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실존주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말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에 대한 정당한 정의를 하려들 적에는 오히려 틀림없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지금 큰 유행으로 되어서, 저 음악가는, 저 화가는 실존주의자들이라고들 사람들은 즐겨 말들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르테>이 가십 컬럼니스트는 <실존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지금으로는 아주 폭 넓게 되고, 확장되어 있기 때문에, 벌써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초현실주의에 비등할 만한 전위적 주장이 현재로는 없기 때문에, 스캔들이나 엽기적인 운동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 철학에 도움을 구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철학은 그 방면에서는 아무런 것도 그들에게 초래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 철학은 가장 반스캔들적인, 가장 엄숙한 주의이며, 엄밀히 전문가적이고, 철학자적인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용이하게 정의할 수가 있다.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실존주의자에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첫째의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이며, 그 속에는 카톨릭교를 믿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을 넣을 수가 있다. 둘째의 것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며, 그 속에는 <하이데거>나 또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그리고 나 자신을 넣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양자에 공통적인 것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는 이것을 <주체성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을 뒤바꾸어도 좋은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는 어떻게 이야기하여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서적이라든가 페이퍼 나이프와 같은 제작된 어떤 하나의 물체를 생각해보기로 하지. 이 경우, 이 물체는 하나의 개념을 머리 속에 그린 기능공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다. 기능공은 페이퍼 나이프의 개념에 의거하고, 또 이 개념의 일부를 이루는 기존의 제조 기술 - 결국은 일정한 제조법 - 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페이퍼 나이프는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는 물체인 동시에, 한편에서는 일정한 용도를 가지고도 있다. 이 물체가 무엇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도 모르면서 페이퍼 나이프를 제작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페이퍼 나이프에 관해서는 본질 - 곧 페이퍼 나이프를 제조하고, 페이퍼 나이프를 정의할 수 있기 위한 제작법이나 성질의 전체 - 은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내 앞에 있는 어떤 페이퍼 나이프, 어떤 서적의 존재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일종의 기술적 세계관이고, 이 세계관에서는 생산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창조자로서의 신을 생각할 경우, 신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훌륭한 기능공과 동일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데카르트>의 교설이든 <라이프니츠>의 교설이든, 그 어느 교설을 생각해 보더라도, 의지가 다소 오성에 뒤따르는 것이라는 것, 혹은 적어도 오성에 수반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신이 창조할 경우, 신은 자기가 무엇을 창조하는 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우리들은 인정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은 신의 머리 안에서는 제작자의 머리 안에 있는 페이퍼 나이프의 개념과 동일하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신은 기능공이 하나의 정의, 하나의 기술에 의거해서 페이퍼 나이프를 제작하는 것과 꼭 같이, 각종의 기술과 하나의 개념에 의거해서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리하여 개개의 인간은 신이 오성 안에 있는 하나의 개념을 실현하는 것으로 된다.
18세기에 이르러, 철학자들의 무신론에서 신의 개념은 폐기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지지 아니하였다. 이 사고 방식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디드로>에서도, <볼테르>에서도, <칸트>에 있어서마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인간성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의 개념인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각 개별적 인간이란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적 개념의 하나의 특수한 본보기라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서는 이 보편성에서 야만인이나 자연인도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같은 정의를 강요당하게 되어, 그 결과 동일한 기본적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인간의 본질은 우리들이 자연 안에서 마주치는 역사적 실존에 앞서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대표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그 논지가 한층 일관하고 있다.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실존이 본질에 앞서고 있는 존재, 어떠한 개념에 의해서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고 있는 존재가 적어도 하나 있다. 그 존재란 바로 인간이며,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적 현실인 것이라고,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선언하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는 것은 이 경우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우선 앞서 실존하며, 세계 내에서 마주쳐지고, 세계 내에 급작하게 모습을 나타내어, 그 연후에야 정의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존주의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최초에는 아무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후에 이르러서 비로소 인간으로 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자신이 만드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본성을 생각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바의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바라는 바의 것이고, 실존한 연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의 것, 실존에의 비약의 연후에 자신이 바라는 바의 것인데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드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런 것도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이 실존주의의 제일 원리인 것이다. 이것이 또 이른바 주체성이며, 바로 그 이름으로 세인이 우리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주체성이라고 하는 말에 의해서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돌멩이나 책상보다도 훨씬 존엄하다고 하는 것, 곧 인간은 먼저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고, 미래 안에 자신을 던진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끼나 부식물이나 꽃, 양배추는 아니고, 무엇보다도 먼저 주체적으로 그 자신을 살아가는 던짐인 것이다. 이 던짐에 앞서서는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것도 신의 뜻 안에는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자신이 그 무엇이려고 던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 자신이 무엇이려고 의욕한 것은 아니다. 그 말인즉 우리들이 보통 의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인 것으로서,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대부분 자신이 만든 것의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정당에 가입하고, 책을 쓰고, 결혼한다는 것을 의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모두 이른 바 의욕보다도 한층 근원적인, 한층 자발적인 어떤 선택의 출현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과연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그 자신이 있는 바의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의 최초의 절차는 각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현재 있는 바의 것을 파악시켜, 그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그에게 온 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인간이 엄밀한 의미의 그 개인에 대해서 책임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온 인류에 대해서 책임을 가진다고 하는 의미이다.
