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 재조명, 위기 속 민주주의 길을 묻다
- 기자명 경동현 기자
우리신학연구소 주최, 국사편찬위원회 후원 심포지엄 열어
지난 25일, 우리신학연구소 주최, 국사편찬위원회 후원으로 '19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사' 심포지엄이 서울 합정동 국제가톨릭형제회 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민주주의 위기와 '민주화 운동'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였던 1980년대 천주교가 민주화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을 학술적으로 조명하고,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를 성찰했다.
우리신학연구소는 지난해 발간한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천주교" 연구를 바탕으로, 1980년대 자료의 방대함과 역사적 중요성에 주목해 이번 토론회를 기획했다.
박문수 소장은 인사말에서 "19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기억을 간직한 분들이 발표와 토론에 참여해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며, "이번 논의가 현재의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고 심화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은 총 6개 주제 발표와 토론, 그리고 종합 토론으로 진행됐다.
19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의 전개와 과제
- 이념화된 운동과 '민주화 이후' 개념 비판
(왼쪽부터) 1 주제 토론자 한상봉 가톨릭일꾼 편집장과 '19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사'를 발표하고 있는 박문수 소장. ©한승범
첫 주제 발표에서 박문수 소장은 19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사를 개괄했다. 그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점으로 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양심법 선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 등 군부독재에 맞선 주요 사건들을 짚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의 역할과 함께 교구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 단체(가농, 가노청 등)까지 참여가 확대되어 대중적 기반이 넓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987년 대선 후보 지지 논란, 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 등은 운동 내부 갈등과 교계와의 긴장을 불러왔으며, 교종 방한 같은 대규모 교회 행사 개최 과정에서 정권과의 타협,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의 제도화 경향은 자율성과 동력을 약화시키고, 1987년 이후 쇠퇴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토론자로 나선 한상봉 <가톨릭일꾼> 편집장은 80년대 운동이 70년대 인권 중심 운동과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이념' 성격이 강했다고 지적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제국주의에 대한 민감성이 커지면서 '혁명적 그리스도인' 담론이 등장했고, 교회 안에서는 '외피론(교회활용론)/세력화론(혁명적 신앙운동)'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가 반외세, 통일운동을 주도하기보다 사제단 활동을 실무적 지원, 협력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1987년 이후를 '민주화 이후'로 규정하는 것은 군사정권 연장 국면을 가리는 문제가 있다며, 80년대 운동은 '민주화 운동'보다 '민중운동', '사회운동'으로 보는 관점이 더 적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가톨릭농민회, 농민 권익에서 사회운동으로
- 농민의 주체화와 민주화 운동과의 결합 강조
(왼쪽부터) 2 주제 토론자 홍명희 가톨릭농민회 사무총장과 '1980년대 가톨릭 농민운동사'를 발표한 박현준 교수. ©한승범
2 주제 발표에서 박현준 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는 1980년대 가톨릭농민운동사를 정리했다. 그는 국가 주도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이 구조적으로 주변화되던 상황에서, 가톨릭농민회(가농)가 1970년대 권익운동을 넘어 1980년대에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5.18 이후 가농은 운동 방향을 모색하며 '공동체 운동', '생명 운동'으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고, 농협 민주화운동, 소값 파동에 대응한 '소몰이 시위'(1985), 수입개방저지 운동 등을 통해 농민들의 저항을 조직화하며 민주화운동과 연대했다. 그는 이를 통해 가농이 종교단체를 넘어 전국적 농민 운동의 통일적 기반 형성에 기여하고, 정치 민주화에 공헌했다고 설명했다.
