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裴克廉)
○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고려말에 급제하였고 청렴하고 삼감으로써 칭송되었다. 태조(太祖)를 추대함으로써 개국공신이 되어 관직이 좌시중(左侍中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고려말에 예언이 있기를, “옷 아니 입은 군자[非衣君子]가 삼한을 다시 바르게 할 것을 안다.” 하였는데, 세속 사람들은 비의(非衣)는 곧 배극렴이라고 하였다. 《국조보감》
○ 고려말에 왜놈의 배 5백 척이 3도(道)에 쳐들어 왔는데 배극렴은 사근역(沙斤驛) 동쪽에서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연패하여 냇물이 다 붉어졌다고 하며, 지금도 혈계(血溪)라 불리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 일찍이 진양목사(晋陽牧使)로 나가서 어린 잣나무를 산중에서 옮겨다가 공관에 심었는데 만기가 되어 떠났으나 진양(晋陽) 백성들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다 하여, 시중백(侍中栢)이라 이름하였다. 동상
○ 극렴이 왜놈과 황산강(黃山江)에서 싸울 때, 한 왜구의 괴수가 큰 쇠 투구를 쓰고 손과 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옷을 두르고 보병으로 하여금 좌우익을 삼고 말을 달려 전진해 오는 것을 우리 군대로 계속 공격하여 이를 목자르고 드디어 크게 이겼다. 〈열전(列傳)〉
[주D-001]소공(召公)의 감당(甘棠) :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지방을 순행하면서 감당 나무 아래에서 쉬어갔는데, 그 후에 그 지방 백성들이 소공이 쉬던 나무라 하여 잘 보호하였다 한다.
-《대동야승(大東野乘)》 해동잡록(海東雜錄) 3 본조(本朝)-
배극렴(裵克廉)선생과 순흥안씨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충숙왕 12년(1325)∼태조 1년(1392)]선생 묘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송산3리 산28번지에 있다.
성주배씨보(星州裵氏譜)에 배극렴(裵克廉)선생이 순흥안씨 3파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7세조) 선조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고 배씨가문에서 안씨족보(安氏族譜)에도 등재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어도 양촌(陽村)선생이 지은 문간공의 묘지(墓誌)에 일등공신(一等功臣)인 배극렴선생이 빠져있으며 더구나 문간공과 배극렴선생과는 나이 차이가 불과 1년 밖에 안 되어 수긍하기 어려워 족보에 등재를 못하고 있다.
아마 종원(宗源)선조의 형님인 종기(宗基)선조의 따님이 아니었나 하는 조심스런 생각이나 아드님인 사조(思祖)선조가 우왕 4년 무진 14년(1388)참화로 인해 후손이 절손되어서 그런지 근거 자료가 없다.
배극렴선생이 나이 68세에 졸(卒)하자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9세조)선조가 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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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2월 2일(무신)
친히 배극렴의 빈소에 가서, 장례를 주관하던 안순을 불러 조문하다
임금이 친히 배극렴(裵克廉)의 빈소(殯所)에 나아가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슬퍼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고 주상(主喪)하는 사람을 불러서 조문(弔問)하였다. 배극렴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누이의 외손(外孫)인 안순(安純)이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배극렴선생 묘역
배극렴선생 묘
정경부인 순흥안씨 지단비
배극렴선생 묘
배극렴선생 재실-경절재
필암 배극렴(筆菴 裵克廉) 묘·신도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산28
배극렴[裵克廉, 충숙왕 12년(1325)∼태조 1년(1392)],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주금당(晝錦堂), 시호는 정절(貞節), 본관은 성산(지금의 성주), 위위시소윤 현보(玄甫)의 아들이다.
문음(門蔭) 출신으로 진주의 수령·상주목사·계림윤·화령윤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고, 우왕 2년(1376)부터 진주, 합포, 욕지도, 하동, 울주, 청도, 사천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며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여 1380년 밀직부사에 올랐다.
1388년의 요동출병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하여 위화도회군을 도와주고, 창왕 1년(1389) 판개성부사의 요직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문하찬성사로 승진한 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 2년(1390) 회군공신에 추록되고, 그 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3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가 되어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로 개경의 내성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그해 7월 문하우시중으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에 봉하여졌으며, 문하좌시중이 되고, 1392년 11월 죽어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이 되었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이 1392년 8월 세자로 책봉되는 데 관여하였다 하여 뒤에 태종에 의하여 폄하되었다.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이 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말년에 낙향하여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어래산 아래에 살았는데 태조가 친히 세 차례나 찾아왔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삼방이라하고 산 이름을 어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최초의 영의정 배극렴 묘소는 송산리 산28번지(두타산 대야봉 아래)에 있는데 가로 347cm, 세로 437cm, 높이 170cm로 장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묘소는 후손들이 관리를 잘못하여 실전하였다가 조선 말기에 찾아 주변의 민묘를 모두 옮기게 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며, 봉분에는 사각의 호석을 둘렀으며, 상석·향로석·장명등·문인석·양석이 갖추어져 있다. 송산리 마을 입구에는 5~6 그루의 노거수가 있어 이 마을이 오래된 마을임을 암묵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마을 안에는 배극렴 선생 재실인 경절재(景節齋)가 있고, 재실에서 100m정도를 더 들어가면 좌측 11시 방향 양지바른 곳에 선생의 묘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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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소방서 옆 송산교를 건너 증평읍 송산리 방면으로 증평종합사회복지관을 지나 송오리마을 두타산 대야봉 아래에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배극렴(裵克廉 : 1325∼1392)의 묘소가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배극렴의 묘소는 장방형으로 가로 3m 47㎝, 세로 4m 37㎝, 높이 1m 70㎝이고 상석은 가로 1m 20㎝, 세로 84㎝, 높이 19.5㎝이다. 묘소에는 호석(護石)이 들러 있고, 앞에는 장명등(長明燈)과 문관석(文官石), 양석(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남아있다. 또 묘소에는 20여m 아래에는 1888년(고종25) 당시의 대사헌 박성양(朴性陽)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해 진주․상주목사(정3품), 계림․화령부윤(종2품), 합포진 첨사(종3품) 등을 역임했고, 1376년(우왕2)과 1378년(우왕4) 왜구격파에 공을 세웠다. 이성계 휘하에서 여러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1388년(우왕14)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 회군을 결행했다. 이후 1392년 이성계를 추대, 개국 일등공신이 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이르렀다.
<송산마을 입구 노거수>
송산마을은 이 노거수 사이 길로 들어간다.
<배극렴 선생 재실 '경절재'>
<배극렴 신도비>
신도비는 고종 25년(1888) 박성양(朴性陽)이 비문을 지어 세운 것으로 높이 200cm, 폭 45cm, 두께 31cm이다.
<도문화재지정서>
- 제98호 - 도문화재지정서 - 명칭 배극렴묘소 - 수량 1곽
위 문화재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함.
1994. 12. 30.
충 청 북 도 지 사
<정경부인 순흥안씨지단>
<조선 최초의 영의정 배극렴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