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근(安洪根)
1派30世-참판공파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사촌동생이고, 안명근(安明根)의 친동생이다.
안홍근 선생은 1918년4월28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포포프스카야 거리 18번지에 있는
조선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정식 창당선포를 위한 협의회 자리에 있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인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의 지도 하에 이동휘, 김립, 유동열, 박애, 이인섭, 심백원, 김용환, 오성묵, 이한영, 오와실리, 오하묵 등과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이다.
이들은 같은해 5월11일 러시아 하바로브스크 포포프스카야거리15번지에 있던 조선인민회관에서
한인사회당의 정식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해 중앙간부를 선출하고, 당기관지 ‘자유종’ 창간및 장교 훈련을 위한 군사학교(교장 유동열) 설립을 결정 반일, 반제의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했다.
안홍근은 또한 1918년8월말 노령이만에서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했다.
당시 하바로크스크에서 원동소비에트인민위원회는 전쟁을 중지하고 빨치산 투쟁을 하기 위해 적위군들을 아무르주 삼림으로 후퇴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안홍근은 부라뵤바-아무르스카야역 전투와 이만 전투에서 왜병이 나타나자 러시아 지도자들의 명령을 위반하고
“최후 한 사람까지 왜놈을 죽이고 우리의 원수를 값자”고 달려나가 단병접전에 뛰어들었다.
이만에서 퇴각할 때 왜놈만 보이면 “나의 형 안중근과 안명근의 원수를 갚겠다”며 대오에서 뛰어나갔다고 항일무장투쟁독립운동가 이인섭선생의 수기에서도 선생의 족적이 확인되 전하여진다.
안홍근은 1918년 9월 초 크라스나야 레치카역에서 다른 동지들과 중국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3명을 체포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매제인 최익현(崔益馨1977년유공자추서)선생과 해방이후 황해도 옹진으로 이사하여 옹진중학 서무주임을 하면서 적산과수원 1만여평을 매입하여 이를 함께 경작운영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국군5명을 자신의 과수원에 숨겨줬다는 게 이유로 북한군에 체포되어 1950년10월15일경에 후퇴하던 북한군에의해 피살되었다.
한편, 안홍근선생의 친형인 안명근(安明根)선생은 1910년 독립군 자금모집 활동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한 공적으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고,
2010년 국가보훈처는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安洪根)선생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시베리아 내전 후 블라디보스토크 수청촌(水淸村)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전달한 공적 등을 발굴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안중근 의사 사촌동생 안홍근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10-08-13 10:57
한 가문에 독립유공자 15명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安洪根) 선생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시베리아 내전 후 블라디보스토크 수청촌(水淸村)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전달한 공적 등을 발굴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고 13일 밝혔다.
이로써 안 의사 가문은 그동안 포상된 안중근 의사(1962, 대한민국장)ㆍ안명근(1962, 독립장)ㆍ
안춘생(1963, 독립장)ㆍ최익형(1977, 독립장)ㆍ안경근(1977, 독립장)ㆍ안정근(1987, 독립장)ㆍ
안봉생(1990, 애국장)ㆍ오항선(1990, 애국장)ㆍ조순옥(1990, 애국장)ㆍ안원생(1990, 애족장)ㆍ
안공근(1995, 독립장)ㆍ안낙생(1995, 애족장)ㆍ조성녀(2008, 애족장)ㆍ안태순(2009, 애족장) 선생 등
모두 15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이는 특히, 올해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안홍근 선생은 1918년 4월 28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포포프스카야 거리 18번지에 있는
조선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정식 선포를 위한 협의회 자리에 있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인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의 지도 하에 이동휘, 김립, 유동열, 박애, 이인섭, 심백원, 김용환, 오성묵, 이한영, 오와실리, 오하묵 등과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이다.
이들은 같은 해 5월 11일 포포프스카야 거리 15번지에 있던 조선인민회관(보훈처에 따르면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같은 번지를 포함한 부지에는 현재 빵공장이 있음)에서
한인사회당의 정식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해 중앙간부를 선출하고, 당기관지 ‘자유종’ 창간 및 장교 훈련을 위한 군사학교(교장 유동열) 설립을 결정했다.
안홍근 또한 1918년 8월 말 노령 이만에서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했다.
당시 하바로크스크에서 원동소비에트인민위원회는 전쟁을 중지하고 빨치산 투쟁을 하기 위해 적위군들을 아무르주 삼림으로 후퇴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안홍근은 부라뵤바-아무르스카야 역 전투와 이만 전투에서 왜병이 나타나자 러시아 지도자들의 명령을 위반하고
“최후 한 사람까지 왜놈을 죽이고 우리의 원수를 값자”고 달려나가 단병접전에 뛰어들었다.
