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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의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에 대한 재검토

작성자안재중|작성시간11.02.16|조회수456 목록 댓글 0
출처 : 첨부파일 이이의 십만양병론에 대한 재검토[1].hwp

 

율곡제 학술논문공모 논문

이이(李珥)의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에 대한 재검토

2002. 10. 6

이기남(李綺南, 연세대 박사과정)

 

1. 서론(緖論)

2.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

3. 양병론(養兵論)에 대한 기존(旣存)의 비판(批判)

4. 이이(李珥)의 국방론(國防論)

5. 양병론(養兵論)의 근거(根據)에 대한 검토(檢討)

6. 결론(結論)

 

1. 서론(緖論)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정치가이자 경세가(經世家)이고 학자(學者)로 활약한 조선(朝鮮) 선조(宣祖)때의 문신(文臣)이다. 그는 당쟁(黨爭)의 와중(渦中)에서 조신(朝臣)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조정(朝廷)은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어 조선 후기(朝鮮後期) 내내 대립되었다. 이때 이이(李珥)는 서인(西人)에 우인(友人)들이 많았을 뿐더러 그가 서인(西人)으로 자정(自定)한 것으로 알려진 뒤 그 문도(門徒)들이 모두 서인에 가담했기 때문에 서인의 종장(宗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을 통해 서인 학파(學脈)의 정점에 위치하게 되었다.[金相五「黨爭史의 입장에서 본 李珥의 文廟從祀」『全北史學』4집 (1980), 정만조「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한국사』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참조] 학문적으로는 주기(主氣)의 입장에 서서 이황(李滉)과 더불어 주자학(朱子學)을 한국적 성리학(性理學)으로 완성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裵宗鎬,『韓國儒學史』연세대출판부(1981), 崔完秀,「秋史書派考」『澗松文華』17.(1980), 李丙燾,『韓國儒學史』아세아문화사(1987)] 또한 이이(李珥)는 당시 피폐했던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경제(經濟), 법제(法制), 군사(軍事)등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경세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활약으로 이이(李珥)에 대한 연구성과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연구성과의 정리는 1999년 기준이며, 황의동「율곡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오늘의 동양사상』6.예문동양사상 연구원 (2002봄) 참조, 이이에 관한 연구논저목록은 황의동『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2 경세사상편 서광사 (1998) 부록을 참조할 것] 1920년대부터 성리학과 경세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더욱이 1976년 율곡사상연구원이 설립되고 1988년 『율곡학』창간호가 나오면서 이이(李珥)에 대한 학문적 고찰을 종합적으로 율곡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이(李珥)가 성리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이이에 대한 연구성과는 퇴계에 비하면 미약한 편이다.[한국역사연구회「조선시대 유학사상연구」『역사와 현실』7 (1992), 지두환「조선전기 사상사 연구동향」『한국사론』24.회고와 전망Ⅱ 국사편찬위원회(1994)]

 

그런데 그중, 학문적 연구성과에 의해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이(李珥)가 선조(宣祖)에게 건의했다는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이다. 이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집(文集) 안에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외란(外亂)을 예견할 수 있었던 율곡(栗谷)의 탁월한 재지를 드러내고, 한편으로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경계하기 위한 자료의 성격으로 자주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고 새롭게 해석됨에 따라 이와 관계깊은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許善道,「壬辰倭亂論」『千寬宇先生還曆記念論叢』(1985)]

 

즉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인가, 또 이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양병(養兵)이 가능했을 것인가 하는 두 가지가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현재 십만양병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몇 편 정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기존의 논고들은 대개 유성룡 측에 서서 이 문제에 접근하여 ‘서인(西人) 이이(李珥)와 동인(東人) 유성룡(柳成龍)’ 하는 식으로 그 초점을 당파적 성격으로 스스로 제한하여 진정한 사실확인(史實確認)이라는 본지를 흐리게 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당파적 입장을 떠나 객관적 위치에서 살펴야만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 두 가지 문제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황준연,『율곡철학의 이해』서광사.(1995) pp.243~250에는 율곡의 경세사상을 살피는 가운데 이 문제에 관해 이재호교수의 논문을 비판하고 십만양병론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간략하게 들어가 있다.]

