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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安成煥,1858∼1911)『소산유고(蘇山遺稿)』

작성자安載中|작성시간13.01.14|조회수188 목록 댓글 0

출처 : 호남기록문화유산 http://www.honamculture.or.kr/sub02/sub02_detail.php?seq=296

 

소산유고(蘇山遺稿)

 

저자 : 안성환(安成煥,1858∼1911) ; 제학공파 / 문강공종중 / 우봉파문중 죽산안씨 20세

4권 2책, 신연활자본, 1963년 간행.

 

안성환(安成煥)의 자는 치장(穉章), 호는 소산(蘇山),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철종 9년(1858) 9월 24일, 보성 문덕면 한천리(현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 우봉(牛峯)에서 응수(膺洙)와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자품이 수려하고 총명하여 13세에 사서오경을 읽기 시작했고,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버리고 송병선(宋秉璿) 문하에 들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았다. 1898년 송병선(宋秉璿)이 남유(南遊)했을 때는 우봉(牛峯)의 목미암(木美庵)에서 습례강학(習禮講學)의 모임을 주도했으며, 1905년 송선생을 뵈러 옥천(沃川)으로 가던 중 장수(長水)에서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꿈을 꾸고 비통한 시를 지었는데 그것은 종두의 불행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예시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토부소(討賦疏)를 올렸고 스승 송병선(宋秉璿)은 우국의 충정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였다. 그후 그는 두문불출, 고향집에서 자질(子姪)과 후진의 교육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에 접하자 피를 토하고 통곡하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때 약이(藥餌)로 조섭할 것을 권하면 그는 ‘음독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빨리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어찌 약을 먹고 살아나기를 바라겠느냐’고 했다 한다. 다시 소생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학문은 의리(義理)의 실천을 위주로 하였고, 이기설(理氣說) 같은 것은 입 밖에 내기를 꺼려하였으며, 성리설(性理說)을 가지고 길쟁(吉爭)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소산유고(蘇山遺稿)는 그의 차남 규숭(圭嵩)이 수집하여 1946년에 교정 편집하였으나 1963년에야 우봉(牛峯)의 목미암(木美庵)에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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