이만에서 퇴각할 때 왜놈만 보이면 “나의 형 안중근과 안명근의 원수를 갚겠다”며 대오에서 뛰어나갔다고 전해진다.
안홍근은 1918년 9월 초 크라스나야 레치카역에서 다른 동지들과 중국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3명을 체포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안홍근 선생의 친형인 안명근(安明根) 선생은 1910년 독립군 자금모집 활동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한 공적으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다.
헤럴드경제 > 뉴스종합 > 사회/교육 > 최신기사 김대우 기자
자(子)
1派31世 1派32世
안덕생(安德生)ㅡㅡ>안기동(安基東)안기선(安基善)안기성(安基成)안기후(安基厚)안기옥(安基玉)안기방(安基芳)
안도생(安道生)ㅡㅡ>안기준(安基俊)안기언(安基彦)안기숙(安基淑)
안무생(安武生)ㅡㅡ>안기철(安基哲)ㅡㅡ>안영희(長女)
전자족보에는
안홍근(安洪根)할아버지의 生年과 墓의 기록은없고 1950년 10월 15일경에 북한군에의해 피살되심만을 기록되었네요.....
안중근 가계도
안중근(安重根)의 친인척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유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친인척의 존재가 함께 부각되기도 한다. 유럽의 교회사에서는 역대 교황 중에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지탄을 받는 인물도 나타난 바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자가 친인척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은 혈연을 중시하던 전근대 사회의 한 유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친인척 관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오늘의 우리까지도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곤욕을 치룬 인물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안중근은 죽어서도 친인척 관리에 남다른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애국선열’이며 ‘신앙인’이었던 안중근의 모범은 그의 친인척을 채근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바른 길로 내닫게 했다.
안명근의 독립운동
안중근의 친인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할아버지 대까지는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안중근의 조부는 아들 여섯 명을 낳았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그 세 번째 아들이었다. 남자 형제가 많은 만큼 안태훈은 매우 번성한 집안 출신이었다. 안중근에게 두 명의 백부와 세 명의 숙부가 있었다. 그리고 근자(根字) 항렬의 4촌 형제들이 열한 명이었고, 이들이 소생인 생자(生字) 항렬의 6촌 조카들이 적어도 스물 두 명은 되었다.
안중근의 친인척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주요한 인물로는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을 들 수 있다. 그는 안중근의 중부(仲父)인 안태현의 맏아들이었다. 안명근은 1910년 말에 발생한 ‘안악사건’ 혹은 ‘안명근 강도사건’의 주모자로 등장하고 있다. 안악사건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황해도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강도급강도미수죄(强盜及强盜未遂罪)로 종신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던 과정에서는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선교하던 빌렘 신부를 통해서 안명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었던 아카시 장군이었다. 아카시는 일찍이 파리주재 일본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아마도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와 가깝게 지냈다. 거기에는 물론 조선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을 회유하려던 식민당국의 복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뮈텔은 안명근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카시에게 직접 찾아가 알려주었다. 물론 뮈텔의 제보가 있기 전에 총독부 헌병경찰에서도 이미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뮈텔의 행동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뮈텔(Mutel 민덕효) 주교
뮈텔 주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안중근 사건으로 인해서 조선천주교회가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에게 실추당한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교회행정가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안명근의 체포는 당겨졌고, 안명근의 독립운동 사건은 이른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 조작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죽음과 고통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일부 인사들은 이 사건을 가지고 뮈텔 주교가 고해비밀을 누설하여 안명근을 고발했고, 총독부로부터 고발의 반대급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해비밀 누설이라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이는 고해비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물론 뮈텔 주교는 안명근의 형(刑)이 확정된 다음 그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난 뮈텔 주교의 단견은 한국교회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안명근은 1926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천주교 관계의 일을 거들다가 나중에 만주 길림성 의란현 팔호력(八虎力) 원가둔(袁家屯)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천주교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신자의 종부성사에 배석하고 나서, 이질에 이환되어 일주일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명근 사건의 생존인사들과 함께] 백범은 환국후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던 옛동지들과 함께 서대문감옥을 방문했다.백범 왼쪽의 김홍량은 도산과 함께 신민회 주도인물 중의 하나로 백범이 양기탁 주도의 비밀회의에 참석, 황해도 대표를 맡아 신민회 무장투쟁 자금 15만원 모금에 나서자 선뜻 토지와 가산을 내놓은 바 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홍량, 백범, 도인권, 둘째줄 왼쪽부터 감익용, 최익형, 한사람 건너 우덕순(1946년 1 월23일 서대문감옥에서)
그 밖의 친인척들
