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양심과 분리될 수 없으며, 결코 양심에 우선할 수도 없다.
김 행 수
요즘 참으로 서글픈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서 절을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자비로운 부처님상보다는 무서운 사천왕상이 더 오래 기억이 남았던 시절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친구를 따라서 신림성당을 몇 번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한번도 나보고 신자가 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로 남아있는 교사입니다.
군대를 가서 일요일마다 종교행사를 나갔습니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는 것보다는 그냥 부대에 남아있기가 싫어서 종교행사를 다녔던 시절입니다. 가끔씩은 성당에를 갔고, 또 가끔씩은 절에를 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절에 가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성당에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자가 아닌 저의 입장에서는 절이나 성당이나 똑같았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보면서 참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훌륭한 종교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배타적이지 않고, 세상의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저런 게 진짜 종교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서운 사천왕상을 제외하면 인자하게 웃고있는 부처님이 좋았고, 스님이 또한 따뜻해 보여서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 세상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주는 명동성당이 좋았고, 석가탄신일에 아기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보면서 더욱 마음이 푸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계사에 걸린 아기예수 탄생 축하 현수막도 역시......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각설하고.....)
성지순례에 대해서 저는 생각합니다.
옛성현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스스로의 신앙심을 돌아보기도 하고, 그분들이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나를 생각하면서 종교의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하는 의미로 굉장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금 진정으로 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지순례가 아니라 이른바 ‘종교 蠻行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거기서 그들 종교가 선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종교들에게 했던 죄악에 대해서 돌아보기도 하고 종교의 포용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도 함께 해보는 것은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 신자들은 개종을 거부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그들이 어떻게 학살했는지에 대해서 현장을 돌아보고, 기독교 신자들은 서남아시아의 어느 지방을 찾아가서 십자군원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저질렀던 오욕에 대해서 반성하고, 이슬람 신자들은 성전의 이름으로 벌어진 테러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찾아 그 테러로 인해서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불교도들은 절을 찾아 고려 말기 종교의 이름으로 오만하고 부패했던 그들의 과거가 나라와 백성을 어떻게 망쳤는가를 반성해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찬가지로 중세에 이단이니 사탄이니 하면서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마녀사냥의 현장을 찾아서 그 불행했던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서, 종교가 타인, 또는 타종교에 대해서 포용성을 잃고 배타성을 가지는 순간 인간에게 어떤 불행이 오는지 역사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듭니다.
요즘은 종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어떤 때에는 서글픔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주장해야 할 종립학교들이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에 목을 매며 폐교니 신입생 모집중지라는 막말을 해대더니 법이 개정된 이후에도 법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고 이제는 불복종운동이 어쩌고 하면서 재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은 차치하고서라도 밥을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던 강의석 학생을 보면서 참 많이 서글펐고, 기독교 학교라는 강남대의 이찬수 교수는 절에 있는 불상에 절을 하였다는 이유로 우상숭배가 어쩌고, 학교의 건학이념이 어쩌고 하면서 학교에서 쫓겨났고, 교원소청심사위에서 복직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무시하면서 학교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더욱 서글펐습니다. 십자가 고상을 둘러싼 갈등을 보면서 더더욱 서글퍼지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가 왜 이렇게 편협해졌을까? 아니면 원래부터 편협했던 것을 내가 몰랐던 것일까?
하느님은 교회에만 사는 것일까? 예수님은 십자가에만 계신 걸까? 성모님은 성화 속에서만 웃고 계신 걸까?.....
중세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맞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는 중세 시대에 사제들만 잘 살고 그냥 평신도들이 못 사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는 또한 성화 속에서 천국을 향해 배를 타고 가는 사제들과 고통스럽게 헤엄을 쳐서 천국을 향해 가다가 결국 도착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반 백성들을 보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성화와 성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백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당시 교회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아무리 열심히, 착하게 살아도 사제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당시의 종교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는 당시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게 됩니다. 상상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고통을 겪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지금 종교인들뿐 아니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사제라는 형식적인 틀이 아니라 진짜 믿음, 마음 속의 믿음,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마음속의 진정한 믿음이라는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니라 형식으로 모시는 신은 종교가 아니라 우상이라는 것 역시 저의 생각입니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
우리나라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다종교국가이며, 엄격하게 교육의 종교 중립성을 요구합니다.