 

2.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10만양병론(十萬養兵論)

 

조선(朝鮮), 일본(日本), 명(明) 등 동양 3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대변동을 가져왔던 국제전쟁인 임진와란(壬辰倭亂)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어왔으나 일반적으로는 조선(朝鮮)의 일방적 패배로만 인식되어왔던 것을 허선도(許善道) 교수(敎授)가 문제제기를 통하여 조선(朝鮮) 측(側)의 패배가 아님을 논증한 바 있다.[許善道, 앞 논문] 이를 통하여 허선도(許善道) 교수는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한 전쟁사적(戰爭史的) 이해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덧붙여 이이(李珥)가 주장한 십만양병론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즉 왜란이 일어나기 전 평화가 계속되었던 시기에 제정(財政)이 부족한데도 양민(養民)이 아닌 양병(養兵)을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 하고 조선초기부터 우리의 국방상대(國防相對)는 왜(倭)가 아닌 북방(北方) 유목민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에서 이이(李珥)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이처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양병론을 비판한 논자는 몇몇이 있다. 그중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논리를 전개한 이는 이재호(李載浩) 교수이다.[許善道, 앞 논문 주50)(p.571)에 의하면, 李家源,『韓國漢文學思潮硏究』1961.;「退陶弟子列傳 5 西厓柳成龍」『退溪學報』5․6合 1975., 柳時秀,『十萬養兵論批判聲明』1984. 李載浩,「宣祖修正實錄記事의 疑點에 대한 辨析-특히 李栗谷의 十萬養兵論과 柳西厓의 養兵不可論에 대하여-」『大東文化硏究』19. 1985.등이 있다.] 이재호(李載浩) 교수는 여러가지 증거를 들어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 자체가 허구(虛構)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 학술지는 아니지만 한 시사 월간지를 통해 배병삼(裵柄三)은 십만양병론이 근거가 부족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그 사실성을 부정하였다.[裵柄三「철인정치가 율곡이이」『시사월간지 윈(WIN)』11월호 중앙일보사(1995)에서는 이이를 소개하면서 십만양병설에 관해, 율곡의 직접 기록을 찾을 수 없고 당시 재정 형편으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율곡이 무모한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여 십만양병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 우선 율곡 십만양병론의 전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은 율곡이 주장했다는 말인데도 문집(文集)에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이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문인(門人)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찬술(撰述)한 「율곡행장(栗谷行狀)」이고, 뒤이어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찬(撰)한 「율곡시장(栗谷諡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찬한 「율곡신도비명(栗谷神道碑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편찬(編纂)한 「율곡연보(栗谷年譜)」에 각각 나타난다. 또 이들을 근거로 하여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안방준(安邦俊)의『우산집(牛山集)』에도 나타난다.[『栗谷全書』 民族文化推進會刊. 『宣祖修正實錄』권16, 15年 9月朔 丙辰. 『增補文獻備考』권109, 兵考一, 制置一 宣祖 27年條. 安邦俊,『牛山集』권6,「壬辰記事」]

 

이말이 율곡 자신의 글이 아닌 행장과 시장에 처음 나타난다는 사실은 ‘십만양병론 허구설’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하면 율곡이 대군 육성(大軍育成)을 주장하였을 정도라면 그 중요성으로 보아 경연일기(經筵日記)나 만언봉사(萬言封事) 등 문집 자체에 이 말이 나타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한 내용이 없고 오직 율곡 사후 그 제자인 김장생이 찬술한 율곡행장에만 나타나 있다는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여타의 사료(史料)는 모두 다 이 행장을 원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사료들의 편찬년대는, 율곡행장이 율곡 서거 13년 후인 선조 30년(1597), 율곡시장이 광해군4년(1612)이고, 신도비명은 확실치 않으나 내용으로 미루어 행장 찬술 후 이항복의 귀양지에서인 1618년으로 추정된다.[행장, 시장의 찬술연대는 이재호의 앞 논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이항복의 신도비명 찬술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원주의 논고에 의하면 월사 이정구가 만력 임자(1614)에 율곡선생행장을 찬했고 이것이 율곡선생문집 초간본 권10에 실려있다고 하였다. 이원주는 월사가 사계 김장생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월사가 사계의 초고를 바탕으로 여러번 고쳐 행장을 지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영조20년 刊 율곡전서에는 월사의 행장이 시장으로 바뀌고 월사집에도 시장으로 표기되고 행장은 사계에 의해 찬술된 것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신도비명은 백사 이항복이 귀양 간 직후에 지어졌으므로 찬술연대는 1618년이라 하였다. 율곡선생문집 초간본은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다. 李源周「栗谷先生神道碑銘과 그 刪改事實에 對하여」『韓國學論集』15 계명대(1988)] 년보는 송시열의 것이므로 후대의 것이다. 이는 십만양병론을 직접 전하고 있는 이들 사료가 모두 행장의 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번은 경연에서 “미리 군대 십만명을 양성하여 급한일이 있을때에 대비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못가서 흙이 무너지듯 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정승 유성룡이 말하기를 “일이 없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화근을 만드는 것이다.”하였다. 이 당시는 난리가 없은지 오래되어 안일한 것만 좋아하여서 경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씀을 잘못이라‘하였다. 선생은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국세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놓은 것 같은데 시속선비는 시무(時務)를 모르니 다른사람이야 진실로 기대할 것이 없거니와, 당신도 또한 이런 말을 하는가.”하였다.