토론자로 나선 홍명희 가톨릭농민회 사무총장은 발제의 경제사회학적 분석을 긍정하면서도, 운동사적 관점에서 '주체 형성과 정치적 맥락'이 더 강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농이 권익 보호를 넘어 국가 권력에 맞서 농민의 정치적 주체화를 이끌었고, 농협 민주화 운동, 지방자치 요구 등 민주화운동과 직접 결합한 '사회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자주적 농민운동단체', '생명공동체운동' 등 용어 사용에 대한 신중함, '소수 활동가'라는 평가에 대한 대중적 참여 증거 제시, 분회 중심 활동이 갖는 전략적 의미 등을 언급하며, 운동의 내적 동력과 주체적 경험을 더 반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도시 빈민의 주거권 투쟁과 천도빈의 형성
- 운동의 사회적 배경과 종교적 연대의 맥락 보완 필요
(왼쪽부터) 3 주제 토론자 김가흔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과 '1980년대 가톨릭 도시빈민운동사'를 발표한 최영균 신부(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한승범
3 주제 발표에서 최영균 신부(한국그리스도사상 연구소장)는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양산된 도시빈민 문제를 중심으로 '1980년대 천주교 도시빈민운동사'를 설명했다. 그는 도시빈민 운동이 주로 주거권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으며, 1970년대 개신교와 연대한 도시문제연구소 활동이 진행된 데 이어, 1980년대 목동, 상계동 강제 철거 투쟁을 거치며 운동이 본격화되었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1985년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천도빈)가 결성되고, 교회 내 활동가들이 조직적으로 빈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천도빈은 철거민 지원, 지역 공동체 운동, 주민 의식화 교육 등에 힘썼으며, 1987년 상계동 철거민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 내부의 종교성 대 계급운동이라는 이념 갈등이 있었고, 비종교 단체(서철협 등)와의 긴장 관계도 생겨났다.
토론자로 나선 김가흔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은 1980년대 천도빈 결성 배경이 되는 70년대 활동과의 연결고리를 더 명확히 하고, 비종교 단체와의 분리 배경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운동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1988 서울올림픽 준비와 맞물린 정부의 도시 정비 및 재개발 정책이 강압적 철거를 촉발한 사회적 배경이었다는 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JOC와 노동사목을 중심으로 이어진 노동운동의 버팀목
- ‘관찰-판단-실천’의 정신과 교회의 이중성 비판
(왼쪽부터) 4 주제 토론자 정인숙 전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국장과 '1980년대 가톨릭 노동운동사'를 발표한 한상욱 전 인천구교 노동사목 사무국장. ©한승범
4 주제 발표에서 한상욱 전 인천교구 노동사목 사무국장은 '1980년대 가톨릭노동운동사'를 정리했다. 그는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노동계 정화 조치'로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이 붕괴된 암흑기 속에서도, 가톨릭노동운동은 JOC(가톨릭노동청년회)와 새롭게 등장한 노동사목을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 갔다고 말했다.
당시 운동은 블랙리스트(요주의자 명단) 철폐 운동, 노동법 개정 서명 운동 등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활동과 함께, 외방선교회, 수도회, JOC 출신 평신도 활동가들이 주축이 된 노동사목센터들은 노동 교육, 상담, 노조 결성 지원 등을 전개하며, 지역 노동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았다.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노동사목은 폭발적인 노조 결성을 지원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후 가톨릭계 사업장에서 일어난 노사 갈등은 교회의 이중적 모습을 드러낸 사건으로 진단했다.
