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창(安景昌)
1派17世-서파공파
醫科 內醫院의관 御醫 典醫監正 通政大夫 僉知中樞院事 벽온신방(壁瘟新方 辟瘟神方 辟瘟新方)著
충흥사(忠興祠)배향
1604년 경기도 여흥(驪興: 지금의 여주) 출생
1627년 식년시(式年試) 의과(醫科) 급제
1647년 順治(淸/世祖) 4년-茶官
1648년 順治(淸/世祖) 5년-內醫院奉事
1652년 順治(淸/世祖) 9년-醫官
1653년 順治(淸/世祖) 10년-御醫
1653년 順治(淸/世祖) 10년-副提調都承旨 蔡裕後
1654년 順治(淸/世祖) 11년-西副使又求見內醫
1654년 順治(淸/世祖) 11년-特遣御醫
【성 명】 안경창(安景昌)
【생몰년】 1604(선조 37)∼?
【본 관】 순흥(順興) 안(安)
【자·호】 자흥(子興), 예남(禮男)
【저서·작품】 《벽온신방(壁瘟新方)辟瘟神方》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의원
품계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 내의원정(內醫院正)
관직 : 첨지(僉知)
관직 : 수의(首醫)
교육/사상 / 학자 / 의학자
1604(선조 37)∼?.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흥(子興), 안예남(安禮男)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의원이다.
인조 5년(1627) 식년시(式年試) 의과(醫科)에 급제, 의관으로 활동하였고, 전의감정(典醫監正)을 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효종 4년(1653) 서해(西海) 지역에 고역(줢疫)이 크게 일어나 인명피해가 많아지자 왕명으로
《벽온신방(壁瘟新方)》1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여역(肌疫 : 장티푸스 혹은 발진티푸스)에 대한 치료와 예방에 관한 것으로 허준(許浚)의
《신찬벽온방(新纂壁瘟方)》의 전통을 이은 것이나, 그 내용은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한글 번역을 붙여 간행 · 반포한 것이다.
【참고문헌】 韓國圖書解題, 韓國醫學史
안경창(安景昌)
1604(선조 37)∼? 조선 인조∼효종연간의 의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흥(子興). 경기도 여흥(驪興: 지금의 여주) 출생.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안의순(安義順), 아버지는 안예남(安禮男)이고, 어머니는 이천룡(李天龍)의 딸이며, 처는 유수근(兪壽根)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23세로 정묘식년시에 9명을 뽑은 의과에 급제, 내의원 내의(內醫)로 있었으며 벼슬이 통정대부에 올랐다.
1653년(효종 4) 황해도지방에서 질병이 크게 창궐하자 이를 다스렸다.
이때 많은 사망자가 있어 효종은 내의원에서 약재를 꺼내어 구료하게 하였으나, 약물만으로 많은 사람을 구제하기 어려워 치료법과 약물을 널리 알려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진언을 듣고, 당시 어의인 안경창에게 옛 《벽온방 辟瘟方》들을 연구하여 쉽게 간략한 책으로 편찬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하였는데 이 책이 《벽온신방 辟瘟新方》 1책이다.
안경창(安景昌)
순흥인
1604년(선조37년)에 경기도 여흥(지금의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자흥(子興). 조부는 통정대부 안의순(安義順), 부는 안예남(安禮男)이다.
어머니는 이천룡(李天龍)의 딸이며, 장인은 유수근(兪壽根)이다.
1627년(인조5) 23세때 정묘식년시에서 9명을 뽑은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내의(內醫)로 있었으며 벼슬이 통정대부에 올랐다.
조선시대 의학(醫學)자로 궁중의 어의(御醫)를 지냈다.
벽온신방(壁瘟新方) 1653년(효종4)에 황해도지방에서 질병이 크게 창궐하자 이를 다스렸다.
이때 많은 사망자가 있어 효종은 내의원에서 약재를 꺼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약물만으로는 많은 사람을 구제하기 어려워
치료법과 약물을 널리 알려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진언을 듣고, 당시 어의인 안경창에게 옛[벽온방辟瘟方]들을 연구하여 쉽고
간략한 책으로 편찬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언해하였는데 이 책이 벽온신방(壁瘟新方)1책이다.