 

임진왜란이 난 뒤에 유정승이 조정에서 언젠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와서 보면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하였으면 나라일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또 그가 전후에 계획한 정책을 혹자들은 비난하였지만 지금 모두 꼭꼭 들어맞으니 참으로 따라갈 수 없다.[『국역 율곡전서』Ⅶ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8) 권35 부록 3 행장 p.213. 嘗於筵中 請豫養十萬兵 以備緩急 否則不出十年 將有土崩之禍 柳相成龍 以爲無事而養兵 養禍也 時久安염嬉 筵臺之臣皆以先生言爲過 先生出謂成龍曰國勢危如累卵 而俗儒不達時務 他人卽固無望 君亦爲此言也 逮壬辰之後 柳相於朝 嘗語人曰 到今見之 李文成眞聖人也 若用其言卽 國事豈至於此乎 「行狀」 栗谷全書 Ⅱ.권35. 附錄3 金長生撰.(民族文化推進會刊)]

다른 것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나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입대하여, 미리 십만의 군사를 양성하였다가 불의의 변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10년이 못가서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도성에 2만명을 배치하고 각도에 1만명씩 배치하여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명을 합쳐서 파수하게 하여 위급할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이와같이 하지 아니하면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이 일어날 경우 시민(市民)을 몰아 전투하게 됨을 면치 못하여 결국대사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하였다.

 

유공 성룡이 불가하다고 말하면서 아뢰기를 “무사할 때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화단을 양성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연신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하여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물러나와 유공에게 말하기를 “속유(俗儒)들이야 진실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거니와 공도 또한 그런 말을 하는가.”하고서 이어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 있었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유공이 조당에서 탄식하기를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이다.”하였다.[國譯 栗谷全書』Ⅶ (1988) 권34 부록2 연보 下 pp.109~110. 계미 11년 4월 癸未 四月 入對請豫養十萬兵 先生於經筵啓曰 國勢之不振極矣 不出十年當有土崩之禍 願豫養十萬兵 都城二萬 各道一萬 復戶練才 使之分六朔 遞守都城 而聞變則合十萬把守 以爲緩急之備 否則一朝變起 不免驅市民以戰 大事去矣 柳公成龍以爲不可曰 無事而養兵是養禍也 筵臣皆以先生言爲過慮 遂不行 先生退謂柳公曰 俗儒固不達時宜 而公亦有是言也 仍愁然久之 壬辰亂作 柳公於朝堂歎曰 李文成眞聖人也 「年譜」下 癸未4月條. 栗谷全書권34. 附錄2 宋時烈撰.(民推刊)]

 

라고 하여 구체적 방법과 함께 癸未年(선조 16, 1583) 4월 이라고 그 시기가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에는 같은 내용의 기사가 壬午年(선조15, 1582) 9월에 나와있어 시기의 차이를 보인다.[宣祖修正實錄』권16. 15년 9월 丙辰條.]

이상에서 다시 율곡의 양병론을 요약한다면,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년 쯤 전 경연석상에서 10만의 병력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10년내에 대환란이 닥쳐도 방비할 길이 없을 것이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유성룡이 양병을 반대하여 그 계획이 중지되었다는 것이다.

 

3. 양병론에 대한 기존의 비판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이(李珥)의 십만양병론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첫째 과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가. 둘째 그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당시의 국력으로 그러한 대병을 양성하는 것이 실제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일찍부터 율곡의 양병론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여기서는 그중 가장 체계적이고 직접적으로 율곡의 양병론을 비판한 이재호(李載浩) 교수의 론지를 인용해서 그 내용을 살펴본다.[李載浩 「宣祖修正實錄 記事의 疑點에 對한 辨析-특히 이율곡의 십만양병론과 서애 유성룡의 양병불가론에 대하여」『大東文化硏究』1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85) 이글은 『韓國史의 批正』(1985)에 다시 전재되어 있다.]

 

이재호 교수는 우선 십만양병론 자체도 사실이 아니거니와 그것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가장 앞장서서 국난극복에 노력했던 유성룡이 애매한 폄하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예로 이병도(李丙燾) 저(著)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과 진단학회 『한국사(韓國史)』 「근세전기편(近世前期篇)」에서, 이이(李珥)가 십만양병(十萬養兵)을 주장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반대해서 무산(霧散)되었고 왜란(倭亂) 후에야 유성룡이 이이(李珥)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감탄했다[李丙燾,『韓國史大觀』「倭人의 動態와 壬辰.丁酉의 倭亂」, 震檀學會,『韓國史』近世前期篇.「倭亂과 對外關係」]는 서술을 들고있다.[이재호, 앞 논문]

 

