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대에 안씨가 있었다?
우리나라 안씨들의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말에 중국서 온 농서이씨 이원의 아들 3형제에 기원한다는 설은 조선말에 지어낸 위설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신라말에 안씨가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광주안씨 시조(안방걸)는 고려 태조 때의 사람이라고 전해오나, 사서나 다른 고려시대 기록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충주안씨 시조(안석필)는 신라시대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일부 신라 때 계보도 남아 있는 것 같으나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믿을만한 안씨들의 역사는 순흥안씨(시조 자미, 1100년대 후반)나 죽산안씨(시조 준, 영의 100년대 전반?)의 경우 대개 1100년대, 광주안씨의 경우 1200년대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고려사나 금석문 등의 기록에 나타나는 안씨들은 상당히 많지만, 지금의 안씨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고, 대다수 안씨들의 득성 유래도 불분명한 상태이다.
광주안씨의 경우는 시조가 고려 태조 때 사람으로 전해오므로 태조 때의 토성분정을 성씨 연원으로 일단 추정해 볼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토성분정 이전에 안씨들이 있었다는 명백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이름이 안(安)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더러 보이지만 이것이 성인지, 성은 없고 이름의 한 글자에 불과한 것인지 애매하다. 하지만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는 888년에 동궁내양(東宮內養)이란 관직에 있은 안처현(安處玄)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분명히 성이 안씨인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에는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의 속성이 안씨(安氏)로, 아버지는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한 이조(尼藻)라고 하였다. 고향이 중원부(中原府, 충주)라고 하니 충주안씨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신라말에 안씨가 있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광주안씨의 경우도 성씨 연원이 고려 태조 때의 토성분정이 아니라, 시조 이전의 신라말부터 안씨성을 가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신라말, 고려 초의 안씨 기록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
- 충주안씨(忠州安氏) 시조(始祖) 안석필(安錫弼) : 新羅(신라) 中元年間(중원년간)
中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중국연호라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劉秀])의 연호로 中元 1년 (서기 56 년) - 中元 2년 (서기 57 년) 2년간 사용되었다. 신라시대가 맞기는 한데.....
["순흥안씨변정록 第二編"에 있는 내용 ]
2. 忠州安氏(충주안씨) 忠烈公(충렬공) 祐(우)에 대한 考證(고증)
1) 忠州忠原安氏(충주충원안씨)의 淵源(연원) 및 由來(유래)
忠州忠原安氏(충주충원안씨)의 始祖(시조)는 諱(휘)가 錫弼(석필)인데 新羅(신라) 中元年間(중원년간)에 한 美婦人(미부인)이 男官(남관)을 쓰고 등에는 한 살 가량의 아이를 업고 남쪽에서 와서 王(왕)에게 아뢰기를 『이 아이가 의지할곳도 없고 붙쳐 둘 곳도 없으니 원컨데 잘 보살펴 주소서』한 후 그 美婦人(미부인)은 간데 온데 없고 아이만 혼자 뜰에서 울고 있거늘 이상히 여겨 神(신)이 주고 간 아이라 해서 대궐 옆에 두고 길렀더니 10세가 됨에 容貌(용모)가 俊秀(준수)하고 技倆(기량)이 出衆(출중) 하였으며 詩(시)와 書(서)에 모르는 것이 없었고 재주가 뛰어나 기특하게 여긴지라 安氏(안씨)의 姓(성) 을 내리고 錫弼(석필)이라 이름하여 남성으로 本貫(본관)을 하니이는 男官(남관)을 쓴 여자가 남쪽으로 부터 왔다는 뜻이다.
그는 장성하여 伊 (이찬)의 벼슬을 하였다. 그후 數次(수차)의 난으로 족보가 流失(유실)되어 世系(세계)를 고증할 길이 없고 후손 (환), 珙(공), 璞(박)삼형제가 754년(경덕왕13) 큰 벼슬을 하였고 長公(장공)의 直諫(직간)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염고군에 歸養(귀양)갔다.
그곳에서 거주함에 따라 貫籍(관적) 을 하니 곧 지금의 延安(연안) 고을이며 이로부터 삼형제를 1世로 世系(세계)를 계승해오고 있다. 1362년(공민왕11)紅巾賊(홍건적) 亂(난)때에 18세손 置器(치기)가 공민왕의 播遷(파천)을 扈從(호종)하여 위기에서 공민왕의 생명을 保存(보존)케 했으며 勝戰(승전)을 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 인하여 壁上第2功臣(벽상제2공신)寶文閣(보문각) 藝文閣提學(예문각제학)忠原伯(충원백:충주고호)에 特封(특봉) 되었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忠原(충원)으로 改貫(개관)하여 계승해 오다 地名(지명)이 忠州(충주)로 變遷(변천) 됨에 따라 忠州(충주)로 改稱(개칭)하게 되었다.
◎ 忠州安氏(충주안씨) 世系(세계)
始祖 一世 → 新羅時代 高麗時代(→)
安錫弼-계창-徵石-鎭國- 祐- 興守-琦-泊-休-九有-忠克-輪-官司空-珙-鎭寶-璞-鎭泰 → 厚福-宅仁-保赫-明世-思文-置器-邦起 (忠原伯: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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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주안씨에 대한 위의 기록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조선 중기 충주안씨들의 묘비를 보면 고려 때 중국서 온 안열(安烈 또는 安悅)이라는 사람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참고: 충주안씨 시조는 신라 때 사람인가?
- 신라 경순왕 별빈 안씨(安氏)
: 897 년 경 출생 추정
경주김씨 경순왕 년보를 보면 서기 914년에 별빈 순흥안씨가 子 덕지(德摯)를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흥안문 시조공(諱 子美)의 추정 생년이 약 1170년(장자 휘 영유공의 생년이 1201년 이므로 한 대(代) 30년을 뺐을때의 수치) 인데 별빈 순흥안씨의 생년은 당시 연세를 최소한 17세로 봤을때 897년 정도로 추정된다.
경기도 시흥에서는 별빈안씨와 경순왕을 추모하는 군자성황제가 고려 초부터 지금까지 매년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경기도 안산에서도 유사한 안산잿머리제가 매년 거행되고 있다고 한다.
별빈의 연고지가 경기도 시흥, 안산 등지이므로 신라가 망하고 난후 경순왕이 만년에 경주를 떠났을 때 얻은 부인일 가능성도 있다.
경순왕(敬順王:?~978(97세때 별세:?∼고려 경종4):신라 제56대 왕(제위기간 927∼935).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국립문화재연구소
안산 잿머리성황제 굿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 국립문화재연구소
여기서는 경순왕의 비가 홍씨, 장모가 안씨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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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김씨 영분공파 8세 김의진(金義珍, ?-1070)의 며느리 순흥안씨
경주김씨 영분공파 9대손 김후덕의 배가 순흥안씨이다. 김의진의 자부입니다. 경순왕의 비도 그렇지만 순흥안씨 시조공(자미)보다 연대가 앞선다.
김의진(金義珍 / ?-1070) 8 대
고려(문종24)때 문신으로 1065년(문종19)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등을 역임하여 평자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신(良愼)
김후덕(金侯德) 9 대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9세손(九世孫)이요. 자(字)는 상인(尙仁). 병부시랑(兵部時郞) 김양감(金良鑑)과 한림(翰林) 이용(李容)과 공부시랑(工部時郞) 박시중(朴時中)과 함께 1073년(문종27년) 침잠(沈潛)한 성리학을 일으켜 유림(儒林)의 종맹(宗盟)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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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보와 교류한 경주의 안치민(安置民)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사람으로 경주에 안치민(安置民)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행적은 가끔씩 거론되는 것을 본적은 있지만 가계는 불명이다.