안중근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여순 감옥에 갔던 빌렘 신부는 그 후 동료 선교사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결국은 조선선교지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봉근(安奉根)의 독일유학을 주선해서 함께 동행하여 조선을 떠났다. 그후 안봉근은 베를린에서 거주하다가 나치스에게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갔다. 이는 안중근의 친인척 중 일부가 이탈리아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상해에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경근(安敬根)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숙부인 안태민(安泰敏)의 맏아들이었다.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바 있고, 1925년에는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하고 나서, 만주에 세워진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0년 상해로 와서 백범 김구를 보좌하며 항일 운동을 계속했고,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의 밀고자를 수색하던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자상하고, 재치 있고 인정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사촌형 안중근처럼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에도 안중근의 가문과 연결되는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써 우선 안악인 최익형(崔益馨)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안명근의 누이였던 안익근(安益根)이었다. 그는 처남인 안홍근(安洪根)과 함께 해방 이후 옹진으로 이사하여 옹진중학 서무주임을 하면서 적산 과수원 1만여 평을 매입하여 이를 함께 경작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국군 5인을 자신의 과수원에 숨겨주었다가 1950년 10월에 발각되어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15일 경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안홍근의 셋째 아들은 안무생(安武生)이었다. 안무생은 일제말엽 간도지방의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던 해북촌(海北村)에 살던 중 강도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아내 차로길(車路吉,루시아)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아예 안로길로 개명할 만큼 안씨 가문의 아내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 루시아는 남편이 죽자 하르빈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중국에 인민정권이 들어선 1949년 이후 안로길(루시아)은 중국천주교 애국회에 참여를 반대하던 김선영 신부와 임복만 신부를 도와 일하다가 이들이 투옥되자 그 옥바라지를 감당해 갔다.
그러다가 자신도 애국회의 미사 거행을 방해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안로길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다음에도 내몽고지방으로 끌려가 20년간 ‘노동개조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무의탁 노인이었던 그는 겨우 1999년에 이르러서야 그 농장을 떠나 하르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제 안로길은 90년을 지탱해준 늙은 몸을 누일 방 한 칸을 겨우 마련해서 남편안무생과 시숙 안중근이 기다리는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안중근과 그 일가들이 다녔던 천주교 청계동 본당과 교우
안중근의 친인척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평생 우러러야 할 사표(師表)였고,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던 길잡이였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의 사람들은 때로는 그 어른 때문에 자신의 행동거지에 제약을 받게 되는 부담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안중근의 친인척들은 대부분 안중근과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안중근의 조카 중 하나로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안춘생(安椿生)도 있다. 그를 비롯하여 안중근의 가계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신고로운 삶을 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의 추적을 당했다. 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그들은 남한정권의 이승만에게 배척당하거나, 북한의 인민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탄압받고 찢겨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엮어 준 것은 안중근이 믿던 천주교 신앙이었고,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민족애였다. 우리에게 안중근과 그 친인척들이 있었음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교회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08.7.21. 조광http://cafe.daum.net/cchereandnow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안악사건 [安岳事件]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 등이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된 사건.
안명근사건이라고도 한다. 국권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였던 안명근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함을 느끼고 1910년 귀국하였다. 그는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황해도의 부호들인 이원식(李元植)과 신효석(申孝錫)에게 기부금을 받았다. 그 뒤로 신천군 발산(鉢山)에 사는 민모(閔某)에게도 기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권총으로 위협하는 등 충돌을 빚은 뒤 자리를 피하였다. 민모는 즉시 이 사실을 일제에 밀고하였고 그해 12월 평양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배경진(裵敬鎭)·한순직(韓淳稷)·박만준(朴萬俊) 등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한 것으로 날조하여 관련인사 160여 명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 가운데 김홍량(金鴻亮)·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도인권(都寅權)·김용제(金庸濟) 등은 안악에 있는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에서 애국적인 문화운동에 힘썼다. 일제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여 사건을 더욱 확대하고 날조시켜 안명근 이하 16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1911년 8월에 있은 공판에서 안명근은 종신형, 김구와 김홍량·배경진·원행섭·이승길·박만준 등은 징역 15년, 도인권은 징역 10년, 김용제, 최명식 등은 징역 7년, 최익형(崔益馨), 고봉수(高奉守) 등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최익형 [崔益馨, 1890.1.25~1950.10.15]
황해도 안악(安岳)군 문산(文山)면 원성(遠星)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05인사건 때 옥고를 치른 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모금된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항일 투쟁에 힘썼다.
