다. 구천면이라는 지명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어세겸(魚世謙)이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고덕동을 중심으로 한 강동구 일대를 사패지로 받으면서 그 땅을 아버지인 어효첨(魚孝瞻)의 아호인 구천(瞿川)으로 명명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구천면은 1907년에 구천면(九川面)으로 한자명이 바뀌었으며, 강동구 지역은 1962년까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으로 내려왔다.

 

원래 광주는 땅이 넓은 고을이라는 데서 한자로 ‘넓을 광(廣)’을 썼다고 한다. 고려 성종(成宗) 2년(938)에 처음으로 12주에 목(牧)을 두었을 때 그 중 하나로 이곳은 광주목(廣州牧)이 되었고, 이후 3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광주목은 존속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후, 세조(世祖) 때 이곳 광주에 진을 설치하여 광주목 소속 진영으로 목(牧)이 하나로 여주(驪州)가 있었고, 도호부(都護俯)도 하나로서 이천(利天)이 있었다. 또한 군(郡)은 하나로 양근(陽根)이 있었고, 현(縣)으로는 음죽(陰竹)·과천(果川)등 5개가 있었다.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이 고을 사람으로 난언(亂言)을 한 자가 있었으므로 본주(本州)를 혁파했다가 중종(中宗) 초에 복구했었고, 동왕 6년(1511)에 이 고을이 조폐(凋弊)했으므로 판관(判官)까지 혁파하였다. 그 뒤 50여 년이 지난 뒤 명종(明宗) 14년(1559)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고, 선조(宣祖)6년(1573)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고, 선조10년(1577)에 부로 승격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도록 하였다.

 

인조(仁祖) 원년(1623)에는 유수제(留守制)를 실시하였으며, 인조 4년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고 주치(州治)를 성내로 옮겼고, 동왕 8년(1630)에는 다시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비롯한 국난을 만날 때마다 남한산성은 국왕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영조(英祖) 26년(1750) 유수로 승격되어 수어사를 겸했다가 동왕 35년에 다시 부윤으로 되었다.

 

영조 36년에 편찬된 『여지도서(餘地圖書)』에 의하면 이 고을은 광주부절제사(廣州俯節制使) 진관(鎭管)으로, 소속 읍으로는 여주·이천·양근·지평(砥平)·음죽·양지(陽智)·죽산(竹山)·과천이 있었고, 토포소 속읍으로는 양주(楊州)·영평(永平)·포천(抱川)·가평(伽平)·양근·과천·금천이 있었으며, 영장 소속 읍으로는 이천·용인(龍仁)이 있었다. 당시 소속 면으로는 경안도(慶安道) 찰방역(察訪驛)을 두었던 경안면을 비롯하여 오포면·도척면·실촌면·초월면·퇴촌면·초부면·동부면·서부면·구천면·중대면·세촌면·돌마면·낙생면·대왕면·언주면·왕륜면·일용면·월곡면·북방면·송동면·성곶면 등 23개 면이 있었다.

 

그 뒤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高宗) 32년(1895)에 월곡면·북방면·성곶면의 3면은 안산군에 넘겨주고, 광무(光武) 10년(1906)10월 1일 군이 되어 한성부(漢城府) 관할이 되었다. 1910년 중부면을 설치하고,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 두었으며, 1911년에는 대왕면을 설치하였다. 이제 현재의 강동구에 해당하는 광주부의 구천면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초기 기록인『세종실록』지리지나『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목 전체를 포괄하여 항목별로 서술하고 있어 구천면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안다.

 

그런데, 영조 35년(1759)의 호구장적을 보면 광주부의 행정구역은 23개면 113개리로 구획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구천면에는 일동·고다지동·명일원리·암사동·곡교리·기리동·둔촌동·성내동 등 8개리가 있었다.

 

다음 30년 후인 정조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에 보면 광주부는 2개면이 수원부에 편입되어 21개면으로 축소되었으나, 구천면은 곡교동·성내동·기리동·둔촌동·일동내·고다지동·암사동·명일원리 등 8개 마을로 되어 있어 30년전과 비교하여 거의 변화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조선후기 광주는 계속해서 행정구역 상의 변화가 있었으나, 구천면 지역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1914년 전국 행정구역이 통폐합될 때 광주군은 16개면 183개리로 개편 관할하게 되는데, 이때 구천면에는 암사리·고덕리·상일리·하일리·명일리·길리·둔촌리·풍납리·성내리·곡교리 등 10개리로 구획되었다.

