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서울대학교 철학과 자료실
고려 유교사상의 전개
고려의 유학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 고려 내부의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서, 또 한편으로 동아시아 유학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전개한다. 이러한 내외의 조건에 대응하면서 고려시대 유학이 전개해 간 양상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려 국가체제의 수립기로 태조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고려 전기 유학이다. 둘째, 송과 교류하면서 국학과 더불어 사학(私學)을 중심으로 유학이 흥기하는 고려중기 유학이다. 셋째, 무인이 집정하면서 유학자들이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아 사회사상으로서의 유학이 침체되는 고려후기 유학이다. 넷째, 원과 교류하면서 신진세력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개혁사상으로 발전시키는 고려말기 유학이다.
1. 고려 전기 유학(태조~성종)
고려는 송보다 28년 먼저 국내의 정치적 분열을 수습하고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다. 중국이 오대말기(五代末期)의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최언위(崔彦撝: 868~944), 최응(崔凝: 898~932) 등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국가운영체제를 수립한다. 이 당시 고려 유학의 주류은 최언위를 비롯한 경주계 출신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당(唐)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거나 또는 유학했던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들이거나 또는 그 후예로서 고려초기 국가체제의 확립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따라서 고려전기 유학은 통일신라 시기 당과 교류를 통해 발전하였던 유학을 기반으로 전개한다.
태조는 『정계(政戒)』, 『계백료서(誡百寮書)』 등의 반포뿐 아니라, 유훈을 통해서도 세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 관리의 등용과 제도의 운영 등 여러 부분에 걸쳐 유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현재 전하는 『십훈요(十訓要)』의 내용으로 볼 때도, 고려의 새로운 집권층은 민심의 획득과 함께 권력의 사적 남용을 경계하는 유가적 이념을 국가운영의 기반으로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학의 실질적 발전은 유학을 공부하여 국가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과거제도가 광종대에 설치되면서 본격화된다. 광종 전반기에 고려는 송의 전신인 후주(後周)와 주로 교류하면서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유교경전을 수입하는 등 유학을 진흥시킨다. 광종은 과거시험을 통하여 문관 관료들을 등용함으로써 무인적 성격을 띤 공신세력과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또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국가경영의 지침으로 활용하면서, 조정의 복색(服色)을 제정하는 등 유교적 운영체계를 구축해간다. 그러나 광종대의 후반기는 공신세력을 제압하는 과정에 시달리고 불교에 경도되면서 유학의 진흥은 다소 지지부진해진다.
시호 자체가 함의하는 것처럼 성종대에 이르러 고려의 정치체제와 교육체계가 확립된다. 성종 2년(983) 송으로부터 <태묘당도(大廟堂圖)>, <정기(井記)>, <사직당도(社稷堂圖)>,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 <제기도(祭器圖)>, <칠십이현찬기(七十二賢贊記)> 등을 구입하는데, 이것은 예제(禮制)의 확립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종대에 태묘가 건립되고, 원구(圓丘), 사직(社稷), 적전(籍田), 태묘(太廟), 영사(零祀) 등 일련의 국가전례가 제정되어 예제(禮制)가 정비된다. 또한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어 유학연구의 기반을 지방으로 확대시키고(987), 국가감(國子監)을 건립함으로써(992) 유학이념을 실현하고 그 실현의 주체들을 재생산하는 제도적 장치를 확립한다.
이 과정에서 경주계 출신 유학자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동안의 정치적 득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이후의 방향을 제시하는 견해 28조목을 건의하여 수용된다. 최승로는 제도적 측면에서 유교적 신분제도의 확립과 국가권력의 공정한 운영을 강조하는 한편, 사상적 측면에서 불교와 유학의 기능을 분별하였다. 그는 불교의 주요 기능이 내세를 위한 개인적 신앙에 있다고 규정하고, 사회적 문제를 불교를 통해 해결하는 처사와 그로 인한 재화의 소모적 낭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상으로서 유학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최승로의 이러한 입장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국한하면서 불교의 사회적 폐해를 비판하는 온건비판론의 전형이 된다. 이후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이와 같은 온건비판론의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최승로의 건의는 불교의 우세한 세력에 맞서 현실 정치에서 실질적으로 유학을 진흥시킨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2. 고려중기의 유학(목종~인종)
고려전기 유학이 국가의 주도에 의해 발전되었다면, 고려중기 유학은 국학과 함께 문벌귀족들이 운영하는 사학(私學)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성종대 수립된 교육체계는 과거제도와 맞물려서 계속 보완되며 변화한다. 정부의 인재양성기관인 국자감은 문종대에 이르기까지 유학자의 주요한 산실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문종대에 설립되는 사학들에 의해 점차 밀리게 되고 숙종대에는 국학 폐지론이 제기되기까지 한다. 예종대에 약화된 국학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부는 국자감에 칠재(七齋)를 두어 규모를 확대․전문화하고, 국자감 입학을 문과시험을 치르는 필수요건으로 규정하고,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재정을 확충하며, 그리고 인종대에는 학교규정을 세운다. 이 때문에 예종대에는 국자감을 중심으로한 유학의 발전이 다시 활발해진다. 이어 인종대에 이르러 지방에 향교(鄕校)를 설치함으로써 국가의 교육대상이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대된다. 그렇지만 인종대에 발생하는 정치적 혼란과 의종대이후 무인집권기 내내 국가권력이 약화되고 문벌귀족이 득세함에 따라 국자감보다 사학이 교육의 중심이 된다. 이로써 고려중기 유학을 주도하는 세력은 정부에서 문벌귀족으로 바뀌게 되며, 고려말기에 이르러 새로운 국가개혁의 주요한 문제로 된다.