생부(生父)
안효남(安孝男)
내의(內醫) 折衝將軍 通政大夫 贈戶曹參議
안경창(安景昌)
순흥인
벽온신방(壁瘟新方壁瘟新方)(奎11570), 安景昌(朝鮮)等受命撰.
1冊(20張) 木板本 30.6×20.6cm.
四周雙邊 半郭:21.6×16cm.
有界 10行 1行 20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傳染病을 퇴치하는 방법을 기록한 醫書이다.
1653년(孝宗 4)에 海西地方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희생자가 많았으므로 왕이 이 소식을 듣고 藥材를 내려 치유하여 주도록 하였다.
이때 趙復陽이 "藥物은 많은사람을 救濟할 수 없으니 치료법이나 藥名을 널리 알려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하여
禮曹判書 李厚源이 醫官을시켜 ≪벽온방壁瘟方≫을 상고하여 增減한 후 印布하도록 정하였으므로 孝宗이 御醫인 安景昌 등에 명하여 이책을 완성한 후에 國文으로 諺解를 덧붙여 ≪벽온신방壁瘟新方≫이라 이름하여 校書館에서 刊行, 八道의 諸邑에 널리 頒布케 한 것이다. 이책이 初刊本인지는 未詳이며 한편 1723년(景宗 3)에 甲寅活字로 다시 再刊된 本이 있다. 卷頭에는 1653년(孝宗 4)에 都承旨兼兩館大提學인 蔡裕後의 序文이 있다. 目錄과 대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瘟疫病源」에는 瘟疫이 일어나는 원인과 이어 초기의 治療方法으로 瘟疫의 증세가 나타나면 땀을 내게하는 것, 升麻葛根湯의 효능과 調劑의 方과 복용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桃葉, 蓮根蔥白, 芥采子·浮萍, 忍冬藤, 乾葛, 大黃 등 우리 생활 주위에 많이 있는 草藥으로 초기의 瘟疫을 치유하는 방법, 病이 4·5일 경과한 중기의 治癒法으로 「瘟疫半表半裏宜和解」에서는 和解를 중시하고 小柴胡湯의 효능과 조제법과 복용법, 6·7日 경과한 후의 治癒法으로 「瘟疫裡症宜下」에 大柴胡湯의 약효와 調劑方과 服用法을 설명 하였다. 그리고 人糞, 猪糞, 臘雪水, 地龍汁, 藍葉汁, 水中細苔, 竹瀝, 月經水, 生葛 根汁, 水漬法, 蛇萄, 生藕汁, 滑石末, 梔子, 茵蔯葉, 瓜체妙, 菉豆粥, 陳米 등 草藥에 대하여 症勢에 따라 草藥을 쓰는 方法과 「瘟疫禳法」, 「瘟疫벽法」등에 瘟疫을 물리치고 피하는 방법, 「不傳染法」에 瘟疫이 전염되지 않게 하는 방법 등을 列記하였다. 끝에는 「禁忌」라 하여 병자가 금하여야 할 사항을 설명하였다. 原文을 漢文으로 기술하고는 모두 한글로 諺解를 달아 누구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傳染病의 치료 및 退治方으로 종래의 ≪壁疫神方≫ ≪簡易壁瘟方≫을 토대로 엮었으나 당시의 실정에 알맞는 부분들도 많다
요즘 우리나라는 조류독감 발생으로 뒤숭숭합니다. 온갖 방역체계를 다 동원해보지만
아직 조류독감 발생 원인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조류독감이 발생한 곳에는
방역당국에서 나가 출입을 통제하고 닭들을 파묻으며,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런데
옛날에 전염병이 돌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조선시대 효종 때인 1653년 봄 황해도에 문둥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자
임금이 어의 안경창에게 명하여 당시에 유행하는 전염병의 특성과 조선의 실정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풍토와 조선인의 체질에 알맞은 치료법을 담은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이 바로 ‘벽온신방(壁瘟新方)’으로 전염병과 기근 등 재난에 대비한 방역
전문서입니다. 이 책은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 언해를 붙여
놓았으며, 조리법이나 전염예방법도 민간에서 간편하게 행할 수 있는 방법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벽온신방壁瘟新方
1653년(효종 4) 봄 황해도에 여역(肌疫)이 크게 유행했을 때 왕명을 받아 안경창(安景昌, 1604~?)이 편찬한 온역(瘟疫)의 치료에 관한 의서(醫書). 1권 1책.