1890년(고종 27) 1월 25일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장지연(張志淵) 등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제가 안명근 사건(安明根 事件)을 확대해서 1911년 1월 일본 경찰이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다수의 신민회원을 체포하고 고문한 105인사건(안악사건)때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인 1921년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적십자사 사장으로 있던 처남 안정근(安定根)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을 의뢰받고 나태섭(羅泰燮)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모금된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후 계속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같은 해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두번째 옥고를 치렀다. 1934년 비밀히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로부터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가족을 상하이로 보내라는 밀명의뢰을 받고 귀국한 뒤, 김선량(金善亮)으로 하여금 안악에 거주하고있던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을 호송하도록 자금을 제공하는 등 항일 투쟁에 힘썼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학계는 일제시대 독립에 뛰어든 안의사 일가는 40여명으로 추산한다. 이중 서훈자는 안의사를 비롯, 안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 11명.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의사 집안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천주교에 개종한 것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요인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해방 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져=해방 후 귀국한 안의사의 일가는 대부분 김구의 임정조직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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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명 권업신문
기사제목 광고 제二四호
발행일 1913-07-20 (俄曆(러시아력)一千九百十三年 七月 九日)
본회에 의연한 제씨의 씨명과 금액을 좌에 게재함.
최덕여 五十전, 최학선 五十전, 박석기 五十전, 고병순 一元, 신원규 一元, 이홍근 五十전, 공대여 五十전, 정망옥 五十전, 신석환 五十전, 정병영 五十전, 최순관 五十전, 김치보 五十전, 신자옥 五十전, 남화실 五十전, 김현섭 五十전, 박완석 二十●전, 신석고 十전, 홍여경 一元, 서상헌 一元, 엄치운 二十전, 이춘삼 五十전, 문호여 三十전, 김창원 三十전, 고진숙 三十전, 안홍근 三十전, 문한락 三十전, 문세홍 三十전, 문정옥 三十전, 문호일 三十전, 이의순 三十전, 김중천 五十전, 신석순 五十전, 김장복 三十전, 이관삼 二十전, 최정보 五十전, 신병헌 三十전, 김성여 二十전, 황일성 五十전, 김치화 二十전, 이영세 一元, 장남극 一元, 박종형 一元, 김기홍 二十五전, 유근여 五十전, 최홍렬 二十전, 한춘식 十五전, 조승렬 二十전, 안창국 三十五전, 이춘삼 一元, ●●국 六十전, 김창오 六十전, 신운경 六十전, 석순보 六十전, 우치세 四十五전, 김주삼 四十五전, 석진보 四十五전, 김용섭 四十五전, 석준봉 四十五전, 김준화 四十五전, 김용기 二十전, 고도일 二十전, 김용택 二十전, 이영실 二十전, ●홍빈 五十전, 나근삼 二十五전, ●춘봉 二十전, 김군● 五十전, 김●순 五十전, 고주삼 三十전, 장남극 二十전, 이치● ●●전, 최●진 五十전, 김●● ●●전, ●●● ●●전, 신석률 五十전, 조●● 三十전, 이●● 二十전, 박●보 二十전, 김병● 三十전, 김인● 二十전, 박교화 三十전, 박●● 五十전, 채문팔 二十전, 김홍범 三十전, 장남홍 五十전, 김용삼 五十전, 김승권 三十전, 김●● 五十전, 이병준 三十전, 전창● 二十전, 신성학 三十전, 김상률 三十전, 강●규 五十전, 김임● 五十전, 김●남 四十전, 김인순 五十전, 김●남 三十전, 김형옥 五十전, 우●하 五十전, 손춘세 一元
이상은 수청(파르티잔스크) 손춘세, 김태익 양씨 수봉
이상 합계 四十五원 五十三전
재二三회 이래 합계 九百四十二元 三十四전
이상 양합 九百八十七元 八十七전
고 이준공 전기간행, 유족구휼 의연모집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에서발췌함
권업신문
| 1913년 연해주에 당도한 이동휘 선생은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김성무, 김치보 양성춘 채성하 김규면(백추) 장기영 등 애국지사들을 만났고 소왕령에서 이갑 김이직 유동렬 안공근 최재형 홍범도 등 열사들을 만나 해내 해외에서 진행되는 조선 독립운동에 정형을 토의한 후 미래 무쟁투쟁에서 의병대와 독립군들을 지휘할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급속히 사관학교 조직을 경정하였다. |