이 사람은 미술사에서도 더러 거론이 된다.
동국이상국전집 제12권 고율시(古律詩)
처사(處士) 안치민(安置民)의 시집(詩集)을 되돌려 보내며 군막(軍幕)에 있을 때 지었다.
고아한 정취 황정견(黃庭堅)의 시보다 낫고 / 詩高全勝庭堅體
풍부한 문장 유자후(柳子厚)의 풍도 남아 있네 / 文贍猶存子厚風
다만 세상에 알려진 대가(大家) 못 되고 / 但恨未成華國手
초야에 묻혀 읊조리기만 하는 게 한일세 / 草間呼叫學秋蟲.
동국이상국전집 제27권 서(書) / 동문선 제60권 서(書)
군중(軍中)에서 안 처사 치민(安處士置民)에게 답하는 수서(手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우거】 고려 안치민(安置民) 자는 순지(淳之)이고, 호는 기암(棄菴)이다.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정동성(征東省) 막료(幕僚)로 있을 때에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시의 격조가 높음은 황정견(黃庭堅)의 체(體)보다 낫고, 문장이 풍부하기는 오히려 유자후(柳子厚)의 풍(風)이 있도다. 다만 나라를 빛내는 솜씨가 되지 못하고, 풀 사이 가을 벌레 우는 것을 배움이 한스럽다.” 하였고, 또, “눈썹은 실처럼 드리워졌고, 눈동자는 물같이 맑구나. 내가 방덕공(龐德公)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대를 보니 그인가 하네.” 하였다.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에 이름이 안(安)으로 시작되는 사람들이 사서에 더러 나타난다. 이들을 안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성은 없고 그냥 단순히 이름에 안(安) 자가 들어 있는 경우인지 명확히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시대에도 안씨가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사서에 나타나는 당시의 인물들로는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일본서기(日本書紀)》
인명검색 : http://people.aks.ac.kr/front/index.jsp
- 고구려 -
안고(安固) : 고구려 보장왕 때의 장군.
654년(보장왕 13) 10월 보장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말갈병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의 분전으로 인해 고구려 군대는 신성(新城: 지금의 撫順 부근)에서 크게 패하였다.
안정(安定) : 고구려 문자명왕 때의 외교가.
516년(문자명왕 25) 9월 14일 왜에 파견되어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는 고구려 사신이 왜에 파견된 확실한 예로서 처음 보이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때 그는 당시 교전중이던 백제의 사신도 만나게 되었다. 마치 고구려와 백제사신이 왜에 경쟁적으로 파견된 배경은 양국 간의 외교적 주도권 장악을 통한 군사적 우위의 확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신라 -
- 고구려 -
안고(安固) : 고구려 보장왕 때의 장군.
654년(보장왕 13) 10월 보장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말갈병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의 분전으로 인해 고구려 군대는 신성(新城: 지금의 撫順 부근)에서 크게 패하였다.
안정(安定) : 고구려 문자명왕 때의 외교가.
516년(문자명왕 25) 9월 14일 왜에 파견되어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는 고구려 사신이 왜에 파견된 확실한 예로서 처음 보이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때 그는 당시 교전중이던 백제의 사신도 만나게 되었다. 마치 고구려와 백제사신이 왜에 경쟁적으로 파견된 배경은 양국 간의 외교적 주도권 장악을 통한 군사적 우위의 확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신라 -
안길(安吉) : 신라 문무왕 때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의 주리(州吏).
《삼국유사》 권2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의하면 문무왕의 서제(庶弟) 거득공(車得公)이 재상이 되기 전에 국내를 밀행하면서 민간의 요역(徭役)의 노일(勞逸), 조부(租賦)의 경중, 관리의 청탁을 살피고자 하여 거사의(居士)모양을 하고 순행을 하다가 무진주의 주리 안길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뒤에 재상이 되었다.
당시 국제(國制)에는 각 주의 향리(鄕吏)한 명이 서울인 경주에 와서 제조(諸曹)에 상수(上守)하게 하고 있었는데, 안길도 상수할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다가 거득공을 만나보게 되고 그 이전의 거득공을 대접한 공(功)으로 왕에게 상을 받게 되었다.
이때 받은 상을 보면 성부산(星浮山, 혹은 星損乎山)아래의 땅을 무진주의 상수리(上守吏) 소목전(燒木田)으로 받았고, 또 산 아래의 전(田) 30무(畝)도 받았다. 이 기사는 지방세력 억제의 의미가 있는 상수리제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물론, 이 제도의 기원은 삼국시대부터일 것으로 여겨지지만 후일 고려시대의 기인제도(其人制度)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사가 기인제도의 기원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안도(安刀) : 신라 진평왕 때 일본에 파견된 외교관.
《일본서기 日本書紀》 민달(敏達) 9년(580) 6월조에 의하면, “신라에서 안도(安刀) 나말(奈末, 奈麻)과 실소(失消) 나말을 파견하여 조(調)를 보내왔으나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라 하였고, 11년 10월조에도 같은 기사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진평왕 2년조와 4년조에는 안도와 관련된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가 562년(진흥왕 23) 9월 가야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신라의 조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6세기 중반 이래 신라가 가야지역을 정복하여 그 세력권을 확대시키면서, 신라와 왜의 갈등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앞의 기사는 그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안락(安樂) : 신라 헌덕왕 때의 화랑.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공주)도독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화랑인 명기(明基)와 함께 진압군으로서 종군하기를 자청하였으며, 그는 시미지진(施彌知鎭: 위치미상)에서 싸웠다.
그런데 이 난은 무열왕계를 이은 김주원(金周元)의 직계손과 내물왕계를 이은 원성왕의 직계손과의 대립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진압군에 가담한 그는 원성왕계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상(安常) : 신라 효소왕 때의 화랑. 안상(安詳)이라고도 한다.
그는 692년(효소왕 1) 화랑에 임명된 부례랑(夫禮郎)의 낭도가 되어 가까이서 그를 따랐다.
이듬해 3월 무리와 더불어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을 거쳐 북명(北溟: 지금의 원산만 부근)방면에 이르렀을 때, 부례랑이 동예(東濊)사람들에게 붙잡히자 홀로 그를 찾아나섰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얼마 뒤 부례랑과 함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 국왕으로부터 대통(大統)에 임명되었다 한다. 일설에는 그가 준영랑(俊永郞)의 낭도였다고도 하며, 혹은 화랑으로서 술랑(述郎)·영랑(永郞)·남랑(南郞)과 함께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였다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2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의하면 문무왕의 서제(庶弟) 거득공(車得公)이 재상이 되기 전에 국내를 밀행하면서 민간의 요역(徭役)의 노일(勞逸), 조부(租賦)의 경중, 관리의 청탁을 살피고자 하여 거사의(居士)모양을 하고 순행을 하다가 무진주의 주리 안길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뒤에 재상이 되었다.
당시 국제(國制)에는 각 주의 향리(鄕吏)한 명이 서울인 경주에 와서 제조(諸曹)에 상수(上守)하게 하고 있었는데, 안길도 상수할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다가 거득공을 만나보게 되고 그 이전의 거득공을 대접한 공(功)으로 왕에게 상을 받게 되었다.
이때 받은 상을 보면 성부산(星浮山, 혹은 星損乎山)아래의 땅을 무진주의 상수리(上守吏) 소목전(燒木田)으로 받았고, 또 산 아래의 전(田) 30무(畝)도 받았다. 이 기사는 지방세력 억제의 의미가 있는 상수리제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물론, 이 제도의 기원은 삼국시대부터일 것으로 여겨지지만 후일 고려시대의 기인제도(其人制度)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사가 기인제도의 기원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안도(安刀) : 신라 진평왕 때 일본에 파견된 외교관.