이것은 전적으로 서인들이 이이(李珥)를 앞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성룡을 깍아내린 부회 억단(附會臆斷)이라고 한다. 그 증거로 그렇게 중요한 양병론이 선조실록이나 경연일기, 또 당시 경연에 같이 참석했던 다른 신하들의 문집, 심지어는 반대했다는 유성룡의 문집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유성룡은 당시 옥당(玉堂)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어 병판(兵判) 이이(李珥)의 주장을 반대하여 무산시킬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 사료에 의하면 난후에 유성룡이 율곡을 추모하며 ‘이문성(李文成)은 참 성인(聖人)이다’라고 했는데 율곡에게 문성공(文成公)의 시호(諡號)가 내린 것은 인조(仁祖) 2년의 일이고 유성룡이 죽은 해는 선조 40년이니 유성룡이 자기 사후에 내릴 시호를 미리 알고 호칭했다는 허구성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 선조수정실록에는 율곡이 건의했다는 시기가 년보와 一年이나 차이가 나니 사실이라면 어찌 이런 모순관계가 생기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대병력의 양성은 당시 상황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율곡이 이러한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했다하더라도 도리어 피해만 입었을 테니 김장생의 증손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이를 논한 바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김만중은 서인인데 율곡의 양병론을 논한 글에서, 계획 자체야 좋으나 당, 송이 망한 이유도 군사를 과다보유하여 국력이 고갈된 까닭이니 우리같이 작은 나라에서 그 계획대로 했더라면 민력(民力)만을 고갈시켜 민심은 이반(離反)되고 방비는 허술화되어 풍신 수길(豊臣秀吉)을 막지도 못했을 것이라 쓰고 있다.[金萬重,『西浦漫筆』下 홍인표역주 일지사 p.223.] 같은 견해를 실학자의 하나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에게서 볼 수 있으니 이익(李瀷)도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율곡의 십만양병론을 논하여, 군대를 기르는데 드는 엄청난 비용때문에 백성만 피폐(疲弊)해져서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李瀷,『星湖僿說』「人事門」預養兵條.]

 

그러나 서포(西浦)는 같은 글에서 율곡의 선견지명은 분명하다고 하고 율곡이 바로 죽는 바람에 그같은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으니 전면부정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외에도 이재호 교수는 사료의 구체적인 모순점(矛盾點)까지 지적하여 십만양병론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율곡의 십만양병론은 허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반드시 허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이 율곡을 추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된 것이라 한다면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역사적 사실 확인의 범위를 지나 지나치게 개인의 위상을 부각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듯 보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력사연구가 특정 당색 또는 가문에 영향을 받을 우려가 없지 않다. 실제로 문중이 중심이 되어 방송중인 사극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소송을 벌이거나 사후의 현창문제로 소송을 벌이는 경우를 간혹 보게된다. 조선시대가 역사가 아닌 우리 생활 속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십만양병론의 타당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4. 이이(李珥)의 국방개혁론

 

이이(李珥)의 양병주장은 그의 개혁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먼저 율곡 이이가 가지고 있는 군제, 국방에 관한 개혁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이가 이황 등 동시대의 다른 성리학자들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개혁사상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교의 본령에 입각하여 관직진출을 희망한 이이의 관심은 경세(經世)에 있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국방문제 등 국정의 전 분야에 걸쳐 개혁 즉 경장(更張)을 계획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가 자신이 살고있던 조선조 중엽시기를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李先敏「李珥의 更張論」『韓國史論』18 서울대 (1988)참조]

 

이이(李珥)가 볼 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하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과 병폐를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동인이 군자(君子)의 이름을 얻고 서인이 소인(小人)으로 낙인찍힌다 해서 그것이 피폐한 민생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비난한 것은 이이의 시국관을 잘 나타낸다 하겠다.[『국역 율곡전서』Ⅱ(정신문화연구원) 권7 疎箚5 p.253사대사간 겸진 세척동서소[『국역 율곡전서』Ⅱ(정신문화연구원) 권7 疎箚5 p.253 사대사간 겸진 세척동서소] 그는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비롯 각종 소차와 계를 통해 끊임없이 시폐 개혁을 주장하는데 개혁의 방도는 다름 아니 변통론(變通論)이다. 변통이란 제도를 현실상황에 맞게 시의에 맞게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이(李珥)의 개혁주장중 주요한 것은 궁부일체론(宮府一體論), 용관혁파론(冗官革罷論), 외임중시론(外任重視論), 관직구임론(官職久任論), 군주성학론(君主聖學論), 천거제론(薦擧制論), 공납제 개혁론(貢納制改革論), 군정개혁론(軍政改革論) 등이다.[이하의 서술은 李先敏「李珥의 更張論」『韓國史論』18 ① 李丙燾『栗谷의 生涯와 思想』(瑞文文庫) ② 이종호『율곡』인간과 사상』지식산업사 (1994) ③ 황준연『율곡철학의 이해』서광사 (1995) ④ 황의동『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2.경세편(서광사) 에 의거함.] 이중 당시의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인식했던 것은 공납제개혁과 군정개혁이었다.