| 이 시기에 이동휘 선생은 이범윤 장재관 신채호 한형권 기타 동지들을 만나 미래에 활동할 과업을 서로 상의하였는데 권웝청 사업과 권업신문에 역할을 군중에 더욱 높이는 동시에 국민의 애국사상과 혁명적 열성을 더욱 높이는 것이 당면 중요한 과업이 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
| 그러나 이러한 활동 투쟁 반면에 황제 로서아(러시아)의 정권은 조선 독립운동에 활동을 금지하였고 저작을 주었다. |
| 황제 로서아(러시아) 헌병대 명의로 권업회를 해산시키고 권업신문의 발행도 금지하였다. 이와 동시에 혁명자들을 체포 투옥하는 사변이 생겼다. |
한인사회당 창당장소·하바로브스크조선인민회 회관
지역명:러시아 하바로브스크
"최초의 한인볼쉐비키인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의 지도하에 이동휘, 김립, 유동열, 박애, 이인섭, 심백원, 김용환, 오성묵, 이한영, 오와실리, 오하묵, 유스테판, 안홍근 등이 발기하여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들 발기인들은 1918년 5월 11일 한인사회당의 정식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하고 중앙간부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연대와 반일, 반제의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으며 조직, 선전, 군사 등 주요부서를 설치하였다. 당기관지『자유종』을 비롯한 한인사회당의 출판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크라스노췌코프가 의장인 원동인민위원회에서 석판기계 1대와 인쇄비, 종이 등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5월 14일『자유종』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한인사회당은 장교훈련을 위한 군사학교(교장 : 유동열)를 설립하였으며, 김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 주둔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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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鍾厚 安 濬 安重根 安珍淳 安贊福 安昌植 安昌憲 安昌浩 安昌熙 安泰國 安泰英 安泰稷 安弼淳 安學世 安興成 安興植 安喜敬
安希範 安希元
안로길-할빈사는 97세 안중근 조카며느리
[조글로미디어 2009년 02월 28일 07시 34분 02초]
하얼빈에서 부르는 애국가, 안중근…
3·1절 90돌…안중근 의사 조카며느리 안로길할머니를 찾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3·1절을 앞두고 중국 하얼빈에서 애국가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벌판을 떠돌던 우리 동포들이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부르던 곡조 그대로였다.
구슬프면서도 애잔함이 가득 묻어나는 애국가를 취재팀에게 들려준 사람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조카며느리인 안로길(97) 할머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지 100주년이 되는 올해, 그 역사적인 현장인 하얼빈에 아직도 안 의사의 피붙이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나선 터였다.
할머니를 만난 곳은 흑룡강성 하얼빈시 중심지역인 난강구(南崗區)의 한 아파트였다. 할머니는 혼자 방안을 걸어다닐 정도로 정정했지만 대화를 제대로 나누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옛일을 띄엄띄엄 회고하다가도 한참 동안 한국말과 중국말을 섞어가며 뭔가를 중얼거렸고, 이 같은 행동이 몇 차례나 되풀이됐다.
기자가 안 의사에 대해 물어보니 그 말만은 또렷하고 분명한 어투로 답했다. 안 의사는 "셋째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안 의사 사촌인 안홍근(安洪根)의 막내아들 안무생(安武生)의 부인으로, 안 의사에게는 5촌 조카 며느리(당질부)가 된다.
할머니는 방에 걸려있는 안 의사 사진을 떼내 손으로 쓰다듬으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몰라" 하며 눈시울을 훔쳤고 장롱 속 깊이 놓아둔 안 의사 관련 자료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동포를 수없이 죽였어. (안 의사는) 우리 동포를 살리려고 도둑질하러 온 그 흉적을 없앴어.” 할머니는 안 의사에 대해 "(다재다능하다는 뜻으로) 박사였다"는 말도 했다.
이틀 동안 할머니를 만나면서 '어떻게 이렇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모진 고생을 한 분임을 알게 됐다. 고향 황해도에서 만주로 이주, 17세 때 결혼했고 1945년 하얼빈의 북쪽인 흑룡강성 해북진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았다. 이때 동포 손에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위해 차(車)씨였던 성(姓)을 안씨로 바꿨다고 한다. 1958년 천주교를 믿은 죄로 '정치범'으로 분류돼 중국 감옥에 40년이나 갇혀 있었다.