《일본서기 日本書紀》 민달(敏達) 9년(580) 6월조에 의하면, “신라에서 안도(安刀) 나말(奈末, 奈麻)과 실소(失消) 나말을 파견하여 조(調)를 보내왔으나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라 하였고, 11년 10월조에도 같은 기사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진평왕 2년조와 4년조에는 안도와 관련된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가 562년(진흥왕 23) 9월 가야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신라의 조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6세기 중반 이래 신라가 가야지역을 정복하여 그 세력권을 확대시키면서, 신라와 왜의 갈등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앞의 기사는 그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안락(安樂) : 신라 헌덕왕 때의 화랑.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공주)도독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화랑인 명기(明基)와 함께 진압군으로서 종군하기를 자청하였으며, 그는 시미지진(施彌知鎭: 위치미상)에서 싸웠다.
그런데 이 난은 무열왕계를 이은 김주원(金周元)의 직계손과 내물왕계를 이은 원성왕의 직계손과의 대립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진압군에 가담한 그는 원성왕계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상(安常) : 신라 효소왕 때의 화랑. 안상(安詳)이라고도 한다.
그는 692년(효소왕 1) 화랑에 임명된 부례랑(夫禮郎)의 낭도가 되어 가까이서 그를 따랐다.
이듬해 3월 무리와 더불어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을 거쳐 북명(北溟: 지금의 원산만 부근)방면에 이르렀을 때, 부례랑이 동예(東濊)사람들에게 붙잡히자 홀로 그를 찾아나섰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얼마 뒤 부례랑과 함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 국왕으로부터 대통(大統)에 임명되었다 한다. 일설에는 그가 준영랑(俊永郞)의 낭도였다고도 하며, 혹은 화랑으로서 술랑(述郎)·영랑(永郞)·남랑(南郞)과 함께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였다고도 한다.
안장(安長) : 신라시대 거문고의 명인.
경문왕 때 거문고의 거장 귀금선생(貴金先生)이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아니하자 왕이 금도(琴道)의 단절을 우려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을 남원군수로 임명하고, 윤흥은 안장과 청장(淸長)을 간택해서 귀금에게 보내어 거문고를 배우게 하였다.
경문왕 때 거문고의 거장 귀금선생(貴金先生)이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아니하자 왕이 금도(琴道)의 단절을 우려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을 남원군수로 임명하고, 윤흥은 안장과 청장(淸長)을 간택해서 귀금에게 보내어 거문고를 배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표풍 飄風〉 등 3곡을 전수받은 다음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이를 전함으로써 그로부터 거문고를 전업하는 악인이 점점 많아져 오늘에 이어졌다.
- 통일신라 -
안나함(安那含) : (?∼672 [문무왕 12]). 신라 문무왕 때 사람.
일길찬(一吉飡)으로서 672년 대당항쟁에 참여하였다가, 8월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 서북?)싸움에서 죽었다.
- 통일신라 -
안나함(安那含) : (?∼672 [문무왕 12]). 신라 문무왕 때 사람.
일길찬(一吉飡)으로서 672년 대당항쟁에 참여하였다가, 8월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 서북?)싸움에서 죽었다.
고려사 세가편에 있는 고려 전기의 안씨들을 검색하여 목록을 뽑아 보았다. 잘 알려진 분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본관 미상이다. 참고가 될지...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
지곡사 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일 것이다.
스님의 휘(諱)는 석초(釋超)이고, 속성은 안씨(安氏)이니 중원부(中原府)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尼藻)로서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하였으니.....
건화(乾化) 2년(912년) 후량(後梁) 태조(太祖) 임신(壬申) 10월 15일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
건덕(乾德) 2년 세재(歲在) 갑자(甲子)에 세수 53세..(입적)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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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년 안제경(安帝京) : 안성(安城) 호장(戶長)
통화명 안성 장명사 석탑지(統和銘安城長命寺石塔誌)
통화(統和) 15년 정유년(丁酉年 : 997, 성종 16) 4월 27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발원하면서 장명사(長命寺) 5층석탑을 세웠다.
향도(香徒)의 성명(姓名)은 다음과 같다.
동량(棟梁) 대행명도교위(大行明徒校尉) 호장(戶長) 안제경(安帝京), 김정(金正), 최▨(崔▨).
박사(博士) 예령(禮靈) (결락) 김위(金位) 등.
요색(料色) 광▨사(光▨師) 현긍(玄肯).
유장(鍮匠) 지미지(只未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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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 59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 1085년(선종2년)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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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직숭(安稷崇:1066~1135) 묘지명(墓誌銘)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01
안직숭은 동주(洞州) 안씨로, 고려태조 때의 때의 공신인 대광(大匡) 안락(安樂)의 후손이다.
안락(安樂) ... 인표(仁表) -- 정화(鼎和) -- 신조(申祚) -- 직숭(稷崇) -- 장남 거중(居中), 차남 거정(居正)
증조 인표(仁表)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이고, 조부 정화(鼎和)는 소부감에 추봉되었다. 아버지 신조(申祚)는 대자대부(大子大傅)에 추봉되었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으로 국자제주 우간의대부(國子祭酒 右諫議大夫) 상빈(尙賓)의 딸이다.
공은 수사공 좌복야 판공부사(守司空 左僕射 判工部事) 유자유(柳子維)의 둘째 딸에게 장가갔다. 자녀로 아들은 두 명이 있는데, 장남 거중(居中)은 어려서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금 수주판관 예빈주부(樹州判官 禮賓主簿)로 있다. 차남 거정(居正)은 음서[廕]로 관직을 얻었는데 장사랑 양온령동정(將仕郞 良醞令同正)직을 받았다. 딸이 한 명 더 있어서, 장사랑 양온령동정 이문저(李文著)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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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69 ~ 1158)의 어머니 안씨
명필로 신품4현의 한 사람인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69 ~ 1158)의 비에 어머니가 안씨라 했다. 외조부의 이름이 없어 아쉽다.
<<..휘는 탄연(坦然)이요, 속성은 손씨(孫氏)며, 선조(先祖)는 (결락) 양현(陽縣) 사람이다.아버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을 세워 교위(校尉)가 되었고, 어머니는 안씨(安氏)의 딸이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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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청(崔惟淸:1095~1174) 묘지명(墓誌銘)
어머니는 □ 대원군대부인 안씨(大原郡大夫人 安氏)로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 덕보(德保)의 딸이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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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묘지명(趙冲墓誌銘)
조충(趙冲 : 1171∼1220)의 본관은 횡천(橫川, 현 강원도 횡성)...
둘째 딸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안유좌(安劉佐)의 □째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공의 문생(門生)이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516
고려사(高麗史) 안씨(安氏) 관련 기록 발췌
** 각 항 맨 윗 줄 맨 오른 쪽의 숫자가 해당 연도임.#高麗史4卷-世家4-顯宗1-00-13-1009
是月賜 [安昌齡] 等及第.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09-1010
冬十月丙午朔以 知政事康兆爲行營都統使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安紹光(?-1017) 爲行營都
兵馬使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禮賓卿朴忠淑爲中軍
兵馬使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率兵三十萬軍于通州以備契丹.
고려사 제 94권 열전 안소광
안소광은 동주 사산현(洞州士山縣) 사람이다. 대대로 무관을
지냈는데 그는 몸집이 장대하고 외모가 잘났으며 성품이
기세스럽고 매 사냥과 승마를 즐겼다.