주체주의라고 하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으며, 우리들의 논적들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교모하게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주의란 한편으로는 개개의 주체 그 자신이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초월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둘째 번의 의미야말로 실존주의가 가지는 깊은 의미인 것이다. 우리들이 인간은 그 자신을 선택한다고 말할 때 우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각 개인이 저마다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또 각 개인은 자신을 선택함에 의해서 온 인류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행하는 행위 중에서, 우리들이 그 무엇이려고 바라는 인간을 창조함에 의해서, 동시에 인간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와 같은 인간상을 창조하지 않는 행위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어느 것임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동시에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 우리들은 결코 악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선택하는 것은 항상 선이고, 무엇이든 우리들에 대해서 선이면서, 모든 사탄에게 대해서 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의 상을 만들면서 실존하려고 한다면 이 상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시대 전반을 위해서 유효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책임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을 것보다도 훨씬 큰 것이다. 우리들의 책임은 온 인류를 앙가주(engager;구속하다.)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노동자이고, 사회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적인 노동조합에 가맹하는 것을 선택하고, 이 가맹에 의해서, 체념이 결국은 인간에게 적합한 해결이고, 인간의 왕국은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나는 단지 나라는 한 개인을 앙가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채념 하려고 하는 것이고 따라서 나의 행복은 인류 전체를 앙가주 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보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만일 내가 결혼하여, 아이를 가질 것을 바란다고 한다면, 설령 이 결혼이 오로지 나의 환경이나 정열이나 욕망 등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의해서 나 자신만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일부일처제의 방향에 앙가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선택함에 의해서, 나는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안, 고독, 절망이라고 하는 약간 과장된 말들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를 이해시켜 준다. 이것은 곧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이 극히 간단하다. 인간은 불안하다고 실존은 즐겨 주장한다. 그것은 이런 의미인 것이다. 즉 자기를 앙가주 하며, 자기는 자기가 그 무엇 일려고 선택하는 바의 것일 뿐만이 아니고, 자기 자신과 동시에 온 인류도 선택하는 입법자인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전면적이고 그리고 심각한 책임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안을 감추고 불안을 피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은 행동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앙가주 하는 것이라고 믿고, <만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하는 말을 들을 때면, 머리를 돌리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인데>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는 사람은 항상 <만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자문해야 할 것이며, 일종의 기만에 의해서밖에는 사람은 이 불안스러운 생각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인데>하고 공언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변명을 하는 사람은 양심에 부끄러운 인간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사실은 그 헛된 말에 대해서 보편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는 것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설령 가면을 쓰려 해도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의 불안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즉 주지되어 있던 바이지만,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식을 희생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다. <너는 아브라함이다. 너의 자식을 희생으로 바쳐라>고 고하기 위해서 온 자가, 만일 진실로 천사라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자기에게 다음과 같이 자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것은 과연 천사인가, 그리고 나는 과연 아브라함인가>하고 무엇이 그것을 증명할 것인가.
