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눈물을 탓하랴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울보였다. 사내놈이 걸핏하면 눈물을 흘린다고 집안 어른들로부터 꾀나 핀잔을 듣곤 했다. 겁도 어찌나 많은지 마당 너른 측간에 혼자 가서 뒷일을 볼 땐 정말이지 무서워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용 화장실에 가서도 언짢은 기분이 들곤 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경고문 때문이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애교 넘치는 경고문에 피식 웃음을 흘릴 수도 있으련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남자’, ‘눈물’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어릴 적 혼났던 무의식 속으로 시나브로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연초에 영화 ‘1987’을 봤다. 늘 그렇듯 혼자서. 자리도 맨 뒷좌석이다. 흡수력이 뛰어난 아기용 손수건은 꼭 지참해야 할 필수품이다. 분노와 슬픔, 기쁨과 감동이 뒤섞인 감정의 찌꺼기가 눈물샘을 자극하면 걷잡을 수 없다. 터지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려 애써도 보지만 매번 허사다. 고개를 돌려 맨 뒷좌석을 쳐다보는 시선에도 눈물샘과 울음보는 동시에 분출한다. 사실 나로서도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여 눈물샘으로 파고드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것이 나에겐 ‘나’임을 자각하게 하는 원초적 본능의 고고성(呱呱聲)이거늘. 또한 ‘나’라는 존재를 표현하는 순수함이며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이고 공감과 나눔의 사회적 외침이거늘.
문재인 대통령도 출연 배우들과 함께 영화 ‘1987’을 관람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도 ‘1987’ 관람이 줄을 잇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러다 대통령의 영화 관람을 다룬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에 눈길이 멈췄다. “문 대통령, 영화 ‘1987’ 보면서 또 울었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니 이 신문은 문 대통령이 지난해 8월에도 영화 ‘택시 운전사’를 비롯해 ‘광해’ ‘국제시장’ ‘판도라’를 관람했을 때도 눈물을 흘렸고 영화를 관람한 후에는 정치적 메시지를 말했다며 부산국제영화제와 탈핵 등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런데 ‘또 울었다’는 기사 제목이 묘하게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내 기억의 상처를 아프게 후볐다. 혼잣말처럼 화가 나서 내뱉었다. “대통령은 자주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국민에게 눈물의 나약함을 더 이상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자유한국당은 제천 화재 희생자 장례식장을 찾은 대통령의 울먹임을 두고 대변인 논평까지 내어 질책했다. “대형 참사 앞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겨우 울먹이는 것인가”라고. 권력자, 그것도 대통령의 울먹임이 갖는 정치적 메시지가 어찌 없을까마는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반성의 눈물이 아니던가. 이를 두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 34일이 지나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때를 기억한다. 진정성 없이 위선으로 가득 찬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냐고 분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통령의 눈물과 울먹임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는 건 치졸하고 생산적이지 못하다. 그런 세태는 이제 사라졌으면 한다.
눈물이 메말라버린 대통령과 위정자가 어찌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겠는가. ‘악어의 눈물’일랑 거두고 사슴의 선한 눈망울에서 흐르는 그런 ‘눈물의 위정자’를 보고 싶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위선에 맞서 싸우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탁하는 눈물의 은사를 청해본다. 주님. 눈물의 은사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