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FYNeFMW-m8
예배영상
행 28:31, 어디에서든지 담대하고 거침없이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26-6-14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의 나라를 구한 영웅입니다. 우리 국민으로써 엄청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국난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다가 끝내는 마지막 전장에서 순직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말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 대단한 위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망치거나 살기만을 바라면 오히려 파멸하지만, 죽을 각오로 결연하게 싸움에 임하면 오히려 승리하고 살아 남는다’는 굳세 결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밖의 길은 다 죽음의 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영생으로 이끕니다.
마 16:25–26,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사람들이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고 곡해해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순신장군의 말이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자기 영혼, 곧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 목숨을 위해서 살다가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온 천하를 얻은 듯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강한 책망의 말인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결기입니까? 기독교인들은 이런 결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목숨, 곧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복음을 위해서 죽고자 결기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위한 죽을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붙잡히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붙잡혀서는 그가 로마 시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판을 로마법에 따라 로마에 가서 판결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고 주장했다면, 그가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메여서 로마에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선교사업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붙잡혀서 결국 로마로 이송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결기에 차 있었습니다. (빌립 집사의 딸들, 아가보 선지자, 가이사랴 사람들). 예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나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행 21:9–14,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인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사도 바울도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입니다. 13절에, ‘나는 주 예수를 위하여 결박당하고 죽을 것도 각오했노라’는 결의가 오늘 신앙인들에게 절실합니다(뼈저리게 강렬함).
둘째. 어떤 조건 속에서도 성도들을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차가 없어서 활동 반경이나 시간적 제약을 받게 됩니다. ‘제약을 받다’는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는데 일정한 한계나 조건이 주어져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제한 당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배 타고 갇히고 쇠사슬에 메인 채 이송되어 한 집에 감금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가옥감금 상태에 처하지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은 2년 동안 그렇게 감금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제약을 받았겠습니까? 가고 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세든 가택에 감금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 동조하거나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로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기꺼이 영접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바울은 자기 셋집에 온 2년을 꼬박 감금된 채로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에,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영접하는 사람들이 천국에서 영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 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교제가 없게 되면, 예수님도 천국으로 우리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잘 영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을 각오로 살게 되면, 예수님도 천국 아버지 집으로 그런 신앙인들을 영접하고 또 영원히 있게 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함이 없는 것은 천국으로 영접함이 없다는 단적인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믿음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셋째, 담대하고 거침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죄인이 되어 로마까지 암송해 왔으니, 재판관에게 잘 보여야 돼, 할 수 있으면 아는 사람들을 총 동원해서라고 판사를 구워 삶아서 내 편으로 만들어서, 판결이 나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해야 돼’.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택에 감금된 채로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신앙인들의 본래의 삶을 살았습니다.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 바울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보여주는 신앙인들의 본래의 삶은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숨어서 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거침없이’ 행했습니다.
‘담대하게’(팔레시아), ‘확신, 대담함, 숨김없이’라는 뜻인데, 어떤 상태에서의 담대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에서는 (위험이나 위태로움을 수반하는 활동을 기꺼이 수행하는 특성)이라고 했습니다. 가옥에 갇힌 채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다가는 위험이나 위태로운 상태에 빠지게 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자기가 처한 재판의 판결이 절대로 이롭게 전개되지 않게 될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금된 채로‘거침 없이’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아콜루토스’(거침없이),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담대해지게 되면, 도리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 풀에 지친다, 꺽인다, 못 이긴다는 말이 맞습니다. 외부의 압력이 없는데도 자기 열정이나 노력,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힘이 빠져서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인들은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