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저작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군주론>과 <정략론>이다. 그런데 그의 저서들은 마키아벨리의 개인적인 비극의 산물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피렌체의 정변으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정치적, 공적 활동에서 쫓겨난 후, 실의와 은둔, 칩거 생활 속에서 모든 정열을 쏟아 저작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계에서의 추방이 없었더라면 마키아벨리의 저작 활동은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저작들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할 때, 마키아벨리의 개인적 불행은 우리들에겐 오히려 다행스런 일로 되었다는 역설이 성립될 것 같다. 여기에서는 그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군주론>
<군주론>은 1513년 7월에서 12월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근대 정치학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작품은 <정략론>의 집필 도중에 갑자기 구상을 바꾸어 집필, 탈고한 것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꿰뚫는 일관된 모티브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과 분열, 사회적 부패와 타락을 극복하고 국민적 질서와 국가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에 대한 뜨거운 애정, 불타는 애국심이 작품의 행간마다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하겠다.
유럽 열강의 위협과 침략 앞에 굴종과 멸시를 강요당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수많은 군소 국가로 분열된 채 서로 대립, 항쟁하고, 외세와 결탁, 제휴하여 동족 간에 싸움을 벌이고 있던 현실 앞에서 마키아벨리가 꿈꾸고 기대한 것은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의 실현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 위업을 성취할 유능한 군주의 출현을 바라면서 아울러 그의 활동을 위한 계책과 방안을 제시하고 건의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에게 부과된 의무라고 믿고 <정략론>의 집필 도중 <군주론>을 쓰게 된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이 실현과 위대한 군주의 출현을 소망하면서 <군주론>을 썼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재등용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군주론>은 당초 대(大)로렌조의 아들로서 피렌체이 지배자였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에게 바쳐질 예정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교황이 갓 된 레오 10세가 동생인 줄리아노를 위해 에밀리아 지방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알고 줄리아노에게 기대를 걸었다. 아마 이때 마키아벨리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지원 하에 로마냐 정복을 시작하였던 체자레 보르지아를 상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줄리아노는 1516년 37세로 요절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줄리아노 대신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바치려고 한 이는 줄리아노의 조카 우르비노 공(公) 로렌조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군주론>의 내용에 대해서 마키아벨리는 그의 벗인 로마 교황청 주재 대사인 프란체스코 비델리에게 1513년 12월 10일 자로 보낸 편지에서 국가의 성격과 종류, 영토의 획득 및 유지 수단, 영토 상실의 이유를 논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논지와 저술 태도에 있어서 마키아벨리는 독창적이었다. 그는 신군주가 어떻게 하면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를 논하고, 그리고 이탈리아의 불행하고도 비참한 정치 정세를 호소하여 새로운 군주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의 계획과 위업이 하루 빨리 성취되기를 열망하였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생존시에는 출판되지 못했고 이것이 간행된 것은 마키아벨리가 죽은 뒤인 1532년이다. 그의 사망 후 5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으나 그때까진 다만 사본(寫本)으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 회람되는 데 그치고 있었다.
<정략론>
<정략론>은 1513년경에 착수하여 1517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원제(原題)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초편 10장에 기초한 논고(Discourses on the First Decade of Livy, 또는 Discorsi sopra a prima decade di Tito Livio)'이며, 유럽에서는 ’디스꼬르시(Discorsi)'라 불리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중 최초의 10권을 로마 공화제 시대의 사건과 스스로의 정치 경륜을 바탕으로 모두 3권에 걸쳐 서술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이를 ‘로마사론’ 혹은 ‘리비우스론’이라 번역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 의미를 따서 ‘정략론’으로 하였다.