토론자로 나선 정인숙 전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국장은 JOC의 '관찰-판단-실천' 방법론과 복음과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정신이 70-80년대 노동운동의 핵심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모임을 통한 의식화와 민주노조 조직화 노력을 설명하며, 군부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JOC 활동가들이 각 지역 노동사목을 조직해 저항을 이어 간 역사를 짚었다. 또한 블랙리스트 철폐와 노동법 개정 운동도 가톨릭노동운동이 주도한 실질적 대응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탄압보다 더 슬펐던 것은 교회 내부의 몰이해와 탄압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톨릭 사업장에서 노조를 더 지독하게 탄압하고, 평신도 운동 조직을 해체하려 했던 교회의 이중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회과학 수용과 변혁 지향의 강화, 조직 해체와 재편
- ‘가톨릭판 대중 노선’과 운동 확장성
(왼쪽부터) 5 주제 토론자 안미현 2기 전국가톨릭대학생협의회 준비위 의장과 '1980년대 가톨릭 대학생운동사'를 발표하고 있는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한승범
5 주제 발표에서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은 '1980년대 가톨릭대학생운동사'를 정리했다. 그는 1970년대 사회 참여 전환기를 거쳐, 80년대 운동이 사회과학과 해방신학을 적극 수용하며 변혁적 지향성이 강화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앙과 운동' 사이의 정체성 논쟁과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교회의 통제 강화로 전국 조직인 전국가톨릭대학생협의회가 사실상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후 학생들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 조직 총연맹을 결성했으나, 정부 탄압과 내부 문제로 와해되었다. 1987년 이후에는 대중운동 노선을 기반으로 한 '전국가톨릭대학생협의회 준비위'가 결성되어, 신앙 정체성 재정립과 대중 조직화를 모색했다.
토론자로 나선 안미현 2기 전가대협준비위 의장은 1988년 농활 장소를 안동으로 정한 사례를 들며, 이것이 1987년 주교회의의 평신도 운동 통제 이후 교회의 지지를 회복하고 대중적 기반을 넓히려는 '가톨릭판 대중노선'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 아시아 사무국 파견 등 국제 교류가 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대학생운동은 이후 가톨릭민주청년공동체, 지구청년대표자협의회 등 성당과 사회 청년운동으로 확장되었고, 조성만 열사 투신 사건처럼 청년운동이 통일운동의 상징적 의미까지 갖게 됐다며, 운동의 연속성과 확장성을 부각했다.
지역 조직 기반과 합법‧비합법 운동의 접점으로서 인가대연
- 평범한 386세대의 경험과 민주화 기억 재평가해야
(왼쪽부터) 6 주제 토론자 한대광 전 '경향신문' 사회에디터와 '1980년대 인천지역 가톨릭학생운동과 연대운동사'를 발표하고 있는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한승범
마지막 발표에서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980년대 인천지역 가톨릭학생운동과 연대운동사'를 정리했다. 그는 인천교구 가톨릭대학생운동(인가대연)이 성당 기반의 조직 구조와 서울 통학생 중심의 구성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가진 가톨릭학생운동 사례였다고 소개했다.
인가대연은 비합법 지하 학생운동조직인 '지티(GT)'와 긴밀히 연대하며, 합법 공간인 '월례 청년 금요강좌'를 비합법 가두시위와 연결하는 전략적 활동을 펼쳤다. 이로써 종교 청년 단체를 넘어, 지역 민주화운동의 거점이자 합법-비합법 운동의 접점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지티 내부에서 노선 갈등이 일어난 시기에도 인가대연은 중요한 조직적 기반이었으며, 활동가들은 이후 노동운동 등으로 '존재 이전'하는 흐름을 보였다.
토론에 나선 한대광 전 <경향신문> 사회에디터는 자신을 "당시 지티(GT)에서 4년을 활동한 사람중 한 명이자 증인"으로 소개하며, 황 선임연구원의 발표가 자칫 잊힐 뻔했던 인천 가톨릭학생운동과 비합법 지티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지티에서의 경험이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었으며, 공장 위장취업, 노조 결성, 해고, 재취업과 반복되는 해고로 이어졌던 당시 활동가들의 일반적인 경로를 본인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증언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많은 선후배들이 투옥, 수배, 건강 악화, 산업재해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 포기 등 엄청난 인생의 변화와 희생을 감내해야 했음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기록과 연구가 정치권 일부 인사들로 인해 왜곡 평가되어 온 소위 '386 세대' 활동가들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그들의 희생과 이후의 삶에 대한 추적 연구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종합 토론 : "기록 넘어선 생생한 삶의 증언 담아야"
"천주교 외부 운동과의 관계 조명 필요"
종합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발표자들. (왼쪽부터) 박문수 소장, 박현준 교수, 최영균 신부, 기춘 사회자, 한상욱 전 사무국장, 경동현 연구실장, 황경훈 선임연구원. ©한승범
이어진 종합 토론에서는 사실 확인을 넘어, 1980년대 운동의 복합적 맥락과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보며 2026년 발간할 단행본의 방향을 모색했다.
