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 진리는 감각 표상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험적 지식이 우선은 이미 인정되어 있는 다른 경험적 지식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으며, 정당화 되는 중에 한 과정 내지 몇 개의 과정은 논리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고 있는 지식을 정당화 하는 여러 진술 중에 논리나 의미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어진 경험의 내용에 조회함으로써만 확립될 수 있는 진술이 들어 있다면 그 지식은 경험적인 지식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역시 타당할 것이다. 경험적 지식은 아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대개는 서로가 상호간의 근거가 되어 줌으로써 성립되나, 모두가 그 근저에 있어서는 감각이 직접 발견한 것에 입각하고 있다. 그 근저에 진리임이 오직 주어진 경험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진술, 진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엇인가 하여간 이해될 수 있고 진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진위 결정이 가능한 비분석적 명제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며, 나아가 경험적 지식과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한편 특수한 경우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이해 가능한 의미가 없다면 이 경우 또한 경험적 지식은 성립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진술 또는 하나의 믿음이 어떤 경험 또는 어떤 일군의 경험에 의하여 진위가 확정되려면, 우리는 그 경험에 앞서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진술한 바나 가정한 바가 어떠한 경험에 의해 진리로 밝혀지며, 또 어떠한 경험에 의해 허위가 되고 마는가를 미리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가 판가름 될 수 있는 기준을 이해하는 일은 여하한 검증이나 반증에도 선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경험적 진술의 대부분에 있어서는 - 사실은 일상적인 진술의 전부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지만 - 단 하나의 경험이 그 진술이 진리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혀 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라도 그 진술이 완전히 허위라는 증명도 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결정적으로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서술 가능한 의미가 있음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의미를 지닌 진술은 통상 쓰여지지 아니한다. 그런 진술이 필요한 경우가 거의 없기도 하려니와, 그런 진술을 모호하지 않게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험적 믿음의 구조의 비교적 상층에 속하는 것은 명확히 표현할 수도 있으나, 그 구조의 기저에서 구조 전체를 떠받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인 것만을 진술하려고 시도하여도 그 진술들은 원래 기본적인 것에만 고유한 의미 영역 외의 것까지 함축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경험적 판단을 분석해서, 주어진 경험 속에서 그 근거를 밝힌다는 작업은 공식화하는 데에서 일차적인 난관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 점을 처음부터 잘 이해 내지 음미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경험적 지식 일반을 이해하는 데 생길 수 있는 몇 가지 해로운 오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간단한 경험적 인식, 즉 직접 지각에 의한 지식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
나는 내 앞에 한 조각의 흰 종이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나의 믿음에는 몇 가지 예상도 포함되어 있으니, 가령 내가 같은 방향을 주시하는 동안은 예의 종이 조각은 그 근본적인 성격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속 있으리라는 것, 눈길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그 종이 조각은 나의 시야의 왼편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눈을 감으면 종이 조각은 사라질 것이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해 보아서 이상의 예언 중의 하나라도 실현되지 않았다면 내 앞에 종이 조각이 실재한다는 현재의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고, 대신 그것은 비정상적인 잔영 또는 이상스러운 환각이나 환영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한편 그 방향을 한동안 주시해 본 뒤 눈길을 돌리고, 그 다음 눈을 감아 보았더니 결과가 모두 예상된 대로였다면 나의 믿음은 그 시험이 성공한 만큼은 진리로서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입증을 토대로 하여 더욱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예언을 계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상 또는 관념상으로는 이 믿음에 대한 검증이 완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장의 흰 종이라는 나의 믿음에는 아직 시험해 보지 못한 함축이 여전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가령 셀룰로이드 조각과는 달리 부러지지 않고 쉽게 접힐 수 있는 것이라든지, 건축사가 쓰는 설계지처럼 질긴 것이 아니어서 쉽게 찢어질 것이라든지, 혹은 갑자기 깨어보니 주위가 아주 다른 환경이 되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기타 언급할 수 없이 수많은 예상이 계속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이 실재하는 종이라면 내가 그 한 쪽 구석에 어떤 숫자를 써 넣을 경우 내일도 바로 그 숫자가 종이의 바로 그 곳에 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현재 내가 믿는 바, 그 종이의 실재성은 가능한 수많은 검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검증들도 또한 전부가 아닌 부분적인 것이며, 검증은 내일도 그 후에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보면 내가 종전에 언급한 공식화 상의 난관을 역시 피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나는 위에서 그 종이를 접는다든지 찢으려 한다든지 하는 아직 해 보지 못한 시험의 예상된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예언이 실현됐음을 발견하더라도 각 시험은 이론상으로는 실재 종이에 대한 나의 믿음에 대한 부분적인 시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때 말하고자 한 바는 그런 사람들이 비록 내가 믿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부분적인 검증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시험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사실 그것도 실패한 것이다. 