환상에 사로잡힌 어떤 미친 여인이 있었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와서 이런저런 명령을 한다고 말한다. <누가 말을 너에게 하고 있는가>라고 의사가 물으면, 그 미친 여인은 <그 사람은 스스로 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신이라는 것을 사실 무엇이 이 여인에게 증명했을까. 천사가 나를 찾았더라도, 그것이 천사라는 것을 무엇이 증명할 것인가. 또 말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그 말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온 것이고, 지옥에서가 이니다, 또는 잠재의식이나 어떤 병적 상태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무엇이 증명해 준다는 것인가. 그 말소리가 나에게 말해지고 있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내가 자신의 인간관과 자신의 선택을 인류에게 강요하도록 분명히 지명되어 있다고 무엇이 증명하는가. 나는 그것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어떠한 증거, 어떠한 암호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말소리가 나에게 말해오고 있다고 한다면, 그 말소리가 천사의 말소리인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항상 나이다. 내가 어떤 행위를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행위는 악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선이라고 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나인 것이다.
아브라함이어야 한다고 나를 지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나는 시시각각 불가피하게 규범적 행우를 하도록 되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비슷하게 그 행하는 바에 온 인류가 주목하고, 그 행하는 바에 온 인류가 따를 것 같이 일체가 행해진다. 거기서 사람은 누구나 다음과 같이 자문하지않으면 안 된다. <과연 나는 인류가 나의 행위에 따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방식에서 행동하는 권리를 가지는 인간인 것인가>라고. 만일 그와 같이 자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불안을 은폐하고 있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것은 정적주의나 비활동으로 이끄는 것같은 불안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져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순한 불안인 것이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부대장이 공격의 책임을 지고 몇 사람의 부하를 죽음에로 내보내는 경우,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더구나 결국은 자기 단독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명령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겠지만, 그 명령은 폭이 넓은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어떠한 하나의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이 해석은 그에게서 유래하는 것이고, 10명, 14명, 또는 20명의 생명이 그 해석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불안감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우두머리가 되면 모두 이러한 불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인 즉, 그것은 그들이 두 가지 이상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가능성의 하나를 선택할 경우, 그 가능성은 선택되었기 때문에만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밖에 이와 같은 불안 - 그것이 실존주의가 기술하는 불안인 것인데 - 은 그것에 휘말려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직접적인 책임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은 우리들을 행동에서 멀리하는 커텐인 것이 아니고, 행동 그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또 고독 - <하이데거>가 즐겨 쓰는 표현이지만 - 이라는 것을 말할 경우 우리들은 다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결과를 철저하게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못할 것이다. 실존주의자는 가능한 한 희생을 적게 해서 신을 말살하려고 하는 것같은, 어떤 형의 세속적 도덕에는 극히 반대하는 입장에 있다. 1880년 경, 프랑스의 교육자들이 세속적 도덕을 작성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무용, 유해한 가설이다. 그러나 도덕, 사회, 문명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몇 가지의 가치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생각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처를 구타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진다고 하는 따위가 선험적으로 의무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한편에 있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치들이 신의 뜻 안에 새겨져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소한 일을 생각해 볼 생각이다. 바꿔 말하면 - 생각건대 이것이 프랑스에서 급진주의라고 불려지고 있는 모든 것의 경향인데 -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신을 무효력적인 가설로 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조용하게 자연히 죽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이에 반해서 실존주의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또렷한 신의 뜻 안에 각종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체의 가능성이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선험적으로 선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선을 생각할 수 있기 위한 무한하고 완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은 존재한다든가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등은 어디에도 써져 있지는 않다. 우리들은 다만 인간이 존재한다. 그와 같은 평면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에프스키>는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실존주의자들의 출발점인 것이다. 과연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고, 따라서 인간은 그 결과 고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안에도 자기 밖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선 자기 변호할 수 있는 구실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실제로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주어진 고정된 인간성을 구실로 해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결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바로 그것이다. 만일 한편에 있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가치나 명령을 바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후에도 또 전방에도 명백한 이유도 변명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고독한 것이다. 그것을 나는 인간은 자유의 형에 처해져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처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더구나 한편에 있어서 자유인 것은 일단 세계 안에 내던져진 이상에는 인간은 자기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는 정열의 힘을 신용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정열이란 파괴적 분류인 것이며, 인간을 숙명적으로 어떤 행위에로 이끌어가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의 변명을 된다고는, 결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자기의 정열에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존주의자는 또 인간이 이 지상에서 자기에게 나아갈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어떤 주어진 표식 안에 도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인간이 이 표식을 자기에게 알맞도록 해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아무런 의지할 것도 없고, 아무런 구조도 없이 시시각각으로 인간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형벌에 처해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폰제는 어떤 훌륭한 논문 안에서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로 그대로인 것이다. 다만 이 미래가 신의 안에 새겨져 있는 것이고, 신이 이것을 보고 있다고 하는 의미라면 그것은 잘못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벌써 미래인 것마저도 아니기 때문이다. 출현하는 인간이 어떠한 것일지라도, 만들어야 할 미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순수한 미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라면, 이 말은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은 내버려져 있다는 것으로 될 것이다.