정인숙 전 사무국장은 "자료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당시 현장에서 예수를 따르려 했던 활동가들의 생생한 증언과 삶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며, "별도 구술 기록으로라도 모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대학원생 참석자는 운동사 서술이 천주교 단체에 국한되기보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타 농민운동, 개신교, 일반 사회단체 등 학생운동 집단과의 협력, 갈등, 상호 영향 관계 속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가톨릭 농민회가 다른 농민 조직과 공유했던 지점과 차별점, 가톨릭대학생운동이 다른 일반 학생운동 및 학교 당국과 맺었던 관계 등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춘 사회자는 이러한 의견을 이어받아, 현재 자료집 초안이 부문 운동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 천주교 내부의 연대(예: 사제단과 정평위의 긴밀한 협력)와 외부 사회운동(민통련, 학생운동 등)과의 관계적 서술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특히 지역 민통련 대표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신부들이 맡았던 배경과 의미를 읽어 낼 필요가 있다며, 지역 운동의 비중은 서울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중요성이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문수 우리신학연구소 소장은 "이번 발표문은 단행본 집필을 위한 1차 자료 수집 과정의 결과물"이라며, 활동가 증언, 타 운동과의 연계, 구체적 사건 경위, 부문 운동 간 연결 등은 최종 원고에서 충분히 반영될 것이라고 답했다.
"숨겨진 지원 구조와 신앙 동력도 다뤄야"
한상봉 편집장은 1980년대 운동이 이념적으로 격동하던 시기에도 신앙운동으로서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인성회(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의 전신)'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인성회가 해방신학을 비롯해 당시 운동에 필요한 사상, 영성 자료를 제공하고, 각 부문 활동가를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빈민, 노동, 농민 운동에서는 특히 본드(접착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정호경 신부 등이 주도했던 '천주교 민족 자주 생활공동체 운동'이 가농과 천도빈의 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미친 영향, 분도출판사의 지식 운동 기여 등을 언급하며, 운동을 뒷받침했던 숨겨진 구조들에 대한 추가 조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다원주의 상실과 교회의 성찰 과제
기춘 사회자는 1980년대 천주교 운동이 비신자에게도 열려 있던 '다원주의'적 측면이, 1987년 이후 주교회의가 영세 강조 등으로 입장이 변하면서 사라지고, 운동의 활력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최영균 신부는 과거 운동의 기억이 현재의 비전과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며, "좌절과 단절 속에서도 과거 운동의 '역사적 유전자'가 오늘날 새로운 사회운동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유철 시인은 박근혜, 윤석열 등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의 행보를 언급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처절하게 실패한 것 아닌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러한 기억과 기록 작업이 교회의 구원으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에 황경훈 선임연구원은 제도 교회 개혁에 대한 비관을 표하면서도, "동학 등 한국적 사상에 기반한 신학적 재구성, 아시아 청년들과의 연대 등을 통해 '좋은 신자이자 좋은 시민'이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성염 전 교황청 한국대사는 유럽연합 헌법 논쟁을 사례로 들며, 제도 교회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기보다 때로는 저항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복음 자체의 힘과 평신도들의 노력이 K-민주주의를 지켜 낸 희망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며, 1980년대 천주교 운동사 기록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5일, 1980년대 천주교민주화운동사 심포지엄 참석자들. ©한승범
종합 토론은 예정된 시간을 넘길 만큼 활발하게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198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이 지닌 풍부하고 복합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다양한 의견과 자료, 해석을 공유했다.
이날 제기된 과제들은 2026년 발간될 단행본 "1980년대 천주교민주화운동사"에 반영될 예정이다. 이번 기록 작업이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미래를 위한 성찰의 자원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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