《벽온신방》은 왕명에 따라 안경창 등이 편찬 언해해서 1653년(효종 4년)에 교서관에서 간한 책으로, 돌림병 퇴치 방법을 기록한 의서이다.
辟瘟新方序
癸巳春。海西癘疫大熾。民多死亡者。上聞而憂之。分出內局藥材以濟之。筵臣趙復陽以爲藥物不可以普濟。莫如備示其治法藥名。禮曹判書臣李厚源請令醫官就攷辟瘟舊方而增減之。印布中外。上從之。遂命御醫臣安景昌等重加究閱。參以經驗。量減其材料之難辦者。務增其俗方之易試者。仍諺釋其說。名之曰辟瘟新方。令校書館刊出。班于八路諸邑。使遐裔僻村蚩氓婦子。咸得通解。按類而施方。隨變而投劑。繼之以辟禳之法。補攝之術。嗚呼。我民其庶乎有瘳矣。我聖上仁民濟衆之意。其亦至矣。臣竊觀周禮醫師篇云。四時皆有癘疾。而春有痟直疾。其註曰癘者。氣不和之疾也。蓋六氣和則民自無是疾。今我聖上仁民濟衆之意。足以斡回和氣。苟然則亦安所用是方哉。臣不勝欽頌顒望之懷。略敍顚未而弁諸卷。是歲閏七月旣望。具官臣某。拜手稽首謹序。
湖洲 蔡裕後(1599 : 宣祖32 ~ 1660 : 顯宗1)의 文集 채유후(蔡裕後)
한국문집총간 > 호주집(湖洲集) > 湖洲先生集卷之五 > 序 >
| 표제/책임표시사항 | 壁瘟新方 / 安景昌(朝鮮)...等撰 | |||
| 판사항 | 金屬活字本 | |||
|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刊寫年未詳] | |||
| 형태사항 | 1冊 : 四周單邊 半郭 25.0 x 18.0 cm, 有界, 10行17字 註雙行,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33.0 x 22.0 cm | |||
| 주기사항 |
| |||
| 표제/책임표시사항 | 壁瘟新方 / 安景昌(朝鮮) 等受命撰 | |||
| 판사항 | 木板本 | |||
|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孝宗 4(1653)] | |||
| 형태사항 | 1冊(20張) : 四周雙邊 半郭 21.6 ×16.0 cm, 有界, 10行20字, 上下花紋魚尾 ; 30.6 ×20.6 cm | |||
| 주기사항 |
| |||
표제/책임표시사항
壁瘟新房[諺解] / 安景昌(朝鮮) 等撰
![]()
판사항
金屬活子本(壬辰字)
![]()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校書館, [孝宗 4(1653)]
![]()
형태사항
1冊(22張) : 四周單邊 半郭 24.0 ×16.6 cm, 10行17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33.0 ×21.4 cm
![]()
주기사항
序: 癸巳(1653)春...歲秋七月旣望...蔡裕後拜手稽首謹序
표제/책임표시사항
壁瘟新方 / 安景昌(朝鮮)...等編
![]()
판사항
金屬活字本(戊申字)
![]()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肅宗 20(1700)頃]
![]()
형태사항
1冊 : 四周雙邊 半郭 24.1 x 16.7 cm, 有界, 10行17字 小字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34.3 x 21.2 cm
![]()
주기사항
序: 是歲(1653)秋七月旣望尙瑞院臣蔡裕後拜手稽首謹序
國漢文混用임
원서명
辟瘟新房
현대어서명
벽온신방
청구기호
가람古 615.135-An1b
편저자(한자)
安景昌(朝鮮) 等撰
판본사항
壬辰字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1冊(22張)
편저자(한글)
안경창(조선) 등찬
간행연도
[刊年未詳]
간행자
[校書館]
책크기
33×21.4cm
匡郭
四周單邊, 半葉匡郭:24×16.6cm, 有界, 10行 17字
版心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표기문자
諺解本
表紙,版心,卷頭書名
序,跋,卷首,卷末
序:癸巳(1653)…蔡裕後
表題紙,內題紙
附
藏書記,內賜記
刊記
자료소개
孝宗代에 海西地方에 발생한 전염병을 계기로 기존의 ≪辟疫神方≫, ≪簡易辟瘟方≫을 토대로 하여 당시 실정에 알맞게 편찬한 刊行年度 未詳의 전염병퇴치에 관한 醫書
목차
瘟疫病源, 瘟疫半表半裏宜和解, 瘟疫裡症宜下, 瘟疫禳法, 瘟疫辟法, 不傳染法, 禁忌
| ||||||||||||||||||||||||||||||||||||
|
| ||||||||||||||||||||||||||||||||||||
| ||||||||||||||||||||||||||||||||||||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辟瘟新方諺解
벽온신방언해
가람 古 615.135-An1b