목종(穆宗)이 즉위할 때에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 하여
숙위(宿衛)를 장악하게 하였으며 왕의 총애와 우대가 비할 바
없었다. 현종(顯宗) 때에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있다가 죽으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멈추고 경강(敬剛)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7-21-1016
夏四月甲申以異膺甫攝司憲大夫徐訥爲中丞柳韶爲雜端曹子奇爲侍御司憲金祐甫李
成功爲殿中侍御司憲 [安宰均] 李元秀劉玄佐李懷郭紳李周佐爲監察. 司憲臺庭栢樹枯
死有年至是復生.
#高麗史4卷-世家4-顯宗1-08-16-1017
戊午上將軍尙書右僕射 [安紹光] 卒.
#高麗史4卷-世家4-顯宗1-11-26-1020
以 [安鴻漸] 爲司憲雜端.
#高麗史5卷-世家5-德宗-02-08-1033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抄掠丹兵七人賜職一級. -----------> 고성이씨 시조
#高麗史6卷-世家6-靖宗-01-14-1035
契丹來遠城使檢校右散騎常侍 [安署] 牒興化鎭曰: "竊以當郡最近仁封有小便宜須至披
達載念貴國元爲附庸先帝每賜優洽積有歲月靡倦梯航昨因伐罪之年致阻來庭之禮旣
#高麗史6卷-世家6-靖宗-07-24-1041
加徐訥洪賓有暹 [安甫] 高烈等重大匡.
#高麗史6卷-世家6-靖宗-08-03-1042
甲寅金吾衛上將軍刑部尙書 [安保] 上表請老不允.
#高麗史7卷-世家7-文宗1-10-15-1056
兼監察御史試殿中內給事 [安民甫] 爲關西北關內三道撫問使;
監察御史閔昌壽爲關內東道撫問使分道發遣毋或阻滯."
#高麗史8卷-世家8-文宗2-11-35-1057
丁未遣尙書戶部侍郞 [安民甫] 如契丹賀太皇太后生辰.
#高麗史8卷-世家8-文宗2-17-09-1063
辛丑以[李璜]爲戶部尙書; 朴希仲攝工部尙書. -----------> 고성이씨 시조
#高麗史9卷-世家9-文宗3-33-12-1079
九月日本國歸我飄風 商人 [安光] 等四十四人.
#高麗史10卷-世家10-宣宗-08-11-1091
甲辰都兵馬使奏: "往年蕃賊寇昌州兵馬錄事 [安先俊] 等領卒出屯德寧戍遣郞將高猛等
追捕奮擊賊大潰校尉崇儉隊正邊鶴等突入賊中士卒增氣 斬有功乞加職賞以勸將來.
" 制可.
#高麗史11卷-世家11-肅宗1-02-27-1097
甲辰遣 [安仁鑑] 如遼賀天安節.
#高麗史11卷-世家11-肅宗1-07-58-1102
壬申遣 [安子恭] 如遼賀天興節.
#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5-46-1110
丙寅以司宰卿李載爲西北面兵馬使; 借戶部侍郞 [安子恭] 爲東北面兵馬副使.
#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7-20-1112
丁丑以兵部侍郞李壽爲西北面兵馬副使; 刑部侍郞 [安子恭] 爲東北面兵馬副使.
#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8-34-1113
九月乙酉遣西頭供奉官 [安稷崇(1066-1135)] 如宋. 牒宋明州云: "去年入朝金緣等同稱: '在闕下
時蒙館伴張內翰等諭來歲又當 祀申覆國王遣使入朝以觀大禮.' 聞此已令有司方始
備辦忽母氏薨逝迫以難憂今年未遑遣使入朝以達情禮請炤會施行."
#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9-08-1114
二月癸丑以三司使 [安子恭] 爲西北面兵馬使; 三司副使李韶永爲東北面兵馬副使.
#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9-28-1114
六月甲辰朔 [安稷崇] 還自宋. 帝賜王樂器.
#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9-58-1114
丁巳以 守太保; *효爲大原公; *서檢校太保守太尉; 僑檢校太保守太尉; 李資謙
守司徒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兼西京留守使; 金緣守司徒戶部尙書; 趙仲璋守
司空判尙書刑部事; 金至和爲尙書左僕射兼三司使; 史榮爲吏部尙書; 李載爲刑部
尙書翰林學士承旨; 朴景綽爲左散騎常侍; 崔璿判國子監事; 金沽知尙書吏部事延
英殿學士; [安子恭] 知御史臺事; 朴昇中爲右諫議大夫; 洪灌爲文德殿學士.
#高麗史14卷-世家14-睿宗3-12-14-1117
戊寅以金晙檢校司空 知政事; 金至和守司空; 李軌爲樞密院使; 王字之爲左散騎
常侍同知樞密院事; 韓 如爲殿中監樞密院副使; [安子恭] 爲兵部尙書仍令致仕.
#高麗史14卷-世家14-睿宗3-17-11-1122
丁丑御紗樓召文臣五十六人刻燭命賦牧丹詩六韻詹事府注*薄{簿} [安寶麟] 爲* {第}
一. 賜絹有差. 時康日用以能詩鳴王*??觀其作燭將盡日用裳得一聯云: "頭白醉翁
看殿後眼明儒老倚欄邊." 袖其藁伏御溝中王命小黃門取視嗟賞不已. 曰: "此古人
所謂: '臼頭花鈿滿面不如西施半*??.'" 慰諭而遣之.
#高麗史15卷-世家15-仁宗1-04-05-1126
辛酉內侍祗候金粲內侍錄事 [安甫鱗] 與同知樞密院事智祿延上將軍崔卓吳卓大將軍權
秀將軍高碩等謀誅李資謙拓俊京不克. 資謙俊京擧兵犯闕壬戌焚宮闕癸亥劫王移御
南宮殺安甫鱗崔卓權秀高碩及宿衛左僕射洪灌等十七人其餘軍士死者不可勝計.
#高麗史16卷-世家16-仁宗2-08-38-1130
壬戌諫議 [安稷崇] 等上* 論時政.
#高麗史16卷-世家16-仁宗2-09-40-1131
丁酉直門下省 [安稷崇] 右諫議李伸中書舍人林存左司諫崔 等奏曰: "東京持禮使書狀
官崔逢深本武擧人書狀非其任又嘗大言國家與我壯士千人則可入金國虜其主來獻其
狂妄如此竊恐生事不宜遣之." 伏閤固爭三日不允.
#高麗史17卷-世家17-仁宗3-20-33-1142
癸丑遣 [安正脩] 如金賀萬壽節.
#高麗史17卷-世家17-仁宗3-23-36-1145
丙子遣借戶部侍郞 [安綽裕] 謝橫宣.
#高麗史17卷-世家17-毅宗1-02-09-1148
戊午以文公裕爲西北面兵馬使; [安正修] 爲東北面兵馬使.
#高麗史17卷-世家17-毅宗1-05-14-1151
丙辰以崔惟淸判兵部事; 文公元判刑部事; 庾弼知門下省事; 崔 知樞密院事; 文
公裕爲禮部尙書; 金端爲戶部尙書; [安正修] 試刑部尙書.
#高麗史17卷-世家17-毅宗1-05-75-1151
戊子以文公元守司空; 庾弼爲中書侍郞平章事; 任克忠同知樞密院事; 王軾爲御史
大夫同知樞密院事; 李彦林爲尙書右僕射; 金澤試刑部尙書; [安正修] 試工部尙書;
李之茂知御史臺事.
#高麗史20卷-世家20-明宗2-12-27-1182
癸未遣將軍 [安允恭] 如金謝賀生辰; 兵部郞中崔永儒賀正.
#高麗史21卷-世家21-神宗-03-22-1200
十二月丁未以崔詵守*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 奇洪壽守*大師柱
國; 任儒守*大傅門下侍郞平章事; 崔忠獻守*大尉上柱國; [安有孚] 爲右副承宣中書舍
人; 趙準爲戶部侍郞右諫議大夫.