고려중기 유학은 예학 부분에서 새로운 발전을 보인다. 예종대에 『예기(禮記)』를 군주에게 강론하고,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여 예제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정비작업은 인종대에 최윤의(崔允儀: 1102~1162) 등 17인에 의해 『詳定禮文』 50권으로 완성된다. 이 성과는 조선에 계승되어 조선초기 오례(五禮)의 정비에 활용된다.
문종대에 최충(崔冲: 984~1068)이 처음 문헌공도(文憲公徒)를 창시한 이래 사학은 정배걸(鄭倍傑: fl. 1107)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 ?~1091)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 ?~?)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 fl. 1035)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 fl. 1071)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金義珍: ?~1070)의 양신공도(良愼公徒), 문정(文正: ?~1093)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 ?~?)의 서시랑도(徐侍郞徒), 황형(黃瑩: ?~?)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 ?~?)의 충평공(忠平公徒), 그리고 설립자가 불명확한 귀산도(龜山徒) 등 모두 12개의 사학이 성행한다. 이 가운데 김의진(金義珍)이 경주계이고, 정배걸(鄭倍傑)이 초계(草溪) 출신일뿐 나머지는 모두 개경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 출신들이다. 따라서 고려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주도세력이 경주계에서 개경계로 올겨갔음을 보여준다. 즉 開京 중심으로 성행한 사학이 고려중기 유학의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충은 성종에서 문종에 이르기까지 고려중기의 앞부분 시기 내내 국정에 참여하면서 유학교육을 진일보시킨다. 최충이 세운 사학은 9개의 전공으로 세분된 교육체제를 가지고 삼경(三經), 삼례(三禮), 『春秋』 삼전(三傳) 등의 구경(九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 삼사(三史)를 교육하는 한편, 이와함께 과거준비를 위한 시부(詩賦)의 연습을 주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경(九經)과 삼사(三史)에 대한 교육은 이 당시 동아시아 유학의 공통적 특색으로서 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충의 사학이 지향한 학풍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학당의 명칭에 의리적 개념들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한당(漢唐)대의 훈고적 경학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의리적 경학을 반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학의 일차적 목적이 과거시험준비에 있는 만큼 경전내용의 의리적 탐구보다는 답안을 작성하는 문장연습에 학습의 중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사장(詞章) 중심의 학문풍토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국가관료에 의해 제기된다.
고려 중기 유학의 학풍은 과거시험의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광종대 과거제도가 설치된 이후로 시험과목과 방식은 여러차례 변화하였지만, 경의(經義)를 기반으로 한 논책(論策)보다 시부(詩賦)를 중시하는 경향이 우세하였다. 이 때문에 시부를 익히는 사장(詞章) 중심의 유학이 고려중기에 유행하였고, 상대적으로 경학(經學) 중심의 유학은 위축되었다. 이것은 송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 시기 동아시아 유학의 보편적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송에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그러하였듯이, 고려에서도 최약(崔瀹: fl. 1116) 등이 시부(詩賦) 중심의 학문풍토를 비판하고 경사(經史) 중심의 유학으로 개혁할 것을 제기하면서, 예종대에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진다. 그 하나는 청연각(淸讌閣)을 두어 아침, 저녁으로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강론케 하는 일종의 경연제도를 실행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로써 예종대에 경학을 중시하는 유학의 학풍이 조성되었으며,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전해석을 두고도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김부일(金富佾: 1071~1132), 김부철(金富轍: 1079~1136) 형제와 정습명(鄭襲命: ?~1151) 등이 중심이 된 개경파(開京派)와 정지상(鄭知常: ?~1135), 윤언이(尹彦頤: ?~1149), 정항(鄭沆: 1080~1136), 홍이서(洪彛叙: fl. 1128) 등이 중심이 된 서경파(西京派)가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종대에 시부(詩賦)도 강론에 포함시키는 등 사장(詞章) 중심의 유학풍토가 다시 우세하게 되고 결국 이 시기 유학의 주류를 형성한다. 그리고 유학의 이러한 학풍 역시 고려말기의 유학자들에게 개혁의 과제로 남기게 된다.