 

이이는 백성의 곤궁함이 대체로 공물(貢物)의 과도한 부담 때문이니 공안(貢案)을 개정함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주장하였다. 선조 2년의 동호문답(東湖問答)과 선조7년 만언봉사(萬言封事), 동 15년 진시폐소(陳時弊疎), 16년 진시사소(陳時事疎), 16년 육조계(六條啓)에서 모두 공안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공안은 연산군 대에 대폭 증가하여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므로 이를 연산군 이전으로 되돌리고 해주에서 사용하는 수미법(收米法)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선조는 공납제 뿐만 아니라 이이의 개혁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정개혁 역시 군적을 재작성하고 방군수포(放軍收布)를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병조판서로 있을 당시에도 북쪽의 여진이 침입하는 등 변방의 방비가 급선무 였으므로 소차를 통해 상세한 운영책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 이이의 군정개혁은 군을 운용하는 전략적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병농일치제 하에서 국방력을 튼튼히 하는 제일의 요소는 양민(養民)이다. 따라서 군정과 관련한 이이의 개혁안에는 양군민(養軍民) 족재용(足財用)이 항상 같이 나오는 것이다. 양병은 양민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이 이이의 지론이다.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므로 백성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교화라 하는 것이다. 당시의 궁핍한 상황을 이이는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국역 율곡전서』Ⅱ(정신문화연구원) 권7 疎箚5 진시사소 p.299]

 

폐정이 날로 백성에게 가해지고 있으니......근심에 젖은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면서 호소해도 위에 들리지 않으니 외적의 침입이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위태로운 상황인데 하물며 지금 북방의 호족이 우리와 틈이 벌어져 병화가 연결되었음에랴.

 

이미 율곡은 선조7년(1574)에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국방책과 현행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상세히 지적하여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자신의 말대로 시험삼아 시행해보되 3년이 지나도 나아지는 점이 없으면 스스로 벌을 받겠다고 할 정도로 군제의 부패상은 만연되어 있었던 것이다.[『국역 율곡전서』Ⅱ(정신문화연구원) 권5 疎箚3 만언봉사 pp.149~192]

 

그런데 이이는 육군(陸軍)만이 아니고 수군(水軍)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자연 왜(倭)에 대한 방비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국역 율곡전서』Ⅳ(정신문화연구원) 拾遺 권4 잡저 군정책 pp.372~373]

 

지금 방어의 가장 요긴한 것은 바다에 면한 삼면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바다를 면하여 진을 벌이고 진에는 배가 있고 배에는 군인이 있어 뜻밖의 일을 방비하는 것이 가히 지극하다 이를만 한데 이제 수군의 명부만 있고 실상이 없는즉 배는 있되 군인이 없음이 괴이할 것이 없다. ...군액을 삭감하면 왜적(倭賊)이 침입해 왔을 때 방어하고 수비할 수 없을 것이다.

 

병조판서가 되어 진달한 시무6조계에는 이러한 이이(李珥)의 국방론(國防論)이 축약되어 있다. 이처럼 군정개혁의 일관성있는 의지를 가지고 육조계를 올린 다음달의 경연에서 십만양병을 거론하게 되는 것이다.

 

5. 양병론(養兵論)의 근거(根據)에 대한 검토(檢討)

 

1) 문헌검토

 

이이(李珥)의 양병론은 입증할만한 객관적 근거가 명료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십만양병론을 전하는 최초의 사료가 제자인 김장생이 찬술한 행장이고보니 이 부분의 사료가치를 인정하는가 여부가 논란의 관건이다.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학문적 적통을 이은 학자로서, 그의 행장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사계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율곡의 선견지명을 강조하기 위해 거짓으로 편찬하였다는 뜻이다. 과연 그랬는지 들은 바를 정확히 서술하였는지는 정말 알 수 없다. 그런데 행장의 찬술연대는 선조 30년으로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데 당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상당히 심각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경우 그의 문집 초간본인 강릉본의 위작여부에 대해 일각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현재 민족문화추진회 刊 『백사집(白沙集)』은 초간본인 강릉본이 확실하다.[白沙集』韓國文集叢刊 62 (민족문화추진회) 범례, 辛承云「白沙集解題」『韓國文集叢刊 解題』2 참조] 재간본은 경인문화사에서 간행되었고 이 경인문화사 刊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을 보면 장유(張維)의 발문이 있어 신속하게 재간된 사연이 들어있다. 그런데 『백사선생집』에는 두 종류의 율곡선생 신도비명이 실려있다. 즉 이항복이 직접 쓴 초고(草稿)와 이항복 사후 율곡 문인들에 의해 수정되어 율곡전서에 게재된 산개본(刪改本)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백사선생집』권17 경인문화사, 이원주, 앞의 논문 참조] 백사가 쓴 율곡신도비명이 수정된 이유는 율곡을 높이기 위해 쓴 백사의 문체가 오히려 노장이나 선학으로 오인될 염려가 있어서 였다고 한다.[이원주, 앞의 논문] 초고본에도 역시 십만양병론에 관한 내용은 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파견했던 통신사의 보고에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부사인 김성일이 각기 상반된 보고를 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그런데 함께 파견된 서장관 허성은 당색은 김성일과 같은 동인이었지만 황윤길의 견해에 동조하여 풍신 수길의 침략을 예상하는 보고를 올린 바 있다. 또 동생인 허균은 그의 문집에서 이이의 공안개정론과 양병론을 거론하고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칭찬하였는데 그가 바로 계미년에 이이를 무함하다 유배된 허봉의 동생이라는 점으로 보아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인다.[허균 『국역 성소부부고』Ⅱ민족문화추진회 권11 문부 p.185]