#高麗史21卷-世家21-神宗-05-20-1202
己未以崔忠獻守*大傅 知政事吏兵部尙書判御史臺事; 王珪爲御史大夫; 白存濡同
知樞密院事; 金平李自貞 爲樞密院副使; 于承慶爲樞密院知奏事; [安有孚] 李抗爲左
右承宣; 金陟候知御史臺事; 崔奕爲殿中少監御史雜端; 鄭德宇爲右司諫; 朴得文朴
仁碩爲殿中侍御史; 任孝明爲殿中內給事; 李承白李得紹爲左右正言.
#高麗史21卷-世家21-熙宗-01-04-1205
八月宋商船將發禮成江監檢御史 [安琓] 行視 出之物得犯禁宋商數人笞之太甚. 忠獻聞
之罷琓又論不擇遣御史罷侍御朴得文.
#高麗史23卷-世家23-高宗2-36-15-1249
癸丑遣侍郞 [安전{晉+戈}, ?-1298] 郞將崔公柱如蒙古.
#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2-16-1255
己未命判司天事 [安邦悅] 脩智陵以爲蒙古所壞也.
#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1-1257
原州賊 [安悅] 等據古城叛遣將軍尹君正郞將權贊領兵討之.
#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2-1257
丙子君正與賊三百餘人戰于興元倉大敗之有人斬[安悅]出降君正入城斬其巨魁松庇敦
正唐老等數人脅從者徙置于島.
#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9-1257
東北面兵馬使報: "分司御史[安禧]設伏於永 山谷挾擊東眞兵獲兵仗鞍馬及所虜男女
牛馬等物."
#高麗史27卷-世家27-元宗3-12-15-1271
辛丑窄梁防戍蒙古兵入大部島侵奪居民民甚怨之大部人聞崇謙等起遂殺蒙古六人以
叛水州副使[安悅]率兵討平之進悅秩五品.
#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03-35-1277
以將軍[安迪材]爲合浦防護使.
#高麗史29卷-世家29-忠烈王2-06-81-1280
.....李伸朴保盧挺儒安社等十人爲摠管大將軍趙 將軍[安迪材]許洪材金德至徐靖任愷
金臣正李廷翼朴益桓等十人爲千戶中郞將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3-08-1287
庚申以宋 知都僉議事; 趙仁規爲三司使; 孔愉同判密直事; 金x [安전] 副知密直司
事; 柳陞林貞杞爲左右副承旨.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3-35-1287
甲子遣鄭可臣于慶尙蔡謨于全羅[安전]于忠淸道皆爲安撫使貶金周鼎爲淸州牧使.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4-01-1288
○(戊子)十四年春正月己丑以[安珦]爲左副承旨.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4-07-1288
甲寅知都僉議印侯辭以金 代之[安전] 知密直司事韓希愈爲副知密直司事.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4-11-1288
壬戌以[安迪材]爲會源防護使.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4-26-1288
戊寅宮花盛開宴群臣于香閣酒 王命典理正郞閔漬國學直講趙簡製新曲左副承旨[安
珦]亦製詩以進.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4-43-1288
庚子遣知密直司事[安전] 如元賀聖節.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5-58-1289
壬子王及公主世子如元趙仁規印侯廉承益[安珦]等從行. 是行欲以扈從邀功者衆增 未
定. 乃以史官無關於事不許扈駕史臣不從行始此.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6-04-1290
乙丑僉議贊成事洪子藩判密直事鄭可臣等調兵于兵部以[安전] 爲慶尙道都指揮使金之
淑爲全羅道都指揮使.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6-53-1290
十二月以[安전] 爲忠淸道都指揮使.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7-52-1291
丁巳以[安전] 爲西北面都指揮使.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8-51-1292
癸酉王以疾微行移御密直[安珦]第.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9-03-1293
丙寅公主有疾移御密直[安珦]第.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3-19-09-1293
癸丑宴于大殿賀功臣號[安珦]作詩以賀賜米五十石.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20-05-1294
夏四月辛卯以同知密直[安珦]爲東南道兵馬使出鎭合浦.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20-40-1294
以洪子藩爲僉議中贊; 印侯爲僉議贊成事; 金之淑判密直司事; 車信爲密直使; [安珦]
知密直司事; 張舜龍同知密直司事.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21-04-1295
己巳以鄭可臣爲僉議侍郞贊成事; 印侯爲世子貳師; 金 知都僉議司事; 金之淑判三
司事; [安珦]爲密直司使; 車信爲世子元賓; 柳陞知密直司事; 崔有 李之 爲左右常
侍; 李混同知密直司事; 柳庇閔漬爲左右承旨; 元卿爲左副承旨.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22-07-1296
二月甲辰以金之淑知都僉議司事; [安珦]爲三司左使; 金 李德孫 副知密直司事.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23-54-1297
壬寅以金之淑爲僉議 理世子貳師[安珦]爲僉議 理世子貳保崔有 判密直司事李混
知密直司事 兼世子元賓*尹( ){尹琁}爲密直學士張碩爲軍簿判書全昇爲右副承旨
吳仁永爲左承旨金恂爲左副承旨趙瑞爲右承旨吳漢卿李 爲左右司議大夫.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25-30-1299
己亥以宋 監修國史[安珦]修國史閔漬同修國史罷車信崔有 柳庇吳仁永劉福和洪詵.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29-41-1303
壬申以韓希愈爲都僉議右中贊判典理司事; 金琿爲侍郞贊成事判軍簿司事; [安珦]爲侍
郞贊成事判版圖司事; 崔有 柳庇 爲贊成事; 閔萱爲 理; 閔漬判密直司事; 鄭
爲密直司使; 李混權永 知密直司事; 金台鉉金深同知密直司事; 金延壽金文衍爲密
直副使; 洪詵爲版圖判書; 郭膺爲監察大夫; 李 爲典法判書; 朴 爲右常侍; 高世康
純爲三司左右使.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0-10-1304
壬午以[安于器]爲右副承旨.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0-27-1304
己卯贊成事[安珦]建議置國學贍學錢.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0-34-1304
己卯江南僧紹瓊來遣承旨[安于器]迎于郊瓊自號鐵山.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1-10-1305
戊辰命[安于器]掌監試取士. 時儒士康慶龍家居敎授其徒十人中是試來謁呵喝之聲竟夕
不絶. 宗室益陽侯第在其傍異日侯入見王問民*閒事侯因白之王曰: "此老雖不仕誨人
不倦以底于成豈曰小補命吏載穀就賜其家."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1-24-1305
辛丑以韓希愈金琿爲都僉議左右中贊; 王惟紹爲贊成事; 權永知都僉議司事; [安于器]
爲密直副使; 吳演爲左副承旨.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2-11-1306
九月甲申都僉議中贊致仕安珦]卒.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3-32-1307
十一月甲子賜 [安奮]等及第.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00-60-0000
乙亥前密直司使 [安전] 卒. <--------------------------------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00-66-0000