그럼에도 이 시기 경사(經史)를 중시하려는 유학의 기풍은 풍부한 성과를 역사에 남겼다. 김연(金緣: ?~?), 박경중(朴景中: ?~?) 등이 『시정책요(時政策要)』 5권을 찬술하여 올리고, 김인존(金仁存: )이 『논어신의(論語新義)』를 완성하였다.(1113 / 睿宗 8) 윤보(尹誧: )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해하여 바쳤고(1137),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완성하였다.(1145)
송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폐쇄적 입장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송과 고려 양국 사이의 교류는 그리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성종대에 들어서 송과 교류하기 시작한 고려의 유학자들은 중기에 이르러 송으로부터 관련 문헌을 비롯한 필요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으며, 이로 인해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한다. 이 당시 고려에서는 북송 정부측의 유학뿐 아니라, 이른바 북송오자(北宋五子)를 중심으로 송의 재야에서 전개된 새로운 유학의 흐름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인종이 이정(二程)의 제자 양시(楊時: 1053~1135)의 소식을 물은 것, 이정(二程)측으로부터 김량감(金良鑑)이 직접 견해를 들은 것, 윤언이(尹彦頤)가 이정의 문인과 『주역(周易)』에 관하여 토론한 것 등의 기록은 그 실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송의 성리학 사상이 고려의 유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고려에서 새로운 유학운동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고려말기 신진 유학자들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3. 고려후기(무인집권기)의 유학(명종~원종)
고려후기의 유학은 무인집권기에 전개된 유학이다. 무인들의 집권은 고려중기까지 활발히 전개해온 유학운동에 큰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의 존립기반을 크게 위협한다.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문인들이 다소 인문활동을 전개하지만 유학자의 사회적 위상은 문벌귀족과 권력층의 문객(門客)수준으로 전락한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임춘(林椿: ?~?), 최자(崔滋: 1186~1260) 등 이 시기에 활동한 문인 대부분은 은유적 기법으로 현실과 자신들의 심사를 기술하지만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적극적 의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유학의 학풍은 더욱 사장(詞章) 중심으로 바뀌고 불교나 도가사상과 혼합된 양식으로 표현된다.
무인집권기에 더러 의리를 추구하는 유학자들은 대부분 지방으로 또는 산사(山寺)로 은거한다. 그 때문에 이후로 유학 경전을 배우러 산사(山寺)로 찾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신준(神駿)은 공주(公州)에 은거하여 지방관의 자제들을 가르쳤다고 하고, 오생(悟生)은 伽倻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정(二程)의 문인들이 출사하여 활동하던 시기인 예종대에 권적(權適: 1094~1147)은 송의 태학에 들어가 그들과 교류하고 의리를 추구하는 성리학적 학풍을 익히고 돌아왔는데, 그의 학문은 자신의 아들 권돈례(權敦禮)와 임춘(林椿)에게 전해진다. 무인집권하에서 권돈례(權敦禮)는 원주(原州)에 은거하여 유학을 가르치면서 박인석(朴仁碩) 등과 함께 성리학적 학풍을 견지해간 것으로 보인다.
은거한 유학들의 저술은 전하는 것이 없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이 시기 문장가들의 글 속에 표현된 유학의 학풍은 타 사상과 함께 융합되어 표현되는 절충주의적 입장을 보인다. 특히 불교와 유학의 차이들을 동질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화해시키는 입장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와같은 입장은 유학자의 사회적 위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졌음을 보여준다.