 

다음 조선시대 광주군과 구천면 지역의 인구에 대해 살펴보자.『세종실록지리지』작성시 광주군의 인구는 호(互)1,436 구(口) 3,110이다. 이 숫자는 정군(正軍)과 봉족(奉足)을 합한 수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 이후에 영조35년(1759)의 기묘장적의 통계를 보면 호 11,713 구 54,709(남:23,398 여:31,311)이었다. 그 후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장적 통계에 의하면 광주는 호 10,568 구 50,508(남:24,402 여:26,106)으로 영조 35년 보다 감소되고 있다. 또한 헌종(憲宗) 2년(1836) 병신장적에는 호 10,492 구 50,045(남:22,751 여:27,294)였었다.

 

강동구와 도자기

 

조선시대에 있어서 어기(御器) 공급을 위한 관영 사기제조장, 즉 사옹원(司饔院)의 사기제조소를 분원(分院)이라 했는데, 이 분원은 경기도 광주군에 설치했다가 분주원으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사옹원의 사기제조소, 곧 분원이 처음 설치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흔희 분원사기라 불리는 도자기는 광주분원에서 만든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은 도자기공예 면에서 청화백자가 손꼽힌다. 이 청화백자는 조선초기부터 제조되기 시작하였으며, 후기에 들어오면 희청을 풍부히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개량으로 생산되고, 그 전에 비해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청화는 전대의 것과는 달리 색깔이 검푸르고 조야하여 칙칙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또 기형도 둔탁해지지만 그 대신 순박하고 서민적인 취향이 증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후기의 도자기 제조의 본거지였던 분원은 고종 19년(1882)부터 관영에서 민영으로 바뀌게 되었고, 머지않아 그 기능을 읽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광주자기가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관의 직속으로 번조되었던 관요들 중 그 제작 소재지가 분명희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광주가마 뿐이다. 광주분원이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 그 절대연대를 아 수 없으나, 대체로 고려말 조선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정설로 일반화된 것 같다. 광주분원 설치에 대하여 조선 초 조준이 사옹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성현의『용재총화』에서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확신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15세기경에 이미 광주지방으로 옮겨왔던 조선의 관영사기 제조장이 언제부터 사옹원 분원이란 명칭으로 불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인조 초년 즉 17세기 초엽에는 이미 분원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생각건대, 관영사기제조장은 그 설치 당초부터 사옹원에서 관장하였으며, 제조장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궁중에서의 사기 수요량이 증가됨에 따라 제조작업 자체가 중시됨으로써 직접 현지에서 제조작업을 관할하는 관청이 별설(別設)되었고 이를 사옹원 분원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강동구와 실학서학

 

조선후기 광주지역은 실학과 서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그동안 조선을 지배하던 주자학에 대신하여 현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지리·정치·경제 등을 연구하는 실학운동이 일어나고, 이것은 마침내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는 서학운동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한강유역, 특히 광주지방에 살던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현재 강동구 지역도 광주지역에서 발원하였던 실학과 서학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실학운동의 선구자는 지봉 이수광이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348종의 도서를 읽고, 그것을 분야별로 발췌하여 1614년에 20권의『지봉유설』이라는 백과서를 편찬했는데, 그 속에 마테오리치가 지은『만국여도』·『천주실의』등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즉,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중국 이외에 서양에 여러나라가 있고 그들 나라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서 그 이전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이수광이 일으킨 실학운동 가운데, 특히 천주교 연구운동은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한강유역인 광주부 안산 점성촌에 숨어살던 남인학자 이익과 그 문하생 가운데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즉, 이들도 대부분이 한강유역에 살고 있던 남인학자들이었는데, 그 중심인물은 양근에 살던 권철신, 정약전 등은 정조 원년(1777) 겨울 광주와 여주의 접경지대인 앵자산 주어사에서 김원성, 권상혁(권일신의 아들), 이총억과 더불어 교리연구회를 열고, 권철신의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일으켰는데. 이 소식을 듣고 권철신의 매부이던 이벽도 이 모임에 참가했다. 광주의 이러한 모임이 한국천주교회사, 나아가서 한국의 신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권철신 등이 교리연구회를 열었는데, 그 동안에 천주교의 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즉 천주교의 교리와 재래습속과의 불일치, 천주교 사회와 그 사회와의 모순 등이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명하기 위하여 교리 연구회원을 북경에 보내기로 하였는데, 여기에 뽑힌 사람이 27세의 청년 이승훈이었다.