<정략론>은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군주론>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정체(政體)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중심 테마로 되어 있는 <정략론>에서, 그는 이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먼저 군주제, 귀족제, 민중제의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것이 타락하면 참주제(僭主制), 과두제(寡頭制), 중우제(衆愚制)로 된다고 주장했다. 어떤 정체가 가장 효과적이며 안정되고 좋은 정치 형태일 것인가? 타락된 것으로서의 뒤의 세 정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앞의 세 정체도 세월이 흐르고 또 잘 못하면 뒤의 타락한 정체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앞의 세 정체가 갖는 성격의 모든 것을 내포한 정체가 가장 안정되고 견실하며 좋은 정체가 될 수 있는데, 이에 근사한 것으로 로마 공화정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일종의 혼합정체로서의 공화정을 이상적인 정체로 생각하고 있으나 공화정의 모든 것을 찬미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무엇이 실제로 유효한 정체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므로 곳에 따라서는 <군주론>과 같은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제1권 국가의 제도, 제2권 영토의 확장, 제3권 국가의 흥망에 대하여 논한 <정략론>은 <군주론>과 상호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현실에 적응된 그의 이론과 주장은 <정략론>의 ‘드리는 말’에도 나타나 있듯이 메디치가의 복귀 후 혼미와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피렌체의 정치, 경제 속에서 무엇이 최선의 방책이고 정책인가를 모색하고 있던 지식인들의 요구를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피렌체 사(史)>
<피렌체 사(史)>는 마키아벨리 최후 작품으로 8권의 대작인데, 교황 레오 10세의 종제로서 우르비노공의 사망으로 피렌체의 정권을 잡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의뢰에 의하여 씌어진 것이다.
로마제국의 쇠망에서 1492년의 로렌조의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역사인데, 제1권은 개설(槪說)로서 로마제국의 쇠망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 중세사까지 주요한 주권자의 성쇠를 기술하였고 제2권부터 제4권까지는 피렌체의 기원, 발달과 메디치가가 정권을 잡기까지를, 제5권에서부터 제8권까지는 로렌조가 사망할 때까지의 피렌체와 이탈리아 역사를 서술했는데, 특히 이탈리아 국가로서의 결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종래의 연대기와 달리 그 사실(史實)에 입각하고 논리적으로 귀납(歸納)하여 이른바 과학적 역사의 토대가 되었으며 근대 역사의 모범이라 불리고 있다.
<전술론(the Art of War)>
<전술론>은 1520년 가을에 원고가 완성되어 1521년에 출판되었는데, 모두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과 군대 생활에 관한 많은 일반적인 사상과 군대의 전술을 과학적으로 논한 작품으로 당시의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인기 있던 대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10년 기(紀)>
<10년 기(紀)>는 1494년 이후의 피렌체 역사이나,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피폐(疲弊)의 원인을 규명하고 자국 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그 모범을 고대 로마와 체자레 보르지아에게서 찾으려고 했는데, 종신 통령 소데리니는 이 헌책(獻冊)을 받아들여 자국 군대의 조직, 편성에 착수하였다.
이외에도 마키아벨리는 많은 저서와 글을 남겼다.
1511년 이후 교황 율리우스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대립 사이에서 고민, 방황하고 있던 피렌체의 사절(使節)로서 활약하던 마키아벨리가 바쁜 가운데서도 <독일 사정(事情)>과 <프랑스 사정>을 썼으며, 이들 작품에서 독일의 도시 자치제와 프랑스의 중앙 집권제와의 상이성과 두 나라의 번영을 분석하고 프랑스의 국세민정(國勢民情)을 파악하여 소개했다.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정치적, 역사적인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 희곡 등도 쓰고 있다. 피렌체인의 기지(機智)를 만끽케 하는 <황금당나귀>(1517), <만드라골라(Mandragola)> 등을 발표했는데, 특히 <만드라골라>는 유부녀의 간통(姦通) 이야기로 당시의 피렌체의 사회상과 풍속을 날카롭게 파헤친 걸작이며, 1520년 상연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1514년에는 <언어에 대한 대화(Dialogue on Language)>를 썼는데 이미 사어(死語)가 된 라틴어에 의한 표현을 피하고 특히 속어(俗語), 즉 일상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피렌체의 언어를 정선하여 사용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룩카시에 사절로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의 사정을 조사하던 중 룩카시의 용병대장이었던 까스뜨롯치오 까스뜨라까니에 흥미를 갖게 되어 <까스트롯치오 전(傳)>을 썼다. 이에 앞서 1519년 6월 11일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피렌체의 명사(名士)들을 모아놓고 시정(施政)상의 의견을 물었을 때,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정부의 개혁을 논함>이라는 글을 바쳤다.
<군주론> 등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과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살고 활약한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 파악해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마키아벨리에 관한 많은 전기(傳記)와 평론 등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그의 이론과 사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 평가, 비평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