4. 고려말기의 유학(충렬왕~공양왕)
고려말기 유학은 무인정권의 말기 40여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시점에서 원(元)이라는 새로운 외세에 대응하면서 전개된다. 원은 송과 달리 고려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갖는 개방정책을 취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려 유학자들은 원의 사상계와 능동적으로 관계를 가지면서 유학연구의 폭을 확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사조로서 성리학을 수용하는 한편, 문벌귀족세력을 억제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면서 유학이념에 따른 국가운영방식을 재건하는 새로운 개혁의 주체로 활동한다. 이어 원명교체라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성리학 이념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해간다. 이러한 개혁의 전개과정에서 유학자들의 활동은 두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국학을 재건하고, 국가운영을 위한 새로운 이론으로서 성리학을 적극 수용하는 단계이다. 둘째, 성리학 이념에 따른 국가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 유학자들에 의하여 개혁이 추진되는 단계이다.
무인집권과 대몽항쟁기 동안 심대한 타격을 입은 유학은 충렬왕대부터 전개되는 국학 재건운동과 함께 회복되기 시작한다. 국학 재건운동은 주로 과거 급제자출신으로 원(元)에 유학하거나 또는 원의 과거에 급제한 해외파 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삼남(三南) 지역에 본관(本貫)을 둔 과거급제자로서 주로 무인정권이 붕괴된 이후 부각되기 시작하던 신진세력이었다. 이들은 원으로부터 이미 관학(官學)으로서 원의 통치이념이 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고려 유학의 학풍을 새롭게 변화시켜간다.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 1243~1306)은 1289년 원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다음 해 귀국하는데, 이 때 주희의 글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성리학 도입의 시발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안향의 실질적 업적은 국학 재건을 앞장서서 추진한 것이다. 그는 교육을 진흥시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자신 세대의 과업으로 자임하고, 국학을 재건하여 이성(李晟: 1251~1325), 추적(秋適: ?~?), 최원충(崔元冲: ?~?) 등을 천거하고 경전마다 두 명의 전굥 교수가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김문정(金文鼎: ?~?)을 江南으로 보내 공자의 72제자 초상과 器物 및 관련 서적을 구입해오게 하고, 국학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하여 일종의 육역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이로써 충렬왕대에 국학이 다시 획복되며 이후 고려말기 개혁세력을 배출하는 산실이 된다.
안향이 주도한 유학의 진흥사업은 백이정(白頤正: 1247~1323), 우탁(禹倬: 1263~1342), 권부(權溥: 1262~1346) 등 일련의 유학파 학자들이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연구하면서 새로운 학풍으로 자리잡는다. 충선왕대에 백이정은 10여년을 원에서 유학하면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이곡(李穀: 1298~1351), 이인복(李仁復), 박충좌(朴忠佐), 백문보(白文寶) 등에게 전하였다.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인물은 안향이었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확산시킨 장본인은 백이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많은 성리학 서적들을 국내에 소개하였는데, 특히 그가 소개한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는 새로 성장하는 사대부들이 유학적 생활양식을 실천하는 모델이 되었으며, 이후 예학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우탁은 정이(程頤)의 『역전(易傳)』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제현의 장인인 권부는 주희의 사서집주를 구입, 간행함으로써 성리학이 지식인들에 확산되었으며, 뒤에 이곡(李穀:1298~1351)은 사서에 구두를 달아 교과서로 활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목왕(忠穆王) 즉위년(1344)에 사서가 제술업(製述業)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주희의 성리학이 고려에서 관학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로써 고려 유학의 학풍은 오경 중심의 경학적(經學的) 유학에서 사서 중심의 성리학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제현은 백이정의 다음세대로서 원과의 교류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충목왕대에서 공민왕대에 걸쳐 개혁을 주도한다. 이제현은 불교와 사장 중심의 유학에 대하여 경전의 의리를 밝히고 실천하는 실학(實學)으로서의 유학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맹자』를 전거로 삼아 개혁을 정당화한다. 이색은 수양론에서 맹자의 양기(養氣) 사상을 적극 활용한다. 이처럼 유학이 실학으로 규정되고 그 기반으로서 『맹자』가 강조되는 것은 고려말기 유학의 주요한 학풍이 된다. 백문보는 불교를 사회적 폐해의 온상으로서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단으로서 비판하였는데, 『맹자』의 이단비판을 기반으로 불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강경비판론은 뒤에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에게 이어져 더욱 강화되며, 최승로 이래 주류를 이루었던 온건비판론을 대체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이제현과 백문보 등 신진 유학자들은 고려 역사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정당화하였는데, 그 결과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보완하는 등 고려 역사를 정리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제현이 주도한 유학진흥은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父子)에게 이어져 지속된다. 비개경계이자 원의 문과급제자 출신으로 신진세력에 속한 이들은 문벌 귀족에 의해 주도된 종래 사장 중심의 유학을 국가가 주도하는 성리학 중심의 유학으로 개혁하는 것에 앞장선다. 이색은 공민왕 원년(1352) 京外의 鄕校와 京內의 學堂에서 공부한 학생은 시험을 거쳐 十二徒에 진학하게 하고, 十二徒에서 수학한 학생들을 총괄해서 시험을 본 뒤 합격자를 성균관에 진학시키고, 그 다음 禮部에서 주관하는 科擧를 보게 하며, 國學生이 아니면 시험을 응시할 수 없게 조치하라고 건의한다. 이것은 사학을 견제하고 국학을 중심으로 교육을 개편함으로써 당시 귀족세력을 억제하려는 개혁정책의 일환이다. 사학은 결국 쇠퇴하여 공양왕대에 폐쇄된다.(1391)
이색은 원에 유학한 해외파의 마지막 세대로서 그의 원대 성리학에 대한 인식은 그의 후속 세대에 영향을 미친다. 이색은 원대에 성리학이 흥기한 것에 대하여 허형(許衡)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의 문묘에 허형이 배향됨으로써 현실화되며, 조선 초기 문묘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색 자신이 허형의 관점으로 성리학을 인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허형에 대한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의 道統을 두고 다시 문제로 등장한다.