 

이로 미루어 보면 서인과 남인의 당색 때문에 율곡의 예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 했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직접사료가 없으므로 우선 확인 가능한 사실을 밝힌 후에 정황을 종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관계사료에서 ‘이문성(李文成)’이라 표현된 부분과 당시 상황에서 10만 정도의 병력양성이 가능했는가 하는 점을 밝혀보려 한다.

 

우선 유성룡 사후에 내려진 율곡에 대한 시호(諡號)의 문제다. 율곡의 시호는 문성)文成)인데 이는 인조 2년(1624)에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유성룡이 ‘이문성진성인야(李文成眞聖人也)’라한 부분은 과연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재호 교수의 반론에도 나와 있듯이 ‘이문정진성인(李文靖眞聖人)’이 뒤에 율곡문집을 복간하는 과정에서 착오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율곡의 문집은 세번에 걸쳐 간행되었다. 초간은 광해군 3년(1611)에 문인인 박여룡(朴汝龍)이 시문을 모아 간행하였다. 이것이 원집이고 그 뒤 박세채(朴世采)가 원집에서 빠진 시문을 모아 속집8권으로하였고, 경연일기(經筵日記)를 보충하여 외집8권과 그 밖의 것을 모은 별집8권을 합하여 전라감사(全羅監使) 신익상(申翼相)이 숙종 8년(1682)에 전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두번째 간행이다. 전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어록(語錄) 등을 모두 합하여 영조25년(1749) 홍계희(洪啓禧)가 간행하였다. 그뒤에 부록을 덧붙여서 순조14년(1814)에 해주(海州)에서 번각중간하였는데 현재 널리 알려진 『율곡전서(栗谷全書)』는 바로 순조14년판이다.[栗谷全書凡例.民族文化推進會 韓國文集叢刊.] 그런데 영조25년 간행본까지는 모두 이문성(李文成)이 아닌 이문정(李文靖)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순조간본(純祖刊本)에만 이문성(李文成)으로 바뀌어 있으니 이는 원래의 표기를 의도적으로 고친 것이라기 보다는 착오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장생, 이정구, 이항복의 원문에도 이문정(李文靖)으로 표기되어 있다.[李載浩,앞논문.p.13, 국역 『율곡전서』 권35 부록3 행장 p.213 주)54 참조] 이문정(李文靖)이란 송(宋)나라때 재상 이항(李沆)의 시호(諡號)인데 앞을 내다보는 식견(識見)을 가진 사람의 예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만일 비판론자들의 주장대로 율곡을 높이기 위한 조작이라면 문집에 나오는 모든 이문정(李文靖) 기사를 다 이문성(李文成)으로 바꾸었어야 하는데 순조간본 안에서도 이항복찬 신도비명 부분에는 그대로 이문정(李文靖)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순조간본에 보이는 이문성(李文成)이라는 표기는 이문정(李文靖)을 나타내려다 율곡의 시호가 문성공이기 때문에 착각에 의해 잘못 표기된 것임이 분명하다.

 

십만양병론에 관한 최초의 자료는 김장생이 쓴 행장인데 이원주의 논고에 따르면 원래 행장은 김장생이 초고를 쓰고 그 뒤 수차례 이정구가 수정하여 율곡집 초간본에는 행장의 지은이가 이정구로 되어있다 한다. 그런데 그뒤 간행된 율곡전서에서는 이 행장이 시장으로 바뀌었으며 월사집에도 시장으로 나타나고 행장의 찬자는 김장생으로 된다고 한다.[이원주, 앞의 논문. 율곡집의 초간본은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항복은 신도비명에서 자신이 귀양가기전부터 이미 비명찬술 요청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행장을 받아 신도비명을 찬술하였으므로 행장과 시장 신도비명의 십만양병론 기록은 비슷한 것이고 정황으로 보아 오직 한 사람만 알고있던 것을 다 같이 나눠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선조실록의 기사에 양병론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록 뿐 아니라 비변사등록이나 승정원일기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전란으로 실록작성의 기초자료가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현재도 소략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또 경연석상에서 주장했다는 것이 모두 다 중요한 내용일 수는 없다. 앞서 보았듯이 이이(李珥)는 평소에 개혁에 관한 논의를 많이 주장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십만의 병력을 육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이이(李珥)는 양민에 대한 계책을 많이 진달(進達)했었기 때문에 순수한 국방의 차원에서, 허구화된 상비군제의 재편을 건의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을 때 국방의 상대는 북방 뿐 아니라 왜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이의 계차에는 분명 남과 북의 방비를 걱정하는 부분이 있다.[『국역 율곡전서』Ⅱ권5 소차3 「옥당진계차」p.145]