 

정약전의 매부이자 교리연구회원이던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참된 신자가 된 이승훈은 수십권의 천주교 서적과 성서, 성물 등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귀국한 즉시 그것들을 이벽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벽은 곧 은밀한 곳에서 그 책들을 연구하여 천주교의 진리와 미신에 대한 반증과 칠성사의 설명과 복음의 해설과 매월의 성인전 및 기도문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전도사업에 나섰다. 그러므로 이승훈은 이벽에게‘요한세자’라는 교명으로 대세를 주고, 두 사람은 양근으로 가서 권일신 형제에게‘프랑시스코 사비에르’라는 교명으로 대세를 주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인물이었다.

 

이리하여 정약전 삼형제를 비롯한 양반계급으로부터 학식이 높은 중국어역관 김범우, 최인길 등과 같은 중인계급과 충청도 내포지방의 상민 이서원과 전라도 전주의 양반 유항검 등도 입교시켜 이미 수십 명의 영세신자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부자, 이벽 등은 정조 8년(1784)서울 남부 명예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 대청에 모여 이벽을 지도자(가신부)로 삼아, 주일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조선교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벽은 머리에 청건을 덮어 써서 어깨까지 내리고, 벽을 등지고 앉아서 설법하여, 그 앞에 이승훈 등은 모두 제자로 자처하니 그야말로 외국의 힘이 아닌 한민족 자신의 힘으로 새사상을 정착시킨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광주출신 이벽의 노력이 매우 컸다.

 

한강변(漢江邊) 상업의 발달과 강동구

 

한강유역은 고대로부터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왔으며, 특히 삼국시대에는 3국간의 쟁패대상이 되었던 요지였다. 그 후 이곳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고, 한양이 정치·경제 등 모든 면에 있어 중심지 역할을 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강에는 교량설비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진(津)·도(渡)·제(濟) 등 나루터가 발달하였다. 경강(硬鋼)에 설치되었던 나루터는 대략 광진(廣津), 즉 광나루에서 시작하여 양화도를 지나는 한강의 하류 쪽에 위치해있었다. 광진·삼전도·서빙고·흑석진·동작진·한강도·노량도·두모포·마포·서강·양화도·사천·조강도 등이 그 중요한 곳이었다.

 

한강은 이처럼 교통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진도(津渡)로서의 통행도 전담해 주었지만, 또 한편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곡(稅穀)을 비롯하여 서울 도민들의 생활필수품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즉, 전국의 세곡이 조운(漕運)을 통해 집결되는 곳이 바로 한강이었고,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층이 지방에 소유하고 있는 농장에서 수취도니 소작료 역시 선박을 통해 이곳으로 운반되었다. 서울 도임들의 일상생활용품, 예를 들어 미곡(米穀)·시목(柴木)·어염(魚鹽)·광물건축용 목재 등도 또한 이곳을 통해서 공급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찍부터 물화(物貨)의 집산(集散)이 활발했으므로 경강변에는 이미 조선전기부터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어 여러 형태와 규모를 지닌 상업을 영위해 갔던 것이니, 특히 이들은 사선을 이용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운수업과 선상업 등에 종사하면서 자본을 축척하여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강변에는 일직부터 마포·서강·용산·두모포·뚝섬 등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중요한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광나루[廣津]

 

광나루는 광주부 북쪽, 20리 광장동 광진교 부근에 있었다. 광나루는 강동구 지역을 거쳐 광주와 연결되고 뱃길로 멀리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향하는 요충의 도선장이었다. 또한 광나루는 강원도 쪽에서 내려온 뗏목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마포나루터로 옮겨지곤 하여, 목재의 집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광나루에서는 1920년대에 발동선으로 나룻배를 끌어줌으로써 화물차나 버스도 건네주었고, 1930년대를 전후해서는 교통량이 격중해 강을 건너는 자동차·우마차·손수레 등이 하루에도 수백대에 달하게 되었다. 1936년 경기도에서 이 지점에 광진교를 설치하였고, 이에 따라 광나루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두모포[豆毛捕]·뚝섬

