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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술사전

향가(鄕歌)

작성자안스로직(운)|작성시간10.07.22|조회수124 목록 댓글 0

삼국시대 말엽에 발생하여 통일신라시대 때 성행하다가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고려 초까지 존재하였던 한국 고유의 정형시가(定型詩歌). 순수한 우리 글로 표현되지 못하고 향찰(鄕札) 및 이두(吏讀), 곧 한자(漢字)의 음(音:소리)과 훈(訓:새김)을 빌어서 표기되었다. 전래 문헌에 의하면 향가의 뜻은 사뇌가(詞腦歌) ·도솔가(兜率歌) 또는 국풍(國風) ·자국지가(自國之歌), 즉 국가(國歌), 신라시대 고유의 노래, 동방 고유의 노래이며, 좁은 뜻으로는 신라의 가요 또는 고향의 노래 등 국문학자들의 여러 해석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의 사뇌격(詞腦格), 《삼국유사》 권2의 사뇌가, 《균여전(均如傳)》의 사뇌 ·사뇌자(詞腦者) 등 명칭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이설이 있으나, 이를 모두 ‘痛ゑ’의 차자(借字)로 보고, ‘痛ゑ’는 동방(東方)이라는 뜻이므로 사뇌가는 ‘동방의 가요’라는 뜻으로 향가와 동의어(同義語)로 본다. 향가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에서 고려 광종 때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에 이르기까지 약 370여 년 동안 성행한 듯하나,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이다. 그것을 형식면에서 구분하여 보면 4구체(四句體) ·8구체(八句體) ·10구체(十句體)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4구체로 된 작품은 비교적 원시적인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서동요》 《풍요(風謠)》 《헌화가(獻花歌)》 《도솔가》 등 4수가 있다. 이 중 《서동요》와 《풍요》는 발생 전설 및 창자(唱者)나 내용상으로 보아 그것이 본질적인 민요이고, 《도솔가》나 《헌화가》 자체로 보아서는 민요가 아니지만 민요형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도솔가》나 《헌화가》를 민요형식으로 보는 것은, 《서동요》와 《풍요》가 민요인데 그것이 4구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가요형식을 이어받은 고려의 가요[俗歌]가 역시 4구체였다는 점 외에도, 삼국시대 중엽까지 한국 말로 된 노래 중에 상류계급(지식층)과 서민층의 노래가 분립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식층이 많지 못한 시대는 그들만의 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서민층이 부르던 것도 민요형이고, 지식층의 어떤 개인이 노래를 짓는다 할지라도 스스로 기존 시가형인 민요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대의 시가는 음악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부터 불러오던 음악적 창조(唱調)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형태이다. 그런데 가악(歌樂)이 발달하고 사상 감정이 진보하여 4구체에서 그 배구(倍句)인 8구체가 발생되었다 하더라도 초기는 기존 시가형과 병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새로운 시가형이 파생되었다 해서 기존 시가형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8구체 향가가 이루어진 뒤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4구체의 민요형을 취해서 노래를 짓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월명사(月明師)는 4구체인 《도솔가》 외에도 10구체인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4구체나 8구체 또는 10구체의 노래가 모두 한국 말로 된 노래라는 뜻에서 향가라고 통칭했던 것인데, 그 중 10구체의 향가는 특히 사뇌야(詞腦野) 지방에서 주로 유포 ·발달하였고, 국가적인 가악에서 그 음악을 사뇌악(詞腦樂)이라 하였으므로 이 10구체를 사뇌가라 부르게 된 것 같다. 한편, 8구체는 상당히 정제(整齊)된 형식으로 발전된 것인데, 전 ·후절의 구별없이 8구로 되어 있으며 4구체가 발전된 형태이다. 해설 역문(譯文)에 의하면 8888, 8888, 후구 88의 형식을 취한 듯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처용가(處容歌)》의 2수가 이에 해당한다. 다음 10구체는 향가의 형식이 거의 완성된 단계로서, 전후 양절을 나누어 전절 8구에 후절 2구, 모두 10구로 된 향가의 대표적 형식이다. 여기에는 《혜성가(彗星歌)》 《원왕생가(願往生歌)》 《원가(怨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안민가(安民歌)》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우적가(遇賊歌)》를 비롯하여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현회향가(普賢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등 18수가 포함된다. 이와 같은 향가들은 《혜성가》에서 그 형식적인 완성을 찾아볼 수 있다. 향가의 형식상 특징은 종장(終章)이 2구로 이루어지고 처음에 반드시 ‘아으[阿也]’의 영탄구(詠嘆句)가 붙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후에 발생한 시조(時調)의 종장 첫구에 흔히 나타나며, 가사(歌辭)에도 형식상의 유사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향가의 형식적 유습이 후대 한국 시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제1장의 첫 구절은 다른 구절들에 비하여 대개의 경우, 그 길이가 짧고 전편의 길이는 자수와 음절수로 보았을 때 대체로 80 내지 90 사이에서 약간의 가감이 있음을 들 수 있다. 