즉 시험의 결과로 종이가 정말 찢어졌어도 그 사건이 내 앞에 종이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완전한 확실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재의 객관적 사건일 수는 있겠으나 이론상으로는 그에 대한 당장의 내 경험은 얼마든지 잘못된 것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객관적 사건이라기보다 차라리 어떤 예상된 경험들이다. 즉 종이가 접어지는 <현상>, 그리고 <느낌>, 또는 찢어지듯이 <보임>을 뜻했었다. 이런 <경험>의 예언이 바로 시험해 보았을 때 결정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독자 모두는 아마 내 뜻하는 바를 잘 이해했을 터이며 내 진술을 좀더 잘 수정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논하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방금 그 종이에 대한 경험적인 믿음을 검증할 여러 시험이 행해졌더라도 그 믿음에는 여전히 시험해보지 못한 많은 함축이 들어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검증이 완료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어떤 중요한 서류나 유언장 또는 <여름밤의 꿈>을 셰익스피어가 썼는가 혹은 베이컨이 썼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경우에는 거기에 포함된 함축이 수년이 지난 뒤 혹은 수 세기 뒤에나 시험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때 가서 결과가 부정적이면 어느 때 어느 책상 위에 어떤 특정한 종이조각이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은 비로소 의심스러운 사실로 되며 또 그래야 마땅할 것이다. 내가 위에 든 흰 종이조각의 예도 그 중요성이 다르다 뿐이지 이 점은 마찬가지다. 즉 내가 현재 믿고 있는 바의 흰 종이 조각의 경우도, 그 사실이 미래에 수반하는 결과들은 무한하여 결코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서 나의 믿음은 아무리 먼 미래에라도 그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나면 현재 믿는 바가 반증돼 버리고 말 예언들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결과가 부정적일 때는 나의 믿는 바가 허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까지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서 포함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입증된 바를 근거로 해서 미래의 시험이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추측도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도, 나중에 시험의 결과가 부정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이 진리라면 그 말 자체가 벌써 나중의 시험 결과가 모두 긍정적일 것을 요구하겠지만 사실은 그것은 개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개연성과 이론적인 확실성과의 차이가 아무리 극소해도 실제에 있어서 그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지라도 개연성 이상의 어떤 보증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 차이를 종종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객관적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나중의 상황에 따라서는 그 믿음에 대한 자신을 잃고 그 믿음을 수정 내지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경험되지 않는가?
이제 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함축하고 있는 결과는 얼마만큼 연장되어 있느냐는 것을 문제 삼자면, 예의 흰 종이 조각처럼 간단한 경우라도 그 결과의 수는 무한하다고 할 것이다. 우선 미래 어느 시점에서도 그 결과는 끝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즉 현재 책상 위에 이 종이 조각이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혹은 사실이 아닌가에 따라 앞으로 미래에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라도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래 어느 때에는 가정된 이 현재의 사실에 대한 한 톨의 증거도 실제로나 이론상으로나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한번 일어난 일이 차후에 그 정도의 증거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느 만큼 뒤에는 역시 그 일이 없었던 것과는 다른 결과 - 그것이 비록 아무리 하찮은 결과라도 -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정 기간 전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실은 알 수 없는 사물 그 자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일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현재 사람들의 합리적인 행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정말 있었던가 없었던가에 대한 관심은 허구적인 것이요, 아무 쓸모없는 것이요, 내용 없는 일정한 말의 형태를 떠들어 대거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에 동의케 하려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험할 수 있는 혹은 합리적인 이해에 상관이 있는 어떤 결과가 미래에 있지 않다면, 그런 과거의 사실을 믿는 것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이상 논술한 문제에 대해 자신이 명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객관적인 경험적 믿음이 무한한 결과를 함축하고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또 그 결과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앞으로의 시험의 부정적인 결과를 배제하는지 즉 아직 시험이 안 된 결과를 연역적으로 함축하고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하는 문제가 경험적 지식의 성질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론을 얻게끔 해준다. 그리고 그 결론이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겠다. 사실보다도 정연히 짜여진 이론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하든 또는 묵살하든 이상의 결론에 찬동하기를 꺼릴 것이다.
