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개화파가 발전시킨 부르주아적 개혁사상. 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역관 출신 오경석(吳慶錫), 의관 출신 유홍기(劉鴻基) 등이었다. 이미 실학적 학풍을 체득한 박규수는 1861년과 1872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자본주의 열강의 무력에 굴복한 청의 현실을 목격하였고, 1866년 평안도감사 시절 셔먼호 사건 등을 직접 겪으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지닌 열강에게 대항하려면 문호개방을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중인 출신의 역관 오경석은 18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 천진 ·북경 등지를 드나들면서 중국에 유입된 새로운 서구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서양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만국공보(萬國公報)》 등의 신서(新書)를 가지고 왔다. 이 책들은 모두 화이론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봉건 지배층에게는 이단이었지만,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에서 세계정세와 서구사회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입문서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자연히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 봉건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고, 자신의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인 의관 출신 유홍기에게 자신이 중국에서 구입해온 책과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며 함께 연구할 것을 권하였다. 두 사람은 구입한 문명서적을 바탕으로 세계정세를 연구하여 사회제도로서의 자본주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지 않고는 구미열강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하리라고 생각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한 일대혁신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계 대세에 상응하여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박영교(朴泳敎)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등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이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 핵심적 내용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들이 제시한 ‘14개조 정강’에서 총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정치면에서는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는 것이며,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는 것이었으며, 경제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을 강화하려고 지조법(地租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상공업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자본주의적 산업경제로의 발전을 지향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조선사회의 자본주의화를 그 사상의 기본적인 방향으로 설정하면서도, 지주적 토지소유의 옹호 ·발전을 통한 지주경영의 자본가적 경영에로의 개편을 구상, 지주 및 지주와 거의 이해가 일치하는 대상인(大商人)을 근대사회의 건설주체로 설정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우선 당시 봉건적 토지소유 제도와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의 청산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농민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함으로써 농민들의 반봉건적 개혁역량과 결합하지 못하는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한 지주 중심의 개혁방향은,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에 혈안이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투쟁할 내적 근거를 약하게 하였고, 그 결과 개화사상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상적 한계를 띠었다. 한편, 개화사상은 기본적으로 개혁의 방향에는 일치하면서도 부르주아적 개혁의 방법을 두고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청의 양무론(洋務論)적 입장에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도입하되 개혁정책은 민씨정권과의 타협 아래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뿐만 아니라 사상 ·제도까지 도입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철저한 개혁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민씨정권의 타도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뒤 급진적으로 추진하자는 변법(變法)적 입장이었다. 이후 온건적 입장은 갑오개혁,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주도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이어졌고, 급진적 입장은 1884년의 갑신정변,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개혁사상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이래 조선봉건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던 개화사상은, 이전의 실학사상(實學思想)이나 봉건유생들의 척사사상(斥邪思想)보다는 진일보한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다. 그러나 지주적 기반을 가진 개화파의 계급적 한계와 당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로 말미암아 조선사회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끌어내는 사상으로까지는 자리잡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