是日以趙仁規爲司徒侍中 知光政院事; 洪子藩爲左僕射 知光政院事; 洪奎守司徒
領景靈宮事; 鄭可臣爲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 知光政院事; 印侯爲光政
使 知機務; 金琿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 車信李之 檢校司徒資政院使; 金之淑
同知光政院使 知機務; 安珦 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大學士?林府尹; 柳庇爲光
#高麗史34卷-世家34-忠宣王2-05-10-1313
辛亥以權溥爲永嘉君; 趙簡安于器 爲密直副使.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0-21-0000
九月戊子朔賜安震等及第.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1-31-1314
上王命前選部議郞尹莘傑司憲執義尹宣佐前典校令白元恒侍王講通鑑以辛 爲選部
直郞安珪爲散郞委以銓注. 又諭王專斷國政兼崇佛法戒諸倉庫吏毋以幼主之命耗費財
用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1-45-1314
六月庚寅贊成事權溥商議會議都監事李 三司使權漢功評理趙簡知密直安于器等會
成均館考閱新購書籍且試經學. 初成均提擧司遣博士柳衍學諭兪迪于江南購書籍未達
而船敗衍等赤身登岸. 判典校寺事洪 以太子府 軍在南京遺衍寶 一百五十錠使購
得經籍一萬八百卷而還.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4-28-1317
戊戌遣藝文檢閱安震應擧于元.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5-28-1318
丁巳以尹莘傑知密直司事宋英同知密直司事. 以藝文檢閱安震中制科擢爲藝文應敎摠
部直郞.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7-36-1320
冬十月丁巳遣丹陽府注簿安軸長興庫使崔瀣司憲* {糾}正李衍宗應擧于元.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7-49-1320
戊辰以許富爲選部典書; 李宜風爲摠部典書; 安珪爲代言.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7-50-1320
辛未復置政房以代言安珪掌銓注右常侍林仲沇議郞曹光漢應敎韓宗愈等 之.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8-02-1321
壬午遣內書舍人安鈞索盤纏于慶尙道.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8-18-1321
丁卯王如元四更出自陽善門百官不及拜辭柳淸臣吳潛元忠韓渥尹碩柳有奇安珪等從
之.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8-42-1321
庚戌以崔有 爲大寧君; 金台鉉判三司事; 吳潛朴虛中趙璉僉議贊成事; 趙延壽金元
祥爲三司使; 白元恒韓渥僉議評理; 秦良弼知密直司事; 全英甫知密直司事兼大司憲;
任子松李宜風同知密直司事; 朴孝修李彦忠林仲沇爲密直副使; 閔漬裴挺守僉議政丞
致仕; 許有全朴全之尹珤李瑚閔宗儒守僉議贊成事致仕; 權謙安文凱爲右左代言; 崔
之甫慶斯萬爲右左副代言.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10-23-1323
安軸趙廉崔龍甲應擧于元.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14-02-1327
冬十一月戊子敎曰: "寡人在都五年姦臣謀移國祚侍從之臣盡節輔佐終始一心其功可
錄. 以僉議政丞尹碩化平君金深上黨君韓渥西河君任子松贊成事元忠全英甫 理安文
凱李恭崔濬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16-22-1329
丙寅檢校贊成事安于器卒.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후4-22-1335
丙午上護軍安士由還自元以前王悔過白王王泣下.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후7-12-1338
閏月乙未贊成事安文凱卒.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00-17-0000
壬戌以代言李君 前掌令安牧成均丞鄭 都官佐郞鄭世忠掌銓注賜從臣爵嬖幸冒濫
者頗多.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00-33-0000
辛酉賜宋天鳳等及第. 賜知貢擧安文凱玉帶同知貢擧李湛紅 及第第二人洪彦博馬第
三人李達尊 帶.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후2-13-1341
辛丑賜安元龍等及第.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후3-19-1342
.......
前軍簿判書安子由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후4-42-1343
幸和妃殿晩幸判司僕寺事安義第.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0-22-0000
乙卯置書筵以右政丞蔡河中左政丞韓宗愈判三司事李齊賢贊成事朴忠佐金倫權謙興
海君裴佺直城君盧英瑞判密直司事李 知密直司事黃石奇同知密直司事許伯前僉議
理辛裔僉議 理孫守卿密直副使奉天祐安震安軸典理判書閔思平知申事金光轍右
代言韓仲禮左代言河有源右副代言李公遂左副代言尹 鷹揚軍上將軍羅英傑上護軍
尹之彪判通禮門事趙文瑾大司成梁溫判典校寺事鄭怡右司議李衍宗左司議吳珣執義
趙淵祭酒田叔蒙大護軍鄭 掌令李餘慶司藝許齡典儀副令鄭天濡宗簿副令成元度起
居注朴允文起居郞宋天鳳典理正郞金君發李達衷都官正郞金希祖左獻納鄭思度持平
金*??金*??左正言尹安之典校丞全忠典儀注簿孫涌德寧府注簿洪俊更日侍讀.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2-24-1346
.......
乃命府院君李齊賢贊成事安軸韓山君李穀安山君安震提學李仁復撰進又命修忠烈忠宣忠肅三朝實錄.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3-21-1347
六月甲戌遣 理安子由如元獻苧布.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4-05-1348
三月丁酉朔以判三司事李齊賢永山君張沆密直提學安牧提調經史都監又以張沆及僉
議 理全允臧軍簿判書李衍宗前典法判書朴元桂前成均祭酒李達衷前右司議尹*당等
爲吏學都監判事典理摠郞安輯司藝李允升爲副使典理佐郞成俊德直講孫光嗣爲判官.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4-27-1348
癸酉德寧公主徙居于密直副使安牧第庶務皆決焉.
安輔 安祐 安輯 安震 安牧
安宗源 安遇慶 安吉成 安克仁 安楫 安遇祥 安元崇
贊成事安師琦 安景儉爲執義 同知密直司事安叔
以安宗源判三司事; 安翊爲三司左使;
安瑗爲刑曹判書;
安叔老還自燕燕王* 書曰
安景良爲楊廣道都觀察使;
安魯生爲門下舍人.
楊廣道都觀察使安景良
安翊判開城府事;
安景恭爲藝文館提學;
安從約爲右正言;
安翊爲門下評理鷹揚軍上護軍
安瑗知申事; 安景恭朴錫命爲左右副代言;
安魯生禮曹摠郞
安束爲門下舍人;
#高麗史38卷-世家38-恭愍王1-04-07-1355
辛巳賜安乙起等及第.
壬午以[安于器]爲右副承旨.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0-27-1304
己卯贊成事[安珦]建議置國學贍學錢.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0-34-1304
己卯江南僧紹瓊來遣承旨[安于器]迎于郊瓊自號鐵山.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1-10-1305
戊辰命[安于器]掌監試取士. 時儒士康慶龍家居敎授其徒十人中是試來謁呵喝之聲竟夕
不絶. 宗室益陽侯第在其傍異日侯入見王問民*閒事侯因白之王曰: "此老雖不仕誨人
不倦以底于成豈曰小補命吏載穀就賜其家."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1-24-1305
辛丑以韓希愈金琿爲都僉議左右中贊; 王惟紹爲贊成事; 權永知都僉議司事; [安于器]
爲密直副使; 吳演爲左副承旨.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2-11-1306
九月甲申都僉議中贊致仕安珦]卒.