瘟疫에 관한 方文을 싣고 언해를 붙인 책이다. 蔡裕後의 서문에 따르면 1653년(효종 4)에 이전에 있었던 ‘辟瘟舊方’의 내용을 增減하여 언해를 붙여 간행한 것이라 한다.현재 이 책의 異本은 목판본과 활자본 두 가지가 전하는데‚ 규장각 소장의 <奎 11570>은 목판본이고‚ <가람 古 615.135-An1b>는 활자본이다. 두 이본은 내용상의 차이는 없으나 版式 등 형태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목판본은 四周雙邊이고‚ 10行 20字(서문은 19字)인 반면 활자본은 四周單邊이고 10行 17字로 되어 있다. 자수의 차이로 말미암아 전체 장수도 달라져 목판본은 20장‚ 활자본은 22장이다.이 책이 원래 간행된 시기는 서문과 ≪효종실록≫1653년(효종 4) 3월 甲子條의 기사로 미루어 볼 때 1653년이라 할 수 있으나‚ 현전 목판본과 활자본은 후대의 중간본으로 보인다. 특히 활자본은 戊申字(1668년 주조)로 인쇄된 것이다.목판본과 활자본의 내용은 대부분 일치하지만 약간의 차이도 보인다. 목판본의 ‘먹으라’(4b)가 활자본에는 ‘먹이라’(5a)로 되어 있고(다른 곳은 모두 ‘먹으라’임)‚ 목판본의 ‘엿쇄 닐웬만의’(6b)가 활자본에는 ‘엿쇄 닐헨만의’(7a)로 되어 있다. 또 활자본에는 ‘슌마다 냥식 이 달혀’(5b)로 되어 있는 부분이 목판본에서는 ‘슌마다 냥식 이 달혀’(5a)로 한 글자가 빠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만히 어터(목3a‚ 활3a)‚ 덥게 여 며그라(목4a‚ 활4b)‚ 대기 반 잔과 우믈믈 반 잔을 머그라(목8b‚ 활9b)’와 같이 오각과 오식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이 책은 국어사 자료로서 대체로 17세기의 언어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표기면에서 ‘(목9b)‚ (목4a)‚ 디오고(목17b); 라(목13a)‚ 로(목5b)‚ 니(목3b)‚ (목10a)’ 등 어두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가 모두 쓰였는데 ‘밧(목2a)∕밧긔(목5a)‚ 맛이(목2a)∕맛당이(목5a)∕맛당히(목5b)‚ 라(목13a)∕고(목15a)∕기면(목15a)’과 같은 혼란을 보인다. 어간말 유기음 종성 역시 ‘닙흔(목3a)‚ 닙플(목8a)’과 같이 혼기되어 나타난다. 이전 시기의 자료에서도 물론 나타나는 사실이지만 ‘됸니라(목3a)‚ 시병 열라(목8a)‚ 소게 드런(목6a)’처럼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도 다수 눈에 띈다.형태면에서는 ‘’(小豆)이 ‘’(목15a)으로‚ ‘봇가’가 ‘복가’(목11a)로 표기된 예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각각 어간이 ‘’‚ ‘볶-’으로 재구조화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용언 ‘만-’(多)의 경우에는 재구조화된 모습과 재구조화되기 이전의 모습이 공존하여 ‘열이 만하’(목5b)‚ ‘열이 만여’(목8b)와 같이 나타난다.격조사의 경우 ‘그 내가 병긔운을 헤티니’(목15b)에서 주격조사 ‘-가’가 나타나고‚ 처격조사는 ‘-에‚ -‚ -의’가 쓰였으나 ‘-의‚ -에’가 우세하고 ‘-애’는 쓰이지 않았다. 주제 보조사는 자음 아래에서 ‘-은’이‚ 모음 아래에서 ‘-’이 우세하게 나타난다.목판본인 <奎 11570>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홍문각에서 간행된 바 있다. (김진형)
영조 11권, 3년(1727 정미 / 청 옹정(雍正) 5년) 윤3월 12일(기사) 2번째기사
《벽온신방》 1책을 계하하여 등서한 후 내외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특별히 《벽온신방(辟瘟新方)》 1책을 계하(啓下)하며 오부(五部)로 하여금 등서(謄書)하여 도성(都城) 백성에게 두루 나누어 주도록 하고, 이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인출(印出)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特下《辟瘟新方》一冊, 令五部謄書, 遍給都民, 仍命印送于八道、兩都。
영조실록 > 영조 3년(1727년) > 영조 3년 윤3월 > 영조 3년 윤3월 12일
<순흥안씨 집성촌 충주 금가면 잠병리 축동.금병>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축동·금병에 있는 순흥안씨 집성촌
<명칭유래>
잠병리가 공식 행정구역 명칭이 된 것은 1914년부터지만 잠병리란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사용되던 이름이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잠병리는 관문에서 북쪽 20리에 있고, 82호에 남자 205명, 여자 33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보다 20년 뒤인 1780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충주목 가차산면조」는 잠병리는 관문에서 북쪽 20리에 있고, 89호에 남자 266명, 여자 17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70년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충주목 방리조」에도 잠병리는 관문에서 북쪽 20리에 있고 269호에 남자 394명, 여자 422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성과 변천>
