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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친구, ‘그곳’은 어떤가?

작성자안 엘리지오|작성시간26.06.10|조회수28 목록 댓글 0

친구, ‘그곳’은 어떤가? 

 




“잘 지내지…?”라고 인사를 해야 하나? 우리가 이별한 지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네. ‘그곳’은 어떤가? 평화방송에서 했던 PD 비슷한 일을 거기서도 하고 있는가? 친구가 만들었던 김수환 추기경님 다큐멘터리가 여직 눈에 선하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추기경님과 한동안 얘기꽃을 피웠겠지. 그리움은 이렇게 이런저런 장면들을 홀로 그리게 한다.

현대의 신학은 사후세계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규정한다. 당신과 온전히 함께하며 지복(至福)을 누리는 이들이 천국 백성들이라면,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며 정화하는 ‘영혼의 단련 과정’이라고 배웠다. 친구의 주소지는 어디일까? 나의 벗들 가운데 제일 사랑이 깊은 그대였으니, 당연히 천국 어느 눈부신 곳에서 유유자적하리라 확신한다. 정겹고 순박한 친구의 성정이 그곳에서도 인기 만점일 거라고 믿는다.

땅의 시간은 위령 성월에 접어들었다. 떠나간 사람들, 특별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기다. 하지만, 이때만 되면 종종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연옥에 머무는 이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히 길을 알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흔들림 없는 열망으로 흔쾌히 벌을 견디며 정련하는 영혼들이 아닌가!

그들에 비하면 오늘 이 시대를 땅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중생은 참으로 정처 없는 인생들이라네. 다른 사람 들먹일 필요 없이 나만 해도 한심무비하다. 이념과 계급으로 갈라진 사회를 탓하며 허구한 날 ‘먹물 티’를 내지만, 마음속에선 시도 때도 없이 이웃을 편 가른다. 만드는 프로그램마다 사랑과 나눔을 외치지만, 날로 무관심에 잠식돼가는 나 자신을 보면 스스로도 섬뜩하다. “세상 안의 교회” 운운하며 ‘평신도 역할론’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용기 있는 한 마디가 필요한 순간에는 벙어리가 되니 이런 위선이 없다.

생전에 친구와 내가 술잔을 기울이며 비판했던 사람들, 마치 현재의 삶이 생의 전부인 듯 기만과 허세로 살아가는 무리 속에서 매번 나를 발견한다. 벗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가야 할 곳이 명확하고, 그것이 영원한 진리와 사랑과 정의의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어찌 짧은 하루인들 그리 살겠는가? 연옥의 영혼들이 부러운 이유이고, 나와 같은 부류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할 깜냥이 못 된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니, 친구가 도와다오. 그대 곁에 빛으로 계신 ‘그분’께 땅의 사람들을 위해 전구해주길 간청한다.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떠난 날,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착하고 의로운 백성을 단명하게 하신 뜻을 알 수 없어 방황했다. 지금도 그 ‘알 수 없음’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내가 우러르는 어느 곳에서 그대가 나를 위해 ‘파이팅’을 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소중하다. 나의 부끄러움을 친구에게 고백하고 도움을 부탁할 수 있게 해주는 ‘통공의 교리’가 고맙다. 벗이 죽지 않은 것처럼 나도, 우리의 바람도 결코 스러지지 않으리란 믿음이 이 위령의 달을 씩씩하게 해준다.



※ 평화방송TV에서 헌신했던 ‘故 김철민 대건 안드레아 PD’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친구의 전구를 청하며, 가족들의 건강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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