사실 이상의 견해에 대하여는 즉시 아래와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즉 어떻게 해서 무한한 경과를 가진 사실을 한꺼번에 믿을 수 있겠는가? - 한 사실을 믿으면서 우리는 동시에 그사실에 함축된 결과도 마찬가지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별로 심각한 어려움을 제기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반론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문제 되는 것은 <앎>과 <믿음>의 구별로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전혀 타당치 않다는 것을 말해 두겠다. 다음으로 이 문제는 한 믿음에는 여러 결과가 - 그 자신이 허위로 밝혀지면 믿음 자체도 틀린 것이 되고 마는 진술들이 - <포함되어 있다>고 할 때 그 말이 쓰인 의미와도 관련 돼 있다. 잠깐 생각해 보아도 모든 명제는 논리의 법칙에 따라 연역할 수 있는 무수한 결과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혹시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논리학자들이 연구해 낸 많은 논리학의 공식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이 공식의 일정한 항목들에다가 새 말을 자꾸 대입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전제에서부터라도 여러 가지 다른 결론들을 수없이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제에서부터 논리학의 공식을 사용하여 연역된 결과들은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결과의 성질은 좀더 논구할 여지가 있는 것들로서, 이에 관련하여서는 다른 중요한 문제들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취급하지 않고 우리 문제를 계속 논의하겠다. 여기서는 이 둘 사이의 다른 점은 고려하지 않아도 좋겠다. 하여튼 우리가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또는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 결과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 중의 하나라도 부정적이면 그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지금 경험한 사실이라고 가정한 것 또는 입증한 것은 언제고 미래에 그 증거에 관련될 것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미래의 시험 결과가 현재 우리의 입증이나 가정을 허위로 반증할 수 있는 것과도 더욱 무관할 수 없다. 우리가 입증한 것의 결과가 수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 결코 그 견해가 성립될 수 없다는 타당한 반론이 될 수 없다.
경험에 당장 주어진 것을 공식화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진술을 할 경우가 실제로는 매우 드물 뿐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게 주어지는 것을 공식화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일상 언어는 사실 자체에 의해서는 주어지지 않는 더 많은 검증 가능한 함축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일상 언어를 사용하여 직접 주어진 것만을 엄밀하게 진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야겠다. 그러나 이것도 지식을 분석하는 우리의 과제에 대한 본질적인 난관이 되지는 못한다. 표현되든 안 되든, 또는 엄정하게 표현될 수 있든 없든 간에 우리가 공식화하려는 그것이 역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이고도 의심이 여지가 없는 경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경험적 판단의 근거가 없어질 것이고 그에 대한 검증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사실에는 반론이 있을 수 없겠다. 아무리 모든 경험적 진술은 확실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더라도 그 모두가 경험이 아예 존재치 않는 경우나 똑같은 정도로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경험조차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가깝다. 그런데 모든 경험적 진술이 전적으로 불확실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즉 조그마한 확실성이라도 있다면 그 확실성의 근거가 되어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이해 가능한 경험적 사실인 것이다. 이 차원에 속하는 사실은 언어로써 명백히 표현이 되지 않더라도 모든 경험적 지식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분석의 문제를 언어의 관점에서만 다루려는 학자들은 경험적 소여에 관한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해 많은 논란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둘러싼 여러 상관없는 쟁점을 일일이 다 살펴볼 시간은 없다. 여기서는 우리가 그 내용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도 없는 오직 있는 그대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경험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아울러 이 주어진 것은 지각의 한 요소이지 결코 지각, 인식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도 말해 두겠다. 우리가 보고 듣는 등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에서 조금이라도 잘못 인식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해 보자. 그 때 남은 것이 바로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경험 내용이다. 만일 경험 속에 그와 같은 견고한 진수라 할 무엇이 없다면 - 가령 실재는 사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슴이 보인다는 착각을 가질 때도 있다. 