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본 자료실

<여지승람에서 간추린 본관이 다른 우리나라 안씨들의 초록> : 《광주안씨족보》(1922)

작성자安 載重|작성시간15.12.01|조회수849 목록 댓글 2

출처 : 《광주안씨족보(廣州安氏族譜)》(1922)

 

1922년에 간행된 《광주안씨족보(廣州安氏族譜)》를 우연하게 볼 수 있어서, 앞쪽을 살펴보니 과거 족보를 간행할때 서문 발문들을 기록해 놓고, 이어서 본관 광주 지역의 연혁을 기록한 바로 다음으로 <여지승람에서 간추린 본관이 다른 우리나라 안씨들의 초록>이 실려져 있어서 이곳에 옮겨봅니다.


1922년 족보인데도 '같은 성씨(姓)를 쓰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결혼할 수도 있겠다[異貫姓字同, 則不相婚, 娶可也。]'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석이 맞는지는 확인해 보겠습니다.



東方安氏異貫之摠抄(餘地勝覽摠抄)

<여지승람에서 간추린 본관이 다른 우리나라 안씨들의 초록>


按安氏受姓之, 見於中國史者。新唐書宰相世系表。安氏。姬姓昌意之次子, 安居, 西方號安息國, 後漢末, 遣子世高入朝, 因居洛陽。晋魏居于安定, 後徙遼左, 又徙武威。遂爲遼東胡人。又考東方安氏之, 見於餘地勝覽者。

안씨(安氏)라는 성(姓)의 근원을 살펴보니,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 볼 수 있었다. 《신당서(新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안씨(安氏)는 희(姬)라는 성(姓)을 가진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둘째아들 안거(安居)는 서역 지방[西方]에서 살면서 스스로 안식국(安息國)이라 칭했다. 후한시대[後漢] 말기에 아들 안세고(安世高)가 입조(入朝)하여 낙양(洛陽)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고, 위(魏)·진(晋) 시대에는 안정(安定)에서 살았고. 그 후 요좌(遼左, 요동)로 옮겼다가, 다시 무위(武威, 중국의 서북 국경지대)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 일부는) 요동(遼東)의 만주사람[胡人]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방안씨(東方安氏)의 근원을 살펴보니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볼 수 있었다.


廣州, 竹山, 陽智之秋溪, 果川, 通津之守安, 喬桐, 忠州, 又忠州之反石, 槐山, 延豊, 堤川, 靑山之界銀川, 瑞山之地谷, 牙山之德泉, 慶州之安康, 豊基, 又順興, 禮安, 河陽之棃旨, 義興之岳溪, 新平之棃旨, 安陰之加乙山, 扶安之保安, 泰安之仁義, 靈山之陸昌, 珍原, 茂長之長沙, 康津之平德, 海南之玉泉, 濟州, 南原, 昌平, 黃州, 瑞興, 載寧, 兎山, 杆城, 原州, 春川, 旌善, 鐵原, 咸興, 定平, 安邊, 德源, 孟山, 理山


按今據輿地勝覽錄, 所載安氏之付貫者, 若是之多。而今世安氏不過廣州順興竹山爲大姓, 其他罕見。則意者, 撰書時州郡名, 以見籍爲報故耶。然雖云異貫姓字同, 則不相婚, 娶可也。

이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기록에 의거하여 살펴보니 안씨(安氏)의 본관 기록이 실려 있었는데, 이와 같이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안씨(安氏)는 겨우 광주(廣州)·순흥(順興)·죽산(竹山) 정도가 대성(大姓)이 되었고, 그 외에는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책을 편찬할 무렵 주군(州郡)의 명칭은 그 때 호적[籍] 대로만 기록한 때문이리라. 비록 본관이 다르고 성(姓)만 같은 경우라면 상혼(相婚)은 피해도 아내로 맞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구)죽산안씨계열의 《죽산안씨족보(竹山安氏族譜)》(1848)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있던데, 본문 중에'《광주안씨족보》에 보인다[見廣州安氏譜]'고 한 것과 족보 편찬 년도로 보아 광주안씨족보를 보고 죽산안씨족보에서 따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 기록 출처는 광주안씨족보인 것 같다.