이들 향가를 내용별로 보면 《서동요》와 《풍요》 등 동요와 민요, 《혜성가》와 《처용가》 등 축사(逐邪)의 노래, 《원가》 등 연군(戀君)의 노래, 《우적가》 등 설도(說道)의 노래, 《안민가》 등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노래, 불교예찬의 《보현십원가》 등 다양한 주제를 택하였다. 향가의 작가로는 득오곡(得烏谷) ·충담사(忠談師) ·처용랑(處容郞) ·희명(希明) ·광덕(廣德) ·월명사 ·융천사(融天師) ·신충(信忠) ·영재(永才) 및 균여대사 등이 있는데, 이들을 성분별로 보면 승려 ·화랑 ·여류 ·기타로 구분할 수 있다. 내용별로는 불교관계(18수) ·군신관계(2수) ·남녀관계(2수) · 붕우관계(2수) ·기타(1수)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작가별로는 승려 작(18수) ·화랑 작(3수), 여류 작(1수), 민요(2수), 실명(失名:1수) 등이다. 한편, 형식상으로는 10구체(19수) ·8구체(2수) ·4구체(4수) 등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현전하는 향가 5수가 수록된 문헌인 《삼국유사》(14수)나 《균여전》(11수)이 승려들의 저술이거나 또는 승려의 전기이기 때문에 그 작품의 내용이나 작가에게도 자연히 불교적인 색채가 짙어졌을 가능성이 많고 따라서 편향적인 경향을 면치 못한 것 같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라문화는 주로 불교적인 기반 위에 입각해 있었으며, 문학이 일반적으로 문화 현상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 문학만이 이러한 주조적(主潮的)인 경향에서 멀리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으며, 비록 그것을 전하는 문헌의 편파성을 시인한다 해도 앞에 제시한 분류 숫자는 당시의 문학 현상을 어느 정도 올바르게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형식에 있어 10구체가 19수, 내용에 있어 불교적인 것이 18수, 그리고 작가는 승려 5인의 것(18수)이라는 점 등이 시사하는 의미는 곧 그 시대의 패션(fashion)을 전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라 하겠다. 따라서 향가문학은 전적으로 신라의 국민문학의 성격을 띠었던 듯하다. 즉, “향가의 전형적인 형식은 10구체이고, 주동적인 작가는 승려였으며, 지배적인 내용은 불교적인 것이다”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패션을 하나의 장르로 설정하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향가의 수사적(修辭的) 특성을 살펴보면, 《사뇌가》는 발원의 성취라는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서도 수사적인 기교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예컨대, 월명사의 《제망매가》에 작자의 골육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숭고한 종교 의식에 덮인 순탄한 표현 기교 때문에 눈물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가을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무상한 인생과 형제간의 애정은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그 내용이 신불(神佛)에 대한 발원인 이상, 그 수사는 자연히 명랑하고 신비롭고 숭고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오늘날 전하는 향가 가운데서 저속하고 침음(沈陰)한 표현을 찾지 못하며, 또한 그 수사가 순진하고 원융(圓融)하여 평화로운 반면에 예리하고 격정적인 모습도 찾지 못한다. 이처럼 향가의 수사는 숭고하고도 평화로워, 흔히 고려시가에서 볼 수 있는 경박성과 노골적인 퇴폐성(頹廢性)을 찾지 못하는 동시에, 시조에서 보는 참신한 간결성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그 내용에서 연유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향가에서 ‘사청구려(詞淸句麗)’하고 ‘기의심고(其意甚高)’한 신라인의 표현을 재삼 음미하게 되며, 화랑의 문학, 즉 낭불(郞佛) 공유의 문학 또는 토속신앙의 문학 등으로 씩씩한 기상도 찾아볼 수 있다. 향가의 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는 가장 오랜 《서동요》(559 이전)로부터 《처용가》(879)에 이르는 320여 년 동안에 생성된 것이며, 균여대사가 지은 11수는 973년(고려 광종 24) 그가 죽은 해 이전에 성립한 것이므로 이렇게 따지면 370여 년간에 이루어진 향가가 오늘날 전하는 셈이다. 《도이장가(悼二將歌)》까지를 향가로 본다는 설도 있어 여기에 따른다면 1120년(예종 15)까지 연장되어 520여 년에 걸치게 된다. 이상 개괄해 본 것처럼 향가의 소멸시기, 향가가 행해지던 지역적인 범위, 향가의 총작품수(失傳작품 포함) 등에는 여러 이설과 의문이 많으나, 향찰이 발명되기 이전의 작품은 표기문자가 없어서 구전(口傳)되다가 소멸하였거나, 또는 향찰로 표기되다가도 소멸되어 전승되지 못했던 듯하다. 특히 오늘날 이름만 전해지는 향가집(鄕歌集) 《삼대목(三代目)》이 실전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나 현전하는 25수야말로 국문학사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신라문학에 접할 수 있고, 당대의 문학적 생활을 엿볼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또 향가는 훈민정음 이전의 고어 연구를 위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향가가 훈민정음 이전의 표기형태인 향찰이나 이두로 기록된 작품이므로, 그 해독에 어려움이 따르고 각각 해독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다는 점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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