이 때에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고 바로 그 무엇이 경험의 진수라는 것이다. - <경험>이란 말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진술 내지 공식화할 때에 - 공식화를 시도할 경우라면 - 우리는 주어진 것의 내용을 <전달>할 언어를 사용하나, 이 때 주장된 것은 그 언어가 전달하려는 내용뿐이지 그 때 써진 언어의 정확성이 주장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가령 예를 들어 <붉고 둥근 것을 본다.>고 말할 때 우리는 [<붉다>는 말과 <둥글다>는 말이 여기 주어진 대상에 정확히 적용된다.]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으며 그저 가정할 따름인 것이다. 후자는 한국말의 일상적 용법에 대한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일반화된 것이지 당장에 주어진 경험적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말을 배우지 않아도 붉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붉다>는 말이 당장 지금 주어진 현상에 적용된다는 것은 경험 속에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
지식 그 자체는 당장에 주어진 것을 공식화하지 않더라도 성립될 수는 있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표상된 것을 꼭 문장화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논의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의 기본적 사실성에 대한 언급을 회피할 수 없으므로 문제가 달라진다. 주어진 것을 말로 표현할 다른 방도가 없다면 지식을 분석하는 작업은 편의적인 형태의 언어라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니다. 소위 언어이 표현적 용법에 의하여 현상만을 즉 주어진 것만을 언급하는 공식화가 가능한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도 그 공식화가 의도하는 것쯤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적 진술이 공식화한 것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판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지식 이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아무런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를 진술한 것은 허위가 될 수도 있다. 주어진 당장의 경험 내용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그 내용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유한 판단과 그에 대한 진술이 있다. 이 진술들은 앞으로의 가능한 경험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진술이 단서는 직접 주어진 것에 있다고 하겠으나 진술될 것은 행동에 의한 시험을 통해서 검증될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한 판단은 <만일 A라면 E이다.>라든가 <S가 주어지고, A라면 E이다.>라는 형태를 갖는다. 여기에서 A는 가능한 것으로 인정된 일정한 양식의 행동을 표시하며 E는 예상된 결과를, S는 감각적인 단서를 각각 표시한다. 전건 A대로 행동했다면 행동한 그대로 A 자체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가령 주위 환경에 따른 내 근육 신장의 조건처럼 검증이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언제고 완결될 날이 없는 객관적 사태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후건 <E>는 경험의 종결성을 표시한다. 즉 E가 뒤따르면 그것으로서 그 경험은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 E가 결코 결과로 나타난 객관적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객관적인 사건이라면 그 사실성은 계속 검증을 받을 수 있으며 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판단 <만일 A라면 E이다.>의 전건과 후건은 표현적 언어로 공식화 되어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이 바로 표현적 진술은 아니다. 표현적 진술이란 경험에 주어진 것을 공식화 할 때나 쓰이는 것이다. 또 경험에 주어진 것에 대한 진술과는 달리 이런 유한 판단은 지식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문제의 예언은 검증을 요하는 것으로서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무한 판단이 있다. 그러나 객관적 진술의 의미 영역 내에는 본질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유한 판단으로 표현 가능한 것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객관적 진술에 의미는 어떠한 유한 판단의 무한한 집합도 완전히 들어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한 판단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간단한 진술이나 하찮은 진술이라도 이런 성격에는 중요한 진술과 다른 바가 없다. 가령 어떤 것이 푸르다든지 네모라든지 하는 진술은 그것이 푸르게 보인다든지 네모지게 보인다든지 하는 진술과는 달라서 앞으로도 계속 검증을 요하는 함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이에 대한 절대적인 그리고 완전한 검증은 끝이 없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할 수 있는 검증은 항상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사실 언제나 완전한 확실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 판단에는 많은 종류의 진술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통상 하는 경험적 진술은 거의 다 여기에 포함된다; <내 앞에 흰 종이가 한 장 있다.>는 것과 같이 지각된 사실을 입증하는 간단한 형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 추상적인 과학적 진술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험적 사실에 대한 입증은 중요하면 중요한 만큼 그것이 입각하고 있는 종국적인 바탕과는 거리가 멀리하고 있다. 가령 과학의 법칙은 귀납에 귀납을 거듭하여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판단은 무한하다는 점에서 모두 그 성격을 같이 하며 또한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그 종국적인 바탕도 오직 주어진 경험적 자료에 있다.