 

선조실록은 아니지만 왕조실록의 기사에서 십만양병론을 접할 수는 있다. 문집이 발간되기 전인 인조2년에 이귀(李貴)는 어영군(御營軍)을 창설하면서 삼번(三番)으로 나누어 조련(調練)케 할 것을 건의 한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율곡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각각 50명씩 통솔케하여 삼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직하고 조련하게 한다면 호위하는 것이 그렇게 고생스럽지도 않을 것이며 긴급시에 또한 동원할 수 있으니 이 것이 선정신 이이가 말한 십년동안 군사를 육성한다는 뜻입니다.[仁祖實錄권7. 2년 10월 壬辰.左贊成李貴上箚. 使之各領五十 分三番替直操鍊則 扈衛不至孤單而 緩急之時亦可得力 此先正臣李珥十年養兵之意]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십만양병이라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십년에 걸쳐 양병을 하자는 뜻으로 이이가 양병론을 주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조 4년에도 역시 이귀는

 

이이의 계획대로 이 군사를 도성안에 두어 위급에 대비한다면 내부가 견고하고 외부역시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仁祖實錄』권12, 4년 5월 戊申]

라 하였다.

 

효종 때도 십만양병의 내용을 볼 수 있는데 효종7년의 기사에는 왕이 민정중을 인견하여 말하는 가운데 직접 율곡의 십만양병론을 거론하여, 당시에는 모두 비웃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정 인재이다[『孝宗實錄』7년 1월 己巳]라고 말함으로써 국왕 역시 이이의 십만양병론을 사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동왕 9년에도 송준길이 입시하여 효종에게 청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십만양병론을 선견지명이라 칭하고 있음을 볼 수있다.[『孝宗實錄』권20, 9년 9월 癸卯]

 

인조, 효종의 당대에 이미 율곡의 십만양병론은 상식처럼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고 이외에 후기의 기사에서도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肅宗實錄』권11, 7년 5월 무인; 권18, 13년 9월 신축; 권39, 30년 1월 기사, 『英祖實錄』권106, 41년 10월 신미, 『正祖實錄』권8, 3년 11월 정미; 권44, 20년 3월 무진]

 

2) 사회경제적 기반

 

다음은 군액(軍額)의 문제이다. 당시의 어려운 형편에서 10만병을 양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인데 경제적 상황과 기타 여건을 살펴 추론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임진난 훨씬 뒤인 인조 5년 병판(兵判) 이정구(李廷龜)는, 선조41년 자신이 병판으로 있을때 ‘팔도의 건장자(健壯者)를 모아 각기 1결(一結)씩 복호(復戶)해서 5,6만 정도 군사는 충분히 양성할 수 있다’고 진계했으니 지금도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仁祖實錄 권16. 5년 4월 丁酉.兵判李廷龜啓.] 그렇다면 국력이 그처럼 고갈되기 전인 선조 25년 이전에 군병의 양성 역시 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또 한참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효종때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희(金益熙)는

 

생원진사와 신역이 있는자 병이 있는자를 제외하고 과거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중 25세 이상에게 각각 2필씩을 거두면 1년에 7,80만포는 충분히 거둘수 있으니 10만 병력은 능히 육성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군제와 규율을 개혁해야 할 때입니다.[󰡔增補文獻備考󰡕권110.兵考二 制置二.孝宗8年 大司成 金益熙上疏. 除生進初試及 有身役有殘疾外 不爲擧業者 年二十五以上 各收二疋布則 歲可得七八十萬疋而 十萬之兵可以養矣 養兵之具旣足則 乃可以變通軍制修明師律也]

 

라하여 10만군사 육성의 가능함을 말했다. 또 각 시대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의 군액(軍額)도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훈련도감(訓練都監)은 1,000명으로 출발했으나 계속 증가 추세였고, 어영청(御營廳)은 효종3년 당시 정군만 20,000명, 수어청(守禦廳)은 효종7년에 16,000명, 총융청(摠戎廳)은, 현종4년에 15,000명, 금위영(禁衛營)은 15,000명 등 중앙군(中央軍)만도 이정도 규모였고 속오군(束伍軍)의 경우는 인조4년 당시 86,000명이었으니 군액으로만 본다면 임진왜란 직전에 상비군이 아닌 10만병은 충분히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各 軍額은 한국사(國編) 13.閥閱政治의 成立 參照.]