이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한층 잘 이해될 수 있는 실례를 하나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가르친 어떤 학생의 경우를 여기에 들어보기로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지고, 더구나 대독 협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맏형은 1940년의 독일 측의 공격으로 전사하였다. 거기서 이 청년은 약간 원시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숭고한 마음을 가지고서 형을 위해서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와의 단 두 사람의 생활이 있었으며, 남편에게서 배반당하고 장남이 전사하였다는 것을 몹시 슬퍼하여 다만 그에게서 위안을 찾고 있었다.
이 쳥년은 그 때 영국으로 향해 출발하여 자유 프랑스군에 참가하든가 - 즉 어머님을 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머님 밑에 머물러 어머니의 생활을 돕든가, 그 어느 것을 선택할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다만 그에게만 의지하여 살고 있다는 것, 그가 있지 않게 된다면 - 아마도 전사할지도 모르는 - 어머니는 절망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요컨대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기가 어머니를 위해서 하는 하나하나의 행위는 그가 어머니의 생활을 돕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모두 보증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 출발하여 전투를 위해서 하는 하나하나의 행위는 수포로 돌아가 버릴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런 소용도 되지 않을는지도 모르는 불확정한 행위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으로 향해 출발한다 하더라도, 스페인을 경유할 때, 언제까지나 스페인의 병사에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국이나 알제리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서류 작성의 일로 사무실에 도사려 앉혀지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그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형의 행위에 직면하고 있었던 셈이다. 즉 하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한 개인에 대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보다도 무한히 큰 전체, 국민의 집합체에 대해서 행해지는 행동, 그러나 그 때문에 애매하고, 중도에서 중단될는지도 모르는 행동이다. 또 그는 그와 동시에 두 가지 형의 모럴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한편은 동정의 모험, 개인적 헌신의 모럴이고, 다른 한편은 보다 넓은 그러나 그 효과가 한층 의심스러운 모럴이다. 그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 선택하는 것을 도와줄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말한다. 자비로워야 한다. 너의 이웃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타인의 희생이 되라. 가장 괴로운 길을 선택하라는 등. 그러나 가장 괴로운 길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를 형제처럼 사랑할 것인가. 전사인가, 모친인가. 전체 안에서 싸운다고 하는 막연한 효용과 명확한 어떤 특정인의 생활을 도운다고 하는 명확한 효용, 그 어느 효용이 큰 것인가. 누구나 그것을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인가. <칸트>파의 도덕은 말한다. <타인을 결코 수단으로서 다루지 말고, 목적으로서 다루어라>라고. 대단히 좋다. 그러나 만일 내가 어머니의 곁에 머물렀더라면, 어머니를 수단으로서 다루지 않고 목적으로서 다루는 것으로는 되지만, 그러나 바로 그것으로 해서 나의 주위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다루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 거꾸로 싸우는 사람들에 참가한다면, 나는 그 사람들을 목적으로서 다루고 그것으로 인해서 어머니를 수단으로 다루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가치가 애매하고,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명찰한 구체적인 경우에 대해서 너무나도 광범위해 진다면 우리들에게는 자기의 본능을 신뢰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청년이 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으며, 내가 만났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나는 자기를 참으로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선택해야만 하겠지요. 만일 내가 그 이외의 모든 것 - 나의 복수심, 나의 행동욕구 나의 모험심 -을 희생시킬 만큼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어머니 밑에 머물겠습니다. 만일 그 반대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나는 출발하겠습니다.>라고.