태고산의 또 다른 줄기는 남서로 뻗어 잠병리 남쪽에서 내기대봉[105.5m]이 되고 하담리 뒤를 돌아서 한강에 닿는다. 또한 태고산에서 발원한 개울이 잠병리 금병과 축동 사이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든다. 잠병리 일대의 산은 평평하고 낮아 과수농사와 밭농사에 이용되고, 산능선 사이로 논이 있다.
관련 유적으로 안경창(安景昌)을 배향한 충흥사(忠興祠), 안명원(安命遠) 묘, 안복원(安福遠) 묘가 있다. 충흥사는 음력 10월 8일 제사를 지내고, 시제는 10월 10일에 지낸다. 안명원 묘와 안복원 묘 앞에는 한 그루 향나무가 있는데 안명원과 안복원이 중국에 다녀 올 때 사용했다가 땅에 꽃아 둔 지팡이가 자라서 향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순흥안씨 잠병리 집성촌에 이르는 길은 금가면 소재지인 도촌리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24호선을 따라 하소로 가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순흥안씨 잠병리 집성촌에 도착한다. 또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서 국도 19호선을 따라 가다 율능리 바마루에서 지방도 24호선을 따라가도 된다.
안의순(安義順)ㅡㅡ>안련옥(安連玉)ㅡㅡ>안효남(安孝男),안예남(安禮男)ㅡㅡ>안경창(安景昌)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의 중국에서 가져온 지팡이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태고산에서 초당마을로 가다보면 순흥안씨 산소에는 고사한 향나무 세그루가 있다. 흰색의 향나무로서 대개 나무는 고사하면 썩어 버리는데 100여년을 서 있으면서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내력은 조선 고종 17년 순흥 안씨 문중으로 전관 좌의정을 지낸 안대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동정호에서 만난 기인으로부터 기념으로 세개의 지팡이를 받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선인은 선조들의 산소에 꽂아 두라고 했고 가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 선조들 묘 에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잎이 없는 무엽수가 가지를 치면서 자랐고 자손이 번성하고 인재가 속출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촌노들에 따르면 구한말까지는 잎이 무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성장이 멈춘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를 노가지고개(수풍말에서 하소로 통하는 고개)라고 하는데 향나무와 노가지 나무의 형태가 비슷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세 그루의 나무 줄기가 만병통치약이라는 민간의 잘 된 소문으로 깎아간 흔적도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전설과 유래가 많이 남아 있어 미소를 지게 하는데 고향의 정취와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유산이라고 본다.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가꾸고 아껴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충흥사(忠興祠)
소재지 :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777번지(축동길 14-10)
순흥안씨 17세 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안경창(安景昌)을 배향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재실로 솟을대문을 설치하고 일자 건물의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었다.