 

이때 중요한 요소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과 인구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인구에 관해서는 통계가 없으므로 추정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인구는 1,000만(一千萬) 명 정도로 추정된다.[韓永愚,「朝鮮初期 戶口總數에 대하여」󰡔인구와 생활환경󰡕(1977) 1590년의 인구를 958만으로 추정. 權泰煥,愼鏞廈,「朝鮮王朝時代 人口推定에 대한 一試論」東亞文化14. (1977)에서는 1590년의 인구를 1,404만으로 추정. 한편 최근 조선시기의 인구추정에 관한 연구성과는 「조선후기의 경제」『한국사 33. 국사편찬위원회. (1997).에 간추려 소개되었다.] 게다가 주지하듯이 16세기의 농법개량과 농지개간에 따른 농업생산력 발달, 임난직후 대동법이 무리없이 실시될 수 있을 정도의 상공업 발달을 고려할 때 양병(養兵)을 추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은 충분하였을 것이다.

 

16세기의 경제변동이 무의미하다면 피폐된 상황하에서 갑작스런 군비증강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근래의 인식은 토지제도와 생산력문제를 포함한 농업, 장시와 국제무역을 중심으로한 상업, 수취제도 분야에서 나타나는 16세기의 경제적 변화가 이전 시기보다 진전된 형태이며 이시기의 변화발전이 조선후기 경제변동의 전 단계로 기능하였다는 방향으로 집약되고 있다.[金宇基『朝鮮中期戚臣政治硏究』집문당 (2001) 제2장「경제기반의 확대」에서 16세기의 경제 발전의 의미를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또 상업측면에서도 상품유통경제의 발전이 시작되어 부상대고가 출현한 시기이기도 하다.[白承哲『朝鮮後期商業史硏究』혜안 (2000) 제1장 서론] 특히 16세기 농업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상공업과 장시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에 기인한 국제교역의 증대가 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은 음미할 만 하다.[이태진,「16세기 동아시아 경제변동과 정치사회적 동향」『조선유교사회사론』지식산업사(1989)]

 

그러나 국가재정의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 선조대는 이전의 재정적자에서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던 듯하다.[김성우,『조선중기 국가와 사족』역사비평사 (2001) pp.77~78.] 임진왜란 직전 전체 군역자원의 총수는 약 15만 명이며 보인을 제외한 실제 군역대상자는 4만 8천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실제 정예 병력이라 할 상비군은 8000명에 불과하다.[김성우, 앞의 책 p.122.] 이를 보면 이이(李珥)가 아니라도 현실개혁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군제개혁을 논할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을 검토해보았을 때 이이(李珥)의 양병(養兵) 주장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지 그것이 구체적 계획이나 립안이 없이 군사력 보유의 당위성만을 염려에 둔 것이었기 때문에 문집에 나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6. 결론(結論)

 

이상에서 십만양병론을 현재까지의 기록을 중심으로 추리해 보았다. 개괄적으로 말해 이이의 십만양병 주장은 사실로 파악된다. 그러나 본론에서도 밝혔듯이 이것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추진된 정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던 과정에서 군제 개혁의 일환으로 경연 중에 나온 시급한 의사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없는 것이다.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론을 실제로 주장했는지 아닌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남인이었던 유성룡과 더불어 어느 한 쪽의 인격이 높아지거나 깍인다는 인식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일부 지방이나 문중을 중심으로 해서는 아직도 조선조의 인물이라든가 당색에 관련된 연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역사전개가 서인위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남인측이 아직도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후진적 사고이다. 조선후기 정치사의 맥락을 살펴보는데는 그러한 당쟁관계의 문제가 어느정도 작용한다고 하겠지만, 구체적 정책도 아니고 심각한 결과를 미친 사안도 아닌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함 없이 무조건 맞다, 아니다만 논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연구자의 자세가 아니다. 본고에서는 당시 율곡의 건의가 정황으로 보아 어느 정도 사실에 입각했던 것으로 보고 율곡이 국가의 방위능력 향상을 위해 예비군의 육성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반드시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 이이는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판서의 위치에 있었고 많은 개혁 상소 중에 비슷한 군사 분야의 상소가 있었던 만큼 경연 중에 임금에게 군비보유의 불가피함을 진언하는 것이 전혀 무리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성룡 역시 국가와 민생을 위해 노력한 정치가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가 양병론을 반대했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서애 유성룡의 역사적 위치가 양병론 하나 때문에 영향 받을 정도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율곡 이이의 위대성이 십만양병론을 주장했는지 아닌지에 의해 영향 받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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