그러나 어떤 감정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가, 어머니에 대한 그의 감정의 가치는 무엇이 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서 머무른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인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금액을 희생할 정도로 어떤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적으로 그 행위를 했을 경우의 일이다. 내가 어머니의 곁에 머물렀을 때, 비로소 나는 <어머니의 곁에 머물 정도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애정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애정을 확인하고 한정하는 하나의 행위를 했을 때이다. 그런데 나는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이 애정에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순환론 안으로 휘말려 들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지드는 <위장된 감정과 실감된 감정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아주 잘 말한 바 있다. 어머니의 곁에 머물러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도, 어머니를 위해서 머무른다고 하는 연극을 연출하는 것도 우선 같은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감정은 사람이 하는 행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감정에 물어보고, 감정에 의거해서 자기를 이끌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말인즉 나는 자기를 행동으로 유인하는 진정하고 확실한 상태를 자기의 내부에서 찾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내가 행동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개념을 하나의 도덕 안에 구할 수도 없다고 하는 의미이다. 여러분들은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선생님을 찾은 것이 아닌가>라고. 그러나 만일 이를테면 당신이 사제한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제를 선택한 것이고, 사제가 어떠한 조언을 하려고 하는가를 다소나마 벌써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조언자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역시 자기 자신을 앙가주 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교라 한다면 당신은 사제에게 상의하시오>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대독협력 파의 사제가 있을 것이고, 기회주의 파의 사제가 있을 것이고, 저항주의 파의 사제가 있을 것이다. 어느 사제를 택할 것인가. 만일 당해의 청년이 저항주의 파의 사제나 또 협력 파의 사제를 선택한다고 하면, 그는 자기가 받는 조언의 종류를 벌써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나를 찾았을 때 내가 하려 하는 대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너는 자유이다. 선택해 보렴. 곧 만들어 보렴>하고. 어떠한 일반도덕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지표란 없는 것이다. 카톨릭 신자는 <아니 지표는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지표가 가지는 의미를 선택하는 것은 어쨌든 나 자신인 것이다.
내가 포로로 되어 있을 때 예수회의 교도인 상당히 훌륭한 인물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예수회에 입회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아주 괴로운 여러 어려운 고비를 경험했던 것이다. 어릴 적에 가난한 그를 남겨두고 아버지가 죽었었다. 어떤 종교 단체의 급비생이 되었는데, 거기서는 온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기분을 끊임없이 가지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 뒤 아이들이 좋아하는 표창장도 몇 개나 받지 못하게 되었고 18세 경에는 연애 사건도 실패하고, 드디어는 22세 때, 군사교련의 시험에도 낙제해 버렸던 것이다. 어린아이다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절망으로 이끄는 박차를 가하게 되어, 청년은 모든 것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징조였다. 그러나 어떠한 징조이었을까. 그는 세상을 혹평하든가 실의 속으로 도피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세속적 성공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고, 종교적 성공, 성덕과 신앙의 승리만이 자기에게 이겨낼 수 있다고 하는 징조인 것이라고 아주 제 나름으로 판단해 버렸던 것이었다. 징조의 의미의 결정이 다만 그 한 사람에 의해서 행해졌다고 하는 것은 누구가 보더라도 분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잇다른 고비에서 어떤 다른 결론도 내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목수가 되는 것, 또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라고. 따라서 그는 해독의 전면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고독이란 우리들의 자기 자신에서 우리들의 존재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은 불안에 상반하는 것이다.
