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
며칠 전 25년을 함께했던 선배가 정년퇴직했습니다. 25년 전 평화신문 기자로 입사했을 때 선배는 개국을 준비 중인 평화방송 라디오의 기술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사반세기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고, 선배는 정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방송 기술직이라는 전문성도 살리고 그동안 준비해 취득한 자격증도 활용해 제3의 삶을 시작하는 선배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30년 전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제 인생의 사전에 ‘기자’라는 항목은 없었습니다. 5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평화신문에 몸을 담았을 때도 기자라는 직업이 낯설었습니다. 원고지로 기사를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6매짜리 해설 기사를 쓰기 위해 60장이 넘는 원고지를 휴지로 만들며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이렇게 원고지를 함부로 버리다가는 벌을 받지 싶어 100만 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당시로서는 첨단(?)인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기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했지요. 두 번 다시는 같은 지적을 받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쓴 기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수정하곤 했습니다. 그러느라고 남들보다 늦게 퇴근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요. 기사 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선배의 지적을 받으면 또 그게 자존심이 상해서 두 시간 걸려 쓴 기사를 30분 만에 쓴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뗀 적도 있었지요.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기자라는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담금질이었습니다.
기자는 프로입니다. 프로는 아마추어와 달리 전문성을 지녀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평화신문 기자로서 25년을 살면서 프로답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이켜보면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언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언론인 평화신문은 ‘교회를 비추는 거울’일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신문은 정말 교회를 비추는 거울인가. 교회라는 공동체의 민낯을 드러내는 거울인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습니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에는 ‘이념’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잇는 소통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체현하여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매달 월례조회 때마다 되새기는 이 이념은 평화신문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통자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평화신문은 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역시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부끄럽다는 고백이 현실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고백한다는 것은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소통자이신 그분을 닮아 소통하는 신문이 되고자, 희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신문을 만드는 10명의 취재기자와 4명의 편집기자는 그런 희망으로 오늘도 새롭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평화신문을 아껴 주시고 후원해 주시는 많은 이들의 기도와 성원에 힘입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