 

두모포는 원래 동빙고(凍氷庫)가 있었으나, 연산군(燕山君) 때에 서빙고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빙고가 옮겨가기 전부터 이곳은 포구였으며, 조선중기 이후는 뚝섬과 더불어 한강 상류지방에서 오는 각종 물자, 즉 고추·마늘·서류 등 전곡과 목재·시탄(柴炭)의 집산지가 되는데, 특히 시탄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두모포의 동부인 입석포 동편에는 중랑천·청계천이 한강과 합류하여 항상 수량이 풍부했을 뿐아니라, 옛날에는 두모포 앞에 저자도라는 큰 모래섬이 있어 방풍도 되고 유속도 조절해주어 두모포는 포구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니, 한강상류를 왕래하는 강상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뚝섬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서울에서 충북지방과 경상도로 가는 길에는

 

① 한강교를 거쳐 판교→용인→충주로 가는길과

② 살곶이다리를 건너 뚝섬→송파→판교→용인→충주로 가는 두 길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루로서의 비중으로 볼 때, 뚝섬은 두모포보다 우위에 있었고, 강상(江商)들의 근거지가 될만한 충분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뚝섬나루는 그 배후에 살곶이들이라는 넓은 저지가 있었을 뿐, 기댈 수 있는 구릉이 없어 홍수를 만나면 포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커다란 결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의 송파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서편의 두모포만큼도 은성(殷盛)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장기보관을 하지 않아도 되어 홍수의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시목이나 숯은 뚝섬에서 많이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송파[送波]·삼전도[三田渡]

 

송파와 삼전도 일대는 용산이나 서강·마포 등지보다 서울에서의 거리도 멀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성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즉, 송파는 용산이나 서강과는 달리 같은 강변취락이긴 했으나, 육로로 외방에서 들어오는 각종 물자도 합쳐져서 일찍부터 규모가 큰 독자적인 상설장시가 섰다는 점에 특색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육로수송이 곤란했기 때문에 한강상류에도 조창이 있어 경상도 북부와 충북 일대의 세곡을 보관하던 충주의 가흥창을 비롯하여 원주에 흥원창, 춘주에 소양강창 등이 있어 세곡운반을 위해 일찍부터 강상선의 운행이 잦았으며, 또한 북한강 상류에 낭천·춘천·가평 등의 강항이 있었고, 남한강 상류에도 정선·평창·영월·단양·충주·여주 등의 강항이 있어, 각 지방의 산물이 서울 수송과 서울에서 상류로의 어염·미곡·면포·비단 기타 각종 잡화류의 수송과 판매 때문에 경강상인과 각 강항에 위치한 여각·객주들과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한강상류 강항들과의 거래에 있어 그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바로 송파의 상인들이었으니, 그것은 송파가 지닌 지리적 여건이 두모포나 뚝섬 등 다른 강촌들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곳은 광주군에 속해 있어 금난전의 권외(圈外)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만기요람』재용편에 의하면 안성읍내장, 은진강경장, 덕원원산장 등과 함께 전국 15대 장시 중의 하나로 송파장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송파장은 이름이 장시였을 뿐 실제상으로는 다른 장시들처럼 5일장이 아닌 상설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성중(城中)의 사상들과 결탁하여 삼남지방과 동북지방에서 오는 상인을 유인하고 그 상품을 매점하는 등 대규모의 도고상업을 전개하였으므로 성내의 시전상인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시전상인들의 항의가 잇달아 송파장시가 물의의 대상이 되자 평시서제조는 도성 내 시전상인들의 이익을 옹호하여 그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현지수령인 광주유수는 그 폐지를 반대하여 논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폐지하지 않기로 결정 되었다. 그러므로 송파의 상설화된 장시는 계속 번창하였고, 이후 사상도고들의 근거지가 되어 착실히 성장해 갔던 것이다.

 

이상에서 광나루, 두모포·뚝섬, 송파·삼전도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이 밖에도 현재 강동구 고덕동에서 토평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1970년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나루 이외에 강동구에 여향을 끼쳤던 나루는 상류부터 당정나루, 덕소나루, 미음나루, 토막나루, 참앞나루 등이 있었다.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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