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철학자
0.소크라테스-이성중시, 지행합일설, 악행의원인은 무지, "너자신을 알라",지 덕복합일설
0.플라톤-이데아,4주덕, 철인정치
0.아리스토텔레스-중용,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0.베이컨-경험주의, 귀납법,"아는것이 힘이다."4대우상론
0.데카르트-합리주의, 방법적회의,"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0.칸트-관념론, 실천이성, 정언명령, 목적의 왕국
플라톤에 대하여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前期對話篇:《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 ·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 ·동굴 ·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동양의 철학자
공자- 인사상. 정명사상. 덕치주의
맹자-성선설, 사단과 사덕, 인과의를 중시
순자-성악설, 화성기위,예치사상
노자-도가 무위자연, 상선약수,소국과민의 주장
장자-제물론,물아일체
불교는..없네.-_-a
주자-주자학, 이기론, 심성론, 거경궁리론, 경세론,중용
왕수인-양명학, 심즉리설, 지행합일설, 치양지설
공자에 대해서
1. 대표적인 업적
유교를 만들어낸 유교의 시조.
《춘추》편찬.
《논어》(공자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제자들이 편찬)
2. 생애
공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마을의 늙은 선생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이윽고 17세 때부터 말단 관리가 되었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맡아보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의 저자인 주공(周公)을 청년 시절부터 사모하였고,
평생 동안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공자는 30세쯤 되자 관리로서의 지위도 오르고, 또한 학문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는 정치는 법률보다는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기원전 517년에 공자는 제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과 신하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진리를 가르쳤다.
기원전 509년 고국인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공자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간혹 나타나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총 77명인데,
처음에는 노나라 사람이 가장 많았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적었다.
공자는 52세가 되었을 무렵 중도재를 거쳐 대사구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때 제나라에서는 사람을 몰래 숨어들어가게 하여 노나라를 위협하려고 하였으나
공자는 그것을 꿰둟어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고 하는 남자를 잡아서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공자의 인망은 갑자기 높아져서 기원전 499년에는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공자는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계씨를 타도하려고 여러 가지로 계책을 꾸몄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해 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10년이나 걸린 이 방랑 생활은 공자에겐 가장 괴로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왕들은 올바른 길보다도 효과가 빠른 부국강병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지금 당장 실현되지 않는 것을 알자 미래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공자의 정치가로서의 생활은 끝나고, 교육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서들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만년의 공자에게는 여러 가지 불행이 겹쳤다.
아들인 백어가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자로도 잇달아 죽었다.
공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유교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에 전해 내려와
천 수백 년에 걸쳐 중국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3. 사상
공자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4가지 사상을 제시 하였고
그 중 군자의 덕목으로 강조한 인(仁)을 중요시 여겼다.
- 인 : 어짊
- 의 : 옳음
- 예 : 예의
- 지 : 지혜
4. 명언(교훈)
군자는 말이 행함보다 앞서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군자는 타인의 좋은 점을 말하고 악한 점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소인은 타인의 좋은 점은 말하지 않고 악한 점만 말한다.
군자는 행위로써 말하고 소인은 혀로써 말한다.
길은 가까운 데에 있다. 그런데도 이것을 먼 데서 구한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지거라.
윗 사람에게는 공경하는 자세로 대하고 아랫 사람에게는 친애하는 태도를 가져라.
평소에 공손하고 일을 하는데 신중하고 사람을 대하는데 진실하라 그러면 비록 오량케 땅에 간다 할 지라도 버림 받지 않을 것이다.
신용을 잃어버리면 설 땅이 없게 된다.
내 가르침은 간단하다 그 의미는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이다.
쉬어가는 의미에서 읽어보심이 어떨지?????
2013. 8. 16 나주골 동신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