#高麗史32卷-世家32-忠烈王5-33-32-1307
十一月甲子賜 [安奮]等及第.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00-60-0000
乙亥前密直司使 [安전] 卒. <--------------------------------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00-66-0000
是日以趙仁規爲司徒侍中 知光政院事; 洪子藩爲左僕射 知光政院事; 洪奎守司徒
領景靈宮事; 鄭可臣爲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 知光政院事; 印侯爲光政
使 知機務; 金琿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 車信李之 檢校司徒資政院使; 金之淑
同知光政院使 知機務; 安珦 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大學士?林府尹; 柳庇爲光
#高麗史34卷-世家34-忠宣王2-05-10-1313
辛亥以權溥爲永嘉君; 趙簡安于器 爲密直副使.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0-21-0000
九月戊子朔賜安震等及第.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1-31-1314
上王命前選部議郞尹莘傑司憲執義尹宣佐前典校令白元恒侍王講通鑑以辛 爲選部
直郞安珪爲散郞委以銓注. 又諭王專斷國政兼崇佛法戒諸倉庫吏毋以幼主之命耗費財
用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1-45-1314
六月庚寅贊成事權溥商議會議都監事李 三司使權漢功評理趙簡知密直安于器等會
成均館考閱新購書籍且試經學. 初成均提擧司遣博士柳衍學諭兪迪于江南購書籍未達
而船敗衍等赤身登岸. 判典校寺事洪 以太子府 軍在南京遺衍寶 一百五十錠使購
得經籍一萬八百卷而還.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4-28-1317
戊戌遣藝文檢閱安震應擧于元.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5-28-1318
丁巳以尹莘傑知密直司事宋英同知密直司事. 以藝文檢閱安震中制科擢爲藝文應敎摠
部直郞.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7-36-1320
冬十月丁巳遣丹陽府注簿安軸長興庫使崔瀣司憲* {糾}正李衍宗應擧于元.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7-49-1320
戊辰以許富爲選部典書; 李宜風爲摠部典書; 安珪爲代言.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7-50-1320
辛未復置政房以代言安珪掌銓注右常侍林仲沇議郞曹光漢應敎韓宗愈等 之.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8-02-1321
壬午遣內書舍人安鈞索盤纏于慶尙道.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8-18-1321
丁卯王如元四更出自陽善門百官不及拜辭柳淸臣吳潛元忠韓渥尹碩柳有奇安珪等從
之.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08-42-1321
庚戌以崔有 爲大寧君; 金台鉉判三司事; 吳潛朴虛中趙璉僉議贊成事; 趙延壽金元
祥爲三司使; 白元恒韓渥僉議評理; 秦良弼知密直司事; 全英甫知密直司事兼大司憲;
任子松李宜風同知密直司事; 朴孝修李彦忠林仲沇爲密直副使; 閔漬裴挺守僉議政丞
致仕; 許有全朴全之尹珤李瑚閔宗儒守僉議贊成事致仕; 權謙安文凱爲右左代言; 崔
之甫慶斯萬爲右左副代言.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10-23-1323
安軸趙廉崔龍甲應擧于元.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14-02-1327
冬十一月戊子敎曰: "寡人在都五年姦臣謀移國祚侍從之臣盡節輔佐終始一心其功可
錄. 以僉議政丞尹碩化平君金深上黨君韓渥西河君任子松贊成事元忠全英甫 理安文
凱李恭崔濬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16-22-1329
丙寅檢校贊成事安于器卒.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후4-22-1335
丙午上護軍安士由還自元以前王悔過白王王泣下.
#高麗史35卷-世家35-忠肅王2-후7-12-1338
閏月乙未贊成事安文凱卒.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00-17-0000
壬戌以代言李君 前掌令安牧成均丞鄭 都官佐郞鄭世忠掌銓注賜從臣爵嬖幸冒濫
者頗多.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00-33-0000
辛酉賜宋天鳳等及第. 賜知貢擧安文凱玉帶同知貢擧李湛紅 及第第二人洪彦博馬第
三人李達尊 帶.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후2-13-1341
辛丑賜安元龍等及第.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후3-19-1342
.......
前軍簿判書安子由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후4-42-1343
幸和妃殿晩幸判司僕寺事安義第.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0-22-0000
乙卯置書筵以右政丞蔡河中左政丞韓宗愈判三司事李齊賢贊成事朴忠佐金倫權謙興
海君裴佺直城君盧英瑞判密直司事李 知密直司事黃石奇同知密直司事許伯前僉議
理辛裔僉議 理孫守卿密直副使奉天祐安震安軸典理判書閔思平知申事金光轍右
代言韓仲禮左代言河有源右副代言李公遂左副代言尹 鷹揚軍上將軍羅英傑上護軍
尹之彪判通禮門事趙文瑾大司成梁溫判典校寺事鄭怡右司議李衍宗左司議吳珣執義
趙淵祭酒田叔蒙大護軍鄭 掌令李餘慶司藝許齡典儀副令鄭天濡宗簿副令成元度起
居注朴允文起居郞宋天鳳典理正郞金君發李達衷都官正郞金希祖左獻納鄭思度持平
金*??金*??左正言尹安之典校丞全忠典儀注簿孫涌德寧府注簿洪俊更日侍讀.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2-24-1346
.......
乃命府院君李齊賢贊成事安軸韓山君李穀安山君安震提學李仁復撰進又命修忠烈忠宣忠肅三朝實錄.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3-21-1347
六月甲戌遣 理安子由如元獻苧布.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4-05-1348
三月丁酉朔以判三司事李齊賢永山君張沆密直提學安牧提調經史都監又以張沆及僉
議 理全允臧軍簿判書李衍宗前典法判書朴元桂前成均祭酒李達衷前右司議尹*당等
爲吏學都監判事典理摠郞安輯司藝李允升爲副使典理佐郞成俊德直講孫光嗣爲判官.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4-27-1348
癸酉德寧公主徙居于密直副使安牧第庶務皆決焉.
安輔 安祐 安輯 安震 安牧
安宗源 安遇慶 安吉成 安克仁 安楫 安遇祥 安元崇
贊成事安師琦 安景儉爲執義 同知密直司事安叔
以安宗源判三司事; 安翊爲三司左使;
安瑗爲刑曹判書;
安叔老還自燕燕王* 書曰
安景良爲楊廣道都觀察使;
安魯生爲門下舍人.
楊廣道都觀察使安景良
安翊判開城府事;
安景恭爲藝文館提學;
安從約爲右正言;
安翊爲門下評理鷹揚軍上護軍
安瑗知申事; 安景恭朴錫命爲左右副代言;
安魯生禮曹摠郞
安束爲門下舍人;
#高麗史38卷-世家38-恭愍王1-04-07-1355
辛巳賜安乙起等及第.
고려사 101권 열전
안유발(安劉勃)
안유발은 명종(明宗)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시어사(侍御史)로 되었다. 장경 도량(藏經道場) 때에 참지정사 송유인(參知政事宋有仁)이 행향(行香)하였는데 지후 최영유(祗侯崔永濡)가 찬인(贊引-안내자)으로서 행사에 늦게 왔었다. 대감(臺監) 어사(御史)가 그를 탄핵하려 하니 최영유가 안유발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이미 참정의 양해를 얻었으니 그대는 왕에게 아뢰지 말라”고 하였다. 안유발이 말하기를 “나로서는 참정의 의향을 알 수 없으나 일은 왕에게 아뢰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왕에게 아뢰어 무사하게 해버리면 그만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최영유가 왕의 아우인 중 충희(沖曦)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고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단치 않은 과오이니 용서해도 좋다. 그러나 참정이 노한다면 딱한 일이니 여러 참정들에게 말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에 안유발은 이부 낭중(吏部郞中)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부에서 관리를 임명할 때는 임관 후보자 명단에 점을 찍어서 왕에게 보고하고 이것을 점주(點奏)라고 불렀다. 임관된 자들은 반드시 은(白金) 몇 근(斤) 씩을 뇌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판사(判事) 이하 영사(令史)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상례로 여기고 서로 다투어 점을 찍고는 “아무개 아무개는 모두 내가 추천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유발만은 엄정한 태도를 취하고 점(點)을 찍지 않으며 “나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탄복하였다. 벼슬이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이르러서 죽었다.