이곳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최선옥(72·전 성모자애병원 원장) 수녀는 “9년 전 할머니를 처음 만났는데 감옥에서 나와 갈 곳이 없어 이곳저곳 전전하고 계셨다"면서 "그때는 치매가 심했고 몸도 약했는데 요즘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최 수녀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볼 계획이라고 했다.
평소 할머니가 열중하는 것은 태극기를 만드는 일이다. 틈나는 대로 바느질을 해 하얀 천에 태극과 건이감곤을 새겼다. 비록 태극과 건이감곤의 위치가 맞지 않고 훌륭한 작품이 아닐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정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감옥에 있을 때는 자신의 치마 저고리에서 한올 한올 실을 뽑아 태극기를 만들어 속옷 깊숙이 감춰놓았다 고향 생각, 조국 생각이 날때마다 펼쳐보곤 했다고 한다. 그 사연 많은 태극기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옹기동산 청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할머니의 몸은 21세기에 있지만 의식과 사고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시절 동포들이 그토록 바라던 '대한독립'에 맞춰져 있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의 기나긴 투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신문 중국 하얼빈에서 박병선 기자
안씨가문의 일원으로 긍지를 가진다
안중근의사 조카며느리 안로길할머니를 찾아
(흑룡강신문=하얼빈)="안씨가문의 일원으로 안중근의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혼신을 바친 장거에 무한한 긍지를 가진다."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사한지 100주년, 할빈에 아직 안중근의사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안중근연구전문가인 서명훈선생(할빈시민족종교사무국 전임 부국장)의 소개를 듣고 본사 특별취재팀이 하얼빈시 남강구 안산가의 한 아파트를 찾아갔을때 안중근의사의 조카며느리인 안로길(97세)할머니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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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롱속에 넣어두었던 안중근의사의 관련자료를 꺼내 이야기하고 있는 안로길 할머니. /림영빈기자 |
안로길 할머니는 아직도 혼자 방안을 걸어다니고 간단한 생활은 자립할수 있었지만 년세가 많으시고 고생을 많이 하신탓에 기억과 사유가 흐리해져 옛일을 띄엄띄엄 회고하다가도 한참 동안 한국말과 중국말을 섞어가며 뭔가를 중얼거렸고, 이 같은 행동이 몇 차례나 되풀이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할머니는 안중근의사의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이 올똘해졌고 또렷하고 분명한 어투로 답했다. 안중근 의사는 "셋째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로길할머니는 안중근의사의 사촌인 안홍근(洪根)의 막내아들 무생(武生)의 부인으로, 안 의사에게는 5촌 조카 며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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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사의 사진을 내려 취재팀에게 보이고 있다. /림영빈기자 |
안로길할머니는 방에 걸려있는 안중근 의사 사진을 떼내 손으로 쓰다듬으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몰라" 하며 눈시울을 훔쳤고 장롱 속 깊이 놓아둔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동포를 수없이 죽였어. 당숙은 (안중근 의사는) 우리 동포를 살리려고 도둑질하러 온 그 흉적을 없앴어.” 할머니는 안 의사에 대해 "다재다능한 박사였다"는 말도 했다.
안로길 할머니는 고향인 조선 황해도에서 동북으로 이주, 17세 때 안중근의사의 조카인 안무생과 결혼했고 1945년 흑룡강성 수화시 해북진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았다. 남편과 비록 함께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남편이 살아생전일때 안중근의사와 안씨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때 남편을 기념하고 안씨가문의 후손임을 알리기 위해 원래 차(車)씨였던 성을 안씨로 바꿨다고 한다.
하얼빈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안로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최선옥(72세)씨는 “9년 전 할머니를 처음 만났는데 의지가지 할 곳이 없어 이곳저곳 전전하고 계셨다"면서 "그때는 치매가 심했고 몸도 약했는데 요즘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최씨는 안로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볼 계획이라고 했다.
한때는 하얼빈역에 가 안중근 만세를 외치기도 해 남들로 부터 정신이상자 취급도 받았다는 안로길 할머니에게서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없는것이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였지만 할머니의 표정에서 안씨가문의 후손된 긍지만은 력력하게 읽을수가 있었다.안중근의사 의거 백주년을 맞이하는 이시각, 안로길 할머니를 비롯한 안씨가문의 후손들이 무병장수하고 가문의 영광을 내내 기억하길 기원하며 특별취재팀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안중근 의거 백주년 기념행사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