솟을대문 앞쪽으로 관리사를 지어 여기서 재물을 준비하고 타지에서 온 후손들이 하루 숙식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축동마을 중앙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순흥안씨 집성촌(축동마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의 순흥안씨 입향선조는 1파 10세 서파공 안리(安理)의 후손 용양위부사과를 지낸 17세 안경창(安景昌)으로 1600년경 경기도 양주에서 정착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했다.
안경창의 세 아들 중 안명원(安命遠)의 후손이 잠병리 금병에 주로 세거하고, 안복원(安福遠)의 후손은 주로 잠병리 축동에 세거하고 있다.
잠병리(岑屛里)는 본래 충주군 가차산면 지역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여 명명되었다. 법정리인 잠병리는 3개의 행정동(축동·금병·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순흥안씨 잠병리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은 축동(일명 싸리골)과 금병마을이다.
축동마을안에는 안경창(安景昌)을 배향한 충흥사(忠興祠)가 있다.
축동마을에서 남쪽 400여m지점의 낮은 산 구릉에 안명원(安命遠) 묘, 안복원(安福遠) 묘가 있는데, 잠병리 묘역은 충원대로 금가삼거리에서 금가면사무소로 가는 강수로길을 1.7km 가면 잠병리길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잠병리길을 계속가면 우측 초당경로당(태고사 방향)과 좌측 씨름터길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수풍말구렁이라는 시름터길 104번지 앞에서 우측으로 60여m 가다가 좌측으로 200여m 들어가면 묘역이다. 묘역앞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다.
잠병리길 금병노인정 앞에서 좌측으로 500여m 들어가면 축동마을 중앙에 충흥사가 있다.
이곳 금병노인정 앞에서는 축동마을 충흥사와 좌측 남쪽 산 기슭에 회색빛의 커다란 싸리나무 3개가 서있는 묘역이 보인다.
금병노인정 앞에서 잠병리길로 400여m 가면 우측에 서파공 후손 기적비가 서 있다.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축동(杻洞)마을 자랑비
소재지 :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758번지 축동회관 옆
마을 자랑비
우리마을은 싸리나무 축자 마을동자를 써서 축동(杻洞)이라 한다. 이 유래는
조선 선조2년 순흥안씨 17대손 경창이 8도를 암행하던중 태고산 아래를 지날 때 산세가 좋고 경관이 수려하여 이곳에 정착 자손이 번창하여 씨족 촌락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마을 중앙에는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많이 있어 붙어진 이름으로 지금도 인근마을에서는 싸리골안씨라 할 정도로 순흥안씨 태성촌을 이루게 되었고 마을 뒷산 순흥안씨 선영묘 앞에는 수백년된 묵은 향나무 3그루가 있는데 이 향나무는 경창의 아들 복원이 국명으로 중국 사신을 갖다가 지팡이 3개를 가져와 이곳에 꽂은 것이 싹이나고 자랐는데 지금은 죽은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썩지 않고 있으며 옛날에는 3년만큼 싹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후에 싸리나무가 많았던 곳에 선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햐여 사당을 신축하여 충흥사라 칭하고 매년 음력 10월 8일에 사당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13개 성씨 76세대 350여명이 상겸하애 정신을 바탕으로 한가족 같이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 정겹고 아름다운 복지 축동마을을 후손들에게 기리기리 전하고자 이비를 세운다.
1992년 7월 1일
축동마을 주민일동
잠병리 축동 향나무 3그루
이 향나무는 가선대부 한성부윤 안명원(安命遠:初諱 大成)과 통정대부 안복원(安福遠:初諱 大信) 묘역 앞에 서 있는 나무로 내력은 조선 고종 17년 안복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동정호에서 만난 기인으로부터 기념으로 세개의 지팡이를 받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산소에 꽂아 두면 가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에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잎이 없는 무엽수가 가지를 치면서 자랐고 자손이 번성하고 인재가 속출했다고 전한다. 내려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옛 구한말까지는 잎이 무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성장이 멈춘 것으로 보인다.
죽은 향나무가 심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 썩지도 않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묘역앞에서 바라보며는 저멀리 금병마을이 내려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