빨간색 - 광주안씨족보

파란색 - 죽산안씨(구)족보


東方安氏異貫摠抄(餘地勝覽摠抄)


按安氏受姓之源, 見於中國史者。新唐書宰相世系表。安氏。姬姓昌意之子。安居西方號安息國, 後漢末, 遣子世高入朝, 因居洛陽。晋魏居于安定, 後徙遼左, 又徙武威。遂爲遼東胡人。又考東方安氏之, 見於餘地勝覽者。(見廣州安氏譜)


廣州, 竹山, 陽智之秋溪, 果川, 通津之守安, 喬桐, 忠州, 又忠州之()反石, 槐山, 延豊, 堤川, 靑山之界銀川, 瑞山之地谷, 牙山之德泉, 慶州之安康, 豊基, 順興, 禮安, 河陽之棃旨, 義興之岳溪, 新平之棃旨, 安之加乙山, 扶安之保安, 泰安之仁義, 靈之陸昌, 珍原, 茂長之長沙, 康津之平德, 海南之玉泉, 濟州, 南原, 昌平, 黃州, 瑞興, 載寧, 兎山, 杆城, 原州, 春川, 旌善, 鐵原, 咸興, 定平, 安邊, 德源, 孟山, 理山


今據(東國)輿地勝覽, 所載安氏之, 若是之多。而(惟)安氏不過廣州順興竹山(,三貫)爲大姓,  其他罕見。則意者, 撰書時州郡名, 以見籍爲報故耶。然雖云異貫姓字同, 則不相婚, 娶可也。(餘皆無問, 今姑依錄。)



그렇다면 죽산안씨족보 기록도 비교해 보기로 한다면,


출처 : 《죽산안씨족보(竹山安氏族譜)》(1848) - (구)죽산안씨계열

安氏異貫總抄


竹山, 廣州, 陽智之秋溪, 果川, 通津之守安, 喬桐, 忠州, 又忠州之廣反石, 槐山, 延豊, 堤川, 靑山之界銀川, 瑞山之地谷, 牙山之德泉, 慶州之安康, 豊基, 順興, 禮安, 河陽之棃旨, 義興之岳溪, 新平之棃旨, 安義之加乙山, 扶安之保安, 泰安之仁義, 靈光之陸昌, 珍原, 茂長之長沙, 康津之平德, 海南之玉泉, 濟州, 南原, 昌平, 黃州, 瑞興, 載寧, 兎山, 杆城, 原州, 春川, 旌善, 鐵原), 咸興, 定平, 安邊, 德源, 孟山, 理山


按東國輿地勝覽, 所載安氏之貫, 若是之多。而近世惟竹山廣州順興, 三貫爲大姓, 餘皆無問, 今姑依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니 안씨(安氏)의 본관들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었는데, 이와 같이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죽산(竹山)·광주(廣州)·순흥(順興) 3개의 본관이 많이 쓰는 대성(大姓)이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들어보지 못했으나, 우선 전과 같이 기록해 놓는다.


按安氏受姓之源, 見於中國史者。新唐書宰相世系表。安氏。姬姓昌意之子。安居西方號安息國, 後漢末, 遣子世高入朝, 因居洛陽。晋魏居于安定, 後徙遼左, 又徙武威。遂爲遼東胡人。(見廣州安氏譜)

안씨(安氏)라는 성(姓)의 근원을 살펴보니,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 볼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안씨(安氏)는, 희(姬)라는 성(姓)을 가진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자손들이 안식국(安息國, 중국 한나라 때 지금의 이란에 있었던 ‘파르티아 제국’을 일컫던 이름)으로 불리던 서역 지방[西方]에서 살았는데, 후한시대[後漢, 25~220] 말기에 왕자 안세고(安世高)가 입조(入朝)하여 낙양(洛陽)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고, 위(魏, 220~265)·진(晋, 265~316) 시대에는 안정(安定)으로. 그 후 요좌(遼左, 요수의 좌측 즉 요동)로, 다시 무위(武威)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이들이) 요동(遼東)의 만주사람[胡人]이 되었을 것이다.[《광주안씨족보》에 보인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안주혁(병삼) | 작성시간 15.12.02 고대의 안씨시조는 동이족입니다. 제가 고대사는 부족하지만, 30년 이상 공부해서 어느 정도는 압니다. 왕조시대에 왕으로부터 사성을 받지 않는 성씨는 동이족의 후손으로 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고대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중공)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작성자안주혁(병삼) | 작성시간 15.12.02 17세기 이후에 본관이 같은 성씨 끼리의 혼인을 금하였고, 그 이전에는 본관이 같아도 혼인이 가능하였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