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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자비로운 우리’를 위하여…

작성자안 엘리지오|작성시간26.06.14|조회수17 목록 댓글 0

‘자비로운 우리’를 위하여… 

 




저는 이 칼럼을 제목부터 다시 썼습니다. 원래 글의 이름은 ‘자비의 반사경’이었습니다. 그간 평화방송 TV의 카메라가 담아낸 존경할만한 신자들의 이야기를 나열했고, 우리도 그들처럼 하느님 자비의 반사경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비추자는 것이 애초의 논지였습니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의 빛이 돼주었던 빈민사목 사제들, 꽃 이름을 딴 노숙인 대상 무료 국숫집 아저씨, 지구 반대편 가난한 나라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선교사들…. 이런 분들을 예로 들며 ‘자비의 해’의 시작을 장식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어느 ‘케이블 TV 드라마’가 제 글을 가로막았습니다. ‘응답…’ 이라는 타이틀의 이 드라마는 평범한 골목 인생들의 일상을 통해 1980년대의 추억을 되살리는 작품인데, 희한하게도 드라마를 본 뒤에 ‘한결 착해진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한 시대를 살아냈는지, 그렇게 함께했던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를 일깨워주는 온기가 특별했습니다. 이토록 따뜻한 중생이 꾸려가는 세상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으리란 맹신(?)이 절로 생겨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비의 해’를 떠올렸습니다.

교회는 ‘자비’를 일러 “사랑과 구원의 만남에서 인간 가까이 오시려는 하느님의 의지” (전례사전)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에게 와주신 절대자의 사랑’이 바로 ‘자비’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그 ‘거룩한 짝사랑의 기운’이 엄존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너 나 없이 ‘자비로운 존재들’임에 틀림없다고 감히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기꺼이 아프고 싶고,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당하는 박해에 분노하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일어난 재난 소식에 ARS를 거푸 누르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심사를 견디지 못해 고해소를 찾고, 용서에 인색한 자신을 탓하며 밤을 밝히고…. 이런 일들이 어찌 그냥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빛을 되비치는 반사경이기에 앞서 홀로 영롱할 수 있는 ‘반딧불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한 기도와 정성으로 때로는 빈민사목의 정의로운 기반이 되고, 때로는 노숙인의 쉼터를 짓고, 또 때로는 국경 넘어 연대의 기적을 일궈내는…. 작지만 눈부신 ‘자비의 발광체들’ 말입니다.

엄혹한 이 땅에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것이 ‘자비의 희년’을 정한 취지라면, 그 첫걸음은 우리 안에 은총으로 깃든 ‘자비로운 마음’를 발견하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자비의 해’가 지난 뒤 우리 모두가 더 할 수 없이 ‘자비로운 존재’임을 자신하게 된다면, 희년은 세상을 바꾸는 감동의 드라마로 남으리라 확신합니다.

특별한 몇몇 분들의 예화들을 든 뒤 “다들 본받읍시다” 하는 식으로 써내려갔던 애초의 칼럼을 다시 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의 문이 열리면서 ‘자비의 희년’이 시작됐습니다. 명동대성당을 비롯한 여러 성지의 문들도 잇따라 열려 ‘자비의 시대’를 선포할 것입니다. 문은 항상 안과 밖 양쪽으로 길을 냅니다. 그 길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자비로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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