주어진 경험 내용에 대한 표현적 진술과 예언적 또는 검증 가능한 유한 판단의 진술을 구별하고 나서 다시 이 둘을 무한 판단으로 대표되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과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셋을 구별해야만 경험적 지식을 분석해서 그 근거를 경험 속에 밝히고 다시 그 근거에서부터 예의 지식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적 지식이 궁극적으로 입각하고 있는 것도, 확증의 근거를 찾는 것도 표상된 사실에 있다. 지각된 실재성을 진술하는 단서가 주어지는 것도 표상에 있으며 진술된 바가 입증되는 것도 또한 표상에 의한다. 그러나 표상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서가 되어주는, 또는 입증하려는 객관적 사실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객관적 믿음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을 이해 내지 공식화 할 길이 없을 것이고 또한 얼마간의 정당성을 지닌 믿음이 나중에는 왜 허위로 밝혀지는 것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가령 <나는 한 장의 흰 종이를 본다.>, <나는 종소리를 듣는다.>, <오렌지 냄새가 난다.>고 말할 때에는 이상 표현된 믿음을 일으키는 어떤 감각 자료(datum of sense)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고 있는 바가 감각된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된 믿음이 잘못인 것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경험이 이른 바 환각적인 것인 때가 바로 그 경우이다. 반면에 당장에 주어진 실제의 자료 그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사를 계속하여 이 믿음을 확증하려고 한다면 역시 감각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확증할 때 필요한 감각자료가 우리가 믿고 있는 또 확증하려고 하는 객관적 사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객관적 사실과 이를 검증해 주는 경험적 사건을 표현한 것과는 일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이미 어느 정도 확증된 것일지라도 계속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 - 즉 과거나 현재에 발견된 것에서부터 엄밀하게 연역할 수는 없고 경험적으로나 밝혀야 할 사람들을 함축하고 있다면 - 그 진술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그러나 검증될 사항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바로 그만큼 이론적인 불확실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모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제 다시 이 결론을 전제로 하고 나서 이와 같은 객관적 진술이 주어진 것 즉 현재로서 확실한 것에 대한 진술과 그리고 나중의 경험에 의해 확실하게 될 유한 판단의 진술과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그러한 구별이 없다면 객관적 진리를 개연적인 정도로라도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객관적 믿음의 입증 근거가 되는 것 즉 객관적 믿음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도 또한 객관적 믿음이 되고 말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개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 믿음이 개연적인 것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조차 개연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듯 경험에 의해 개연성을 얻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을 그 믿음의 보장을 제공하는 표상 내지 일련의 경험과 혼돈 한다면 객관적 실재를 주장하는 진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거나 어떠한 말로서도 이를 입증하려는 시도는 개연적인 것에서 개연적인 것의 근거를 찾으려는 무한 후퇴 내지는 순환논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개연성 자체도 참된 것이 아닐 것이다. 개연적인 것이 있으려면 확실한 것도 있어야 한다. 즉 참된 개연성의 종극적 근거가 되는 자료 자체는 확실한 것들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들이 있다. 즉 믿음의 단서나 되는 감각자료나 나중에 이 믿음을 확증해 줄 일련의 경험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서가 되는 자료나 그 후에 경험들은 객관적 진술을 할 때 사용되는 언어로는 기술되지 않는다. - 왜냐하면 그런 언어로는 객관적인 것 이상은 기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 상의 확실한 것들은 오직 언어의 표현적 용법에 의해서만 공식화된다. 언어를 이렇게 사용하여서 경험의 내용을 지시하고 그 내용이 주어졌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모든 객관적 진술이 상호 간에 서로 확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한 모든 믿음의 입증이 즉각적인 경험에 직접 조회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생각도 없다. 어떤 객관적 믿음은 다른 믿음에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믿음은 거의 대개가 - 다른 믿음에 의해서 귀납적으로 지탱된다. (이 경우에 다른 믿음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좀더 짜임새 있는 형태를 가진 것일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의 객관적 믿음이 다른 믿음에 의해 입증될 경우에라도 (1) 그 입증이 잠정적이고 가정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요 (2) 결국에 가서는 직접 경험에 의한 입증에 조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 경험에 의한 입증만이 결정적인 것이고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유일한 것이다. 한 객관적 진술 <Q>가 다른 객관적 진술 <P>에 의해 근거를 제시받고 있다고 한다면 <Q>에 대한 신빙도는 <P>가 제공하는 증명이 타당한 정도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 증명은 최종적으로 확실한 것에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에 개연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두 명제가 어떤 특수한 상황 하에서 명제의 내용이 일치한 결과로 그 개연성의 정도가 높아지는 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경험에 의해 직접 확증되지 않고서도 개연성을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진술을 하나도 없으니 이 객관적 진술들이 <진리정합설(하나의 진술이 여타의 진술의 총계와 조금도 모순이 없을 때에는 진리로 성립할 수 있다는 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상호 간에 근거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경험적 진술도 경험에 조회해서만 비로소 믿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당장 주어진 대로 확신할 수 있는 어떤 표상이 있으며 또한 동시에 이 표상을 통해 객관적인 사물 또는 사건에 대한 지식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나는 확고히 해두고 싶다. 그러나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것은 객관적인 사물, 사건 또는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 지식의 증거가 되는 경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사건 내지 사태는 개연성만을 지닌 것이나, 그 개연성은 실제로 확실성을 취급받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꼭 말해두고 싶은 점은 그와 같은 믿음의 내용은 최소한도 이론상으로는 경험 속에서 완전히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완전한 검증이란 어느 때고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