절망이란 어떠한가. 이 표현은 극히 단순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은 자기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 또는 우리들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약간의 개연성의 전체만을 문제로 삼는데 그치게 한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들이 무엇이가를 바랄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약간의 개연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방문을 신뢰할 수가 있다. 이 친구는 기차나 전차로 오고 있다. 그것은 기차가 정각에 도착하고, 또 전차가 탈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는 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것에 기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행동이 이러한 가능한 것의 전체를 포함한다고 하는 엄밀한 범위 내에서의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능성이 나의 행동에 의해서 엄밀히 구속되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당연히 그와 같은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신도 어떠한 의도도 세계와 그 가능성을 나의 의지에 적응시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데카르트>가 세계보다도 자기 자신을 정복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희망 없이 행동한다>고 하는 것, 요컨대 위와 같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마르크르주의자들에게 대해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너의 행동은 분명히 너의 죽음에 의해서 한계 지워지는 것이지만, 그 행동에 있어서 너는 타인의 지원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것은 타인이 너를 돕기 위해서 다른 장소,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할 것이라는 것을 너는 기대할 수도 있는 동시에, 또 타인이 네가 죽은 뒤에 행동을 계속하여, 행동을 혁명이라고 하는 완성 상태로 초래하기 위해서 할 것이라는 것도 너는 기대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이다. 아니, 너는 그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도리에 위반한다>고.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동지가 나와 함께 어떤 정당이나 당파 - 내가 다소라도 제어할 수 있는, 즉 내가 투사의 자격으로 그것에 속하며 그것의 움직임을 시시각각으로 알고 있는 정당이나 당파의 통일 안에서 어떤 구체적인 공통의 투쟁에 참가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항상 그들 동지에게 기대한다>고. 이 경우, 그 정당의 통일에 기대하고, 그 의지에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전자가 정각에 도착한다는 것, 또는 기차가 탈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선량성이나 사회의 복지에 대한 인간의 관심에 의거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이고 의지거리로 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다른 어떠한 나라에 있어서도 연출되지 않고 있는 역할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을, 현상이 나에게 증명해 주는 그 한에 있어서 나는 러시아 혁명에 감탄하고, 그것을 하나의 모임으로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혁명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이끈다는 것은 단언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에 한정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지들이 내가 죽은 뒤 나의 사업을 계속하여 최고도의 완성으로 이끌 것인가는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유이고,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장래 자유로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래 내가 죽은 뒤, 사람들은 파시즘 체재를 시행하려고 결정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위임할 정도로 비열하고 무능화하고 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때 파시즘은 인류의 진리가 될 것이지만, 그것도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실은 사물이란 인간이 그렇게 결정한 대로의 것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적(靜寂)주의에 몸을 맡겨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일까. 그렇지는 않다. 먼저 나는 나를 앙가주 하고, 뒤이어 <일을 기도하는 데는 희망의 필요는 없다>고 하는 옛 격언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정당에 소속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를테면, <모이고 흩어짐은 그대로의 형태로 도래할 것인가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연 알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이고 흩어짐을 위해서 나에게 가능한 모든 것을 나는 한다고 하는 것뿐이며, 그 밖에 나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적주의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인 것이다. 내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주의는 정적주의와는 정반되는 것이다. <행동 안에서의 이외에는 현실은 없다>고 명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주의는 한 걸음 더 진행시키고 있다. <인간은 그 자신의 투기(投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를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행위의 전체 이외의, 그의 생활 이외의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부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게 혐오되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비참을 견디어 내는데 있어서 흔히들 단지 하나의 방식 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주위의 사정이 나에게 불리하였다. 나는 현실의 나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인간이었다. 물론 나는 열렬한 연애도 큰 우정도 가지지 아니하였지만, 그것은 그에 값어치 있을 정도의 남자 또는 여자에게 내가 만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큰 책도 쓰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헌신할 만한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같이 일생을 보낼 만한 남성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내부에는 많은 소질이나 경향이나 가능성이 활용되지 않고 더구나 완전히 살아남아 있다. 그러한 것들은 나의 행위의 단순한 계열에서부터는 이끌어 낼 수 없는 하나의 가치를 나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그런데 실은 실존주의자에게는 형성되고 있는 연애 이외에도 연애란 없고, 연애 안에 나타나는 가능성 이외에는 연애의 가능성은 없고, 예술작품 안에 표현되는 천재 이외는 천재는 없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천재란 프루스트의 작품의 총체이고, 라신느의 천재란 그가 쓴 일련의 비극인 것으로서,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새로운 비극을 쓸 가능성을 어떻게 <라신느>에게 부여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라신느>는 바로 그와 같은 비극을 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생활에 투신하여 자기의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이 모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생활에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참기 어렵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 있어서 이 사고방식은 다만 현실만이 문제로 된다는 것, 꿈이나 기대나 희망은 인간을 배반한 꿈, 좌절된 희망, 무익한 기대로서 정의시키게 하는데 지나지 못하다는 것, 즉 그것은 인간을 적극적으로가 아니고 소극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생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가가 오로지 그 예술작품에 의해서만 판정된다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외의 많은 것이 다같이 예술가를 정의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일련의 시도 이외의 아무런 것도 아니라는 것, 인간은 이러한 시도들을 구성하는 각종의 관계의 총화, 총합, 전체인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