백이정에 의해 소개된 『주자가례』는 이색 단계에 사대부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禮制를 통하여 유가적 신분질서를 확립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신진세력의 확대에 따라 강화된다. 이색은 1537년(공민왕 6),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3년상을 치를 것을 건의하여 실시되도록 한다. 그는 또한 시묘(侍墓)에 대한 『주자가례』의 규정과 당시 고려 습속의 차이에 대하여 시속을 따라 시묘를 하는 것이 예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용인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고려말기 성리학이 새로 도입한 학문을 그대로 따르는 수준에서 벗어나 유학의 이념을 현실의 조건에 맞게 실현하려는 유연한 입장에 이르렀슴을 보여준다.
한편 이 시기 국가전례에 대하여 유학자들은 국왕의 사적인 의도에 따라 변칙을 가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제현은 종묘(宗廟)의 소목을 배치하는 원리에 대하여 준수할 것을 강조한다. 공민왕 2년 종묘의 신주를 배치하는 것에 대하여 예조의 관료들은 주희와 이정의 견해에 입각하여 건의한다. 특히 이들은 중국 역대의 논의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입후(入後)의 경우로 국왕이 된 경우 국왕은 자신의 생부를 사적으로 추존하거나 부자관계로 호칭할 수 없다는 정이(程頤)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고려 말기 유학자들은 귀족세력을 억제하고 국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개혁책을 추진하면서도, 국왕이 국가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문제에 접해서는 강력히 제한하는 입장에 선다. 신진세력의 이러한 입장은 『맹자』를 개혁의 기반으로 삼는 정신과 함께 조선시대 유학전통에 적극적으로 계승된다.
이색의 세대를 이은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37(?)~1398), 이숭인(李崇仁: 1347~1392) 권근(權近: 1275~1308) 등등 신진 유학자들은 주로 성균관을 통하여 배출된 국내파 학자들이다. 이들 국내파 유학자들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도기에서 새로운 유교적 국가체제를 주도적으로 틀지우는 주체세력이 된다. 이들은 이색 등 이전 세대에 의해 추천되거나 교육되었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세대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첫째, 이들은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대외적 상황을 맞이하여 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명과 관계를 새로 구축함으로써 원의 사상계와 교류하였던 이전의 세대와 차별을 짓는다. 또한 불교에 대하여 이단배척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불교의 기능을 제한적으로 인정하였던 이전의 전통과도 결별한다.
이들 국내파 유학자들은 정몽주, 이숭인 등 고려 체제를 견지하고자 하였던 온건파와 정도전, 조준 등 조선의 새 체제로 전환하고자 하였던 혁명파 사이의 노선 차이를 보이면서 성리학 이념에 근거한 국가체제를 수립해간다. 이 가운데 정몽주는 고려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진한 최후 세대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그는 원의 영향력을 청산하고 명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을 직접 주도하였다. 그는 이색의 세대에서 제기하였던 『주자가례』의 실천을 적극 계승하여 삼년상(三年喪)의 실시와 가묘(家廟)의 설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주희 이후 주희의 사상체계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들로 인해 야기되는 이론적 혼란에 대해서도 명확히 분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를 추천한 이색에 의해 한국 성리학의 시발자로 인정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내내 그 위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몽주가 조선시대 내내 한국 성리학의 시발자로 존중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불교에 대한 배척과 함께, 절의(節義)를 실현한 표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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