안유발(安劉勃)
안유발은 명종(明宗)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시어사(侍御史)로 되었다. 장경 도량(藏經道場) 때에 참지정사 송유인(參知政事宋有仁)이 행향(行香)하였는데 지후 최영유(祗侯崔永濡)가 찬인(贊引-안내자)으로서 행사에 늦게 왔었다. 대감(臺監) 어사(御史)가 그를 탄핵하려 하니 최영유가 안유발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이미 참정의 양해를 얻었으니 그대는 왕에게 아뢰지 말라”고 하였다. 안유발이 말하기를 “나로서는 참정의 의향을 알 수 없으나 일은 왕에게 아뢰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왕에게 아뢰어 무사하게 해버리면 그만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최영유가 왕의 아우인 중 충희(沖曦)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고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단치 않은 과오이니 용서해도 좋다. 그러나 참정이 노한다면 딱한 일이니 여러 참정들에게 말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에 안유발은 이부 낭중(吏部郞中)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부에서 관리를 임명할 때는 임관 후보자 명단에 점을 찍어서 왕에게 보고하고 이것을 점주(點奏)라고 불렀다. 임관된 자들은 반드시 은(白金) 몇 근(斤) 씩을 뇌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판사(判事) 이하 영사(令史)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상례로 여기고 서로 다투어 점을 찍고는 “아무개 아무개는 모두 내가 추천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유발만은 엄정한 태도를 취하고 점(點)을 찍지 않으며 “나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탄복하였다. 벼슬이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이르러서 죽었다.
삼국시대에 안씨가 나오는 사서나 금석문 기록은 거의 없다. 고려사에 안씨와 관련된 기록은 1009년부터 등장한다.
신라말-고려전기 금석문에 등장하는 안씨로는 아래와 같은 분들이 있다. 고려사와 금석문에 고려 전기 안씨들이 상당히 등장함에도, 이들의 본관은 대부분 미상이며, 현존하는 어느 안씨 집안의 계보에도 올라있지 않다. 그러면 이 안씨들은 전부 후손이 끊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반면에 고려사의 고려 후기 안씨들은 본관이나 소속 가계의 계보가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 분들은 전기의 안씨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가문의 사람인가도 의문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고려 전기와 후기의 안씨 사이에 실제로 이러한 가계의 단절이 있었을까?
이들의 연결 고리가 될만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순흥안씨의 경우는 시조 때인 고려중기 이전의 계보는 미상이고(광주로부터의 분관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광주안씨의 경우도 시조 이후 14세 시어사공까지 사이의 계보를 100%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고려 전기와 후기의 안씨들 사이에 연결 고리가 될만한 단서를 찾아낼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문헌이나 비석으로 남은 당시 기록은 거의 다 조사된 상태이므로,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본다면 1300년대 이전 분에 대한 새로운 묘지명의 발견에나 기대를 걸 수 밖에 없겠다.
----------------------------------------------------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 안처현(安處玄)
...........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888년)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스님과 동궁내양(東宮內養)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3
924년(경명왕8)에 비문이 완성되었으며
탑비는 후삼국이 통일된 944년(혜종1)에 건립
---------------------------------------------------
신라말-고려전기 금석문에 등장하는 안씨로는 아래와 같은 분들이 있다. 고려사와 금석문에 고려 전기 안씨들이 상당히 등장함에도, 이들의 본관은 대부분 미상이며, 현존하는 어느 안씨 집안의 계보에도 올라있지 않다. 그러면 이 안씨들은 전부 후손이 끊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반면에 고려사의 고려 후기 안씨들은 본관이나 소속 가계의 계보가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 분들은 전기의 안씨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가문의 사람인가도 의문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고려 전기와 후기의 안씨 사이에 실제로 이러한 가계의 단절이 있었을까?
이들의 연결 고리가 될만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순흥안씨의 경우는 시조 때인 고려중기 이전의 계보는 미상이고(광주로부터의 분관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광주안씨의 경우도 시조 이후 14세 시어사공까지 사이의 계보를 100%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고려 전기와 후기의 안씨들 사이에 연결 고리가 될만한 단서를 찾아낼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문헌이나 비석으로 남은 당시 기록은 거의 다 조사된 상태이므로,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본다면 1300년대 이전 분에 대한 새로운 묘지명의 발견에나 기대를 걸 수 밖에 없겠다.
----------------------------------------------------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 안처현(安處玄)
...........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888년)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스님과 동궁내양(東宮內養)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3
924년(경명왕8)에 비문이 완성되었으며
탑비는 후삼국이 통일된 944년(혜종1)에 건립
---------------------------------------------------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
지곡사 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일 것이다.
스님의 휘(諱)는 석초(釋超)이고, 속성은 안씨(安氏)이니 중원부(中原府)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尼藻)로서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하였으니.....
건화(乾化) 2년(912년) 후량(後梁) 태조(太祖) 임신(壬申) 10월 15일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
건덕(乾德) 2년 세재(歲在) 갑자(甲子)에 세수 53세..(입적)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3120
---------------------------------------
997년 안제경(安帝京) : 안성(安城) 호장(戶長)
통화명 안성 장명사 석탑지(統和銘安城長命寺石塔誌)
통화(統和) 15년 정유년(丁酉年 : 997, 성종 16) 4월 27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발원하면서 장명사(長命寺) 5층석탑을 세웠다.
향도(香徒)의 성명(姓名)은 다음과 같다.
동량(棟梁) 대행명도교위(大行明徒校尉) 호장(戶長) 안제경(安帝京), 김정(金正), 최▨(崔▨).
박사(博士) 예령(禮靈) (결락) 김위(金位) 등.
요색(料色) 광▨사(光▨師) 현긍(玄肯).
유장(鍮匠) 지미지(只未知).
------------------------------------------------------
국보 - 59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 1085년(선종2년)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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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직숭(安稷崇:1066~1135) 묘지명(墓誌銘)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01
안직숭은 동주(洞州) 안씨로, 고려태조 때의 때의 공신인 대광(大匡) 안락(安樂)의 후손이다.
안락(安樂) ... 인표(仁表) -- 정화(鼎和) -- 신조(申祚) -- 직숭(稷崇) -- 장남 거중(居中), 차남 거정(居正)
증조 인표(仁表)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이고, 조부 정화(鼎和)는 소부감에 추봉되었다. 아버지 신조(申祚)는 대자대부(大子大傅)에 추봉되었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으로 국자제주 우간의대부(國子祭酒 右諫議大夫) 상빈(尙賓)의 딸이다.
공은 수사공 좌복야 판공부사(守司空 左僕射 判工部事) 유자유(柳子維)의 둘째 딸에게 장가갔다. 자녀로 아들은 두 명이 있는데, 장남 거중(居中)은 어려서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금 수주판관 예빈주부(樹州判官 禮賓主簿)로 있다. 차남 거정(居正)은 음서[廕]로 관직을 얻었는데 장사랑 양온령동정(將仕郞 良醞令同正)직을 받았다. 딸이 한 명 더 있어서, 장사랑 양온령동정 이문저(李文著)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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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69 ~ 1158)의 어머니 안씨
명필로 신품4현의 한 사람인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69 ~ 1158)의 비에 어머니가 안씨라 했다. 외조부의 이름이 없어 아쉽다.
<<..휘는 탄연(坦然)이요, 속성은 손씨(孫氏)며, 선조(先祖)는 (결락) 양현(陽縣) 사람이다.아버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을 세워 교위(校尉)가 되었고, 어머니는 안씨(安氏)의 딸이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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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청(崔惟淸:1095~1174) 묘지명(墓誌銘)
어머니는 □ 대원군대부인 안씨(大原郡大夫人 安氏)로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 덕보(德保)의 딸이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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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묘지명(趙冲墓誌銘)
조충(趙冲 : 1171∼1220)의 본관은 횡천(橫川, 현 강원도 횡성)...
둘째 딸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안유좌(安劉佐)의 □째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공의 문생(門生)이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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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고려 중기 이전의 안씨들에 관한 기록을 모아 보았다. 우리 나라 안씨들의 기원이 과연 모두 같은가에 대한 판단을 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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