우리 나라는 헌법으로 국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헌법으로 종교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종교적인 이유로 부처님상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사건이나 단군상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뉴스로 보면서 걱정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1층에 교회가, 2층에 절이, 3층에 무속인이 함께 사는 건물을 볼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교육법 역시 교육과 종교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중세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근대 시민사회가 성립되면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것 역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상식에 속합니다. 불교학교인 동국대 강의실에 부처님의 불상이 있지 않은 것이 이런 이유이고, 기독교 학교인 이화여대나 부속고의 교실마다 성화가 걸려있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리 나라는 엄격하게 학교와 교사의 종교의 중립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종립학교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이나 교사들에게 특정종교를 강요할 수 없으며, 특정 종교행사에 참가할 것을 강제할 수도 없도록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교사가 종교를 가지는 것은 자유이지만 수업을 통하여 특정 종교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 역시 금지됩니다. 이에 반해 종교라는 공식적인 수업시간과 수업 외의 종교활동이라는 공간을 이용하여서는 얼마든지 허용된다는 것은 우리 뿐 아니라 온 국민이 다 아는 상식입니다. 종교는 절대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선교와 교육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상식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종교인들도 있더라고요..... ^^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사례도 대체로 교육과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아직도 정교일치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는 이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도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인 독일-그래서 아예 집권 정당의 이름도 기사당, 기민당, 즉 기독교사회당, 기독교민주당입니다.-에서 교실에 십자가와 십자가에 박힌 예수님상(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을 고상이라고 부르나 보다.)을 교실에 걸어둔 것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는 영국에서도 교실에 이것을 걸어 두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독일이나 영국이 그들 국민들의 종교를 부정해서 그런 것일까요? 세계에서 사상과 종교의 자유에 가장 포용적이라고 하는 프랑스에서도 이슬람 학생들이 학교에 히잡이라는 이슬람 전통의상을 입고 오는 것을 학교의 종교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랑스에서 이슬람교를 탄압하기 위해서 이런 조처를 취했을까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교실에 의무적으로 십자가와 예수님상이 걸려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과 선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아무리 종립학교라 하더라도 선교보다 교육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넓은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 역시 양심의 자유와 같은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정말 소중한 것인가 봅니다. 장기수 할아버지들, 또는 사상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감옥에서 수십년을 살면서 사상전향서 쓰는 것을 거부하면서 살았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쓰게 하는 반성문은 일종의 사상전향서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상전향서가 없어지고 준법 서약서마저 없어졌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반성문을 100장을 쓰면서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까요? 초등학생도 아니고 나이 40, 50이 된 사람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하면 쓰고 싶을까요? 그것을 쓰면서 반성이 아니라 마음 속에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자기 자신을 향해 자괴감을 키우지는 않을까요? 시말서니, 경위서니, 사유서니 이름은 다를 수 있고, 이유도 다를 수 있지만 똑같은 결론은 이것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상전향서와 준법서약서의 강요가 없어진 것처럼...... 시말서를 강요하는 것이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법적인 상식입니다. 부모님 생신 때문에 행사에 참가할 수 없다는 교사에게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오게 하라는 것이나, 늙으신 부모님 병원 모시고 다니는 교사에게 조퇴가 많다고 불성실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을 잃게 되면 더 이상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 역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초등학생에게도 삼가야 할 시말서를 교사들에게 쓰도록 강요 하는 것은 정말로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학교에서 적어도 제가 만난 교사들은 시말서를 쓰면서 반성을 했다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고 마음 속에 상처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단 한사람의 다른 생각이라도 누르면 안 된다. 그것은 강도짓이다.
“전체 인류 중에 단 한 사람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를 억누르는 것은, 단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억누르는 짓만큼이나 나쁘다. 그건 현재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한 강도짓과 진배없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면 진보는 없다. 반대 목소리 억압말고 키워라 그럴수록 사회적 가치는 생동감을 얻으니 무질서와 비효율을 감내하더라도 왜 민주주의는 필요한가, 그 답을 준다.” .........John Stuart Mill의 자유론에서......
침묵이 미덕인 사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은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도 본질적인 내용이 아닌 한에서 국가안보, 공공복리 등의 이유로 법률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법 상식입니다. 밀은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으로 ‘타인 위해의 원칙’(Harm to Others Principle-흔히 줄여서 Harm principle 이라고 합니다.)을 내세웠습니다. 한 사람의 자유와 권리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정당한 이유없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에만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행위자 개인에게만 득실이 미치는 경우에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물론 그를 충고하고 설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이며, 이를 이유로 처벌을 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립학교에서 종교를, 종교행사를 권유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이를 강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교실에 성화를 거는 것도,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톨릭이라는 건학이념을 이유로 종교행위를 교사나 학생에게 강요하는 것이나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포함합니다. 종교는 결코 양심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함께 싸우겠다.”
자유주의 정치사상가인 프랑스의 볼테르가 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고등학생들도 사회시간에 배워서 다 알고 있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입니다. 특정한 정치사상의 절대성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상을 탄압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훼손인 것처럼, 종교가 자신만의 절대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 역시 종교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볼테르의 말에서 사상을 종교로 바꾸면 이런 말이 됩니다.
“나는 당신의 종교를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또는 그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함께 싸워주겠다.”
진정한 종교의 자유는 이럴 때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종립학교라고 하더라도 종립학교라는 이유로 모든 종교활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굳이 예를 들면 십자가의 문제는 성지순례와 같습니다.
(앞에서 짧게 이야기한 것처럼) 성지순례는 무척 의미 있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신자뿐 아니라 신자가 아닌 교사들에게도 얼마든지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지 순례에 같이 가지 않았다고 경위서를 쓰게 하거나, 징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실에 십자가를 거는 것도 이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닌가?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종교의 자유는 자신의 종교를 지키는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종교나 그에 대한 행사를 거부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종교는 절대로 힘에 의해서 강요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아직도 이것을 더 증명해야 할까요? 종교는 양심과 구분할 수도 없으며, 동시에 결코 양심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하고, 특정 종교행사를 하지 않을 자유 역시 소중합니다. 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포용성을 잃고 자신만이 진리라는 배타성을 주장하는 순간 진정한 종교로서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이것이 인류가 역사를 통하여 증명해온 진리라는 것이 또한 저의 생각입니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