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자유문학 2019년 가을호 계평〉
시적 체험과 형상화
김관식
1. 문제 제기
“詩는 生의 묘사이며 表現이다. 그것은 體驗을 表現하고 생의 외적 현실을 묘사한다. 나는 시험 삼아 生 의 양상을 讀者의 기억 속에 불러일으키어 보련다.”고 딜타이는 生에 대해 말했다. 결국 모든 사물이나 모든 개인은 자기의 생활과 관련된 경험 속에 어떤 특수한 힘과 빛깔을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시는 곧 체험이라고 할 정도로 체험은 시를 빚는 주재료이다. 한국인의 느낌을 담아놓은 원천적인 체험은 한국인의 신화 속에 있고, 신화는 곧 언어인 것이다. 시는 언어를 통해 시적 체험을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하여 언어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시적인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하여 시각화하였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발표된 시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시적 체험
딜타이(Wilhelm Dilthey)에 의하면 체험은 ‘개인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바’를 뜻하며, 인식 기능을 갖는다고 하였다. 즉, 인간경험의 전체성과 질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의미이며, 특정 개인이 갖는 온갖 느낌이나 감정 혹은 정서 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흔히 체험은 경험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경험은 간접 경험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체험까지를 포괄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고, 체험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만을 의미하는데도 구별되기도 하지만, 경험이 우리 신체와 상황의 만남이라면, 체험은 그 만남을 통해 우리 신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은 하는 것을 의미하는 객관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인 반면에 체험은 하는 것을 통해 느끼고 깨닫고 반성하는 주관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경험이 지식 획득의 계기를 강조한다면, 체험은 자아가 내적으로 겪는 감정적인 계기도 중요시한다. 그러나 그 의미 차이를 명확히 하기는 어려우며, 결국, 자아와 세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체험인 것이다. 즉 경험은 인식의 영역이라면, 체험은 존재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딜타이는 체험을 인식의 방법으로 삶을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삶에 다가가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은 체험하는 존재로 보았으며. 체험은 어떠한 것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된 것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며, 그 표현에는 해석을 포함한다고 했다.
정서가 의식 속에 드러나고 그것이 질서화 되어 창작자의 내면에 모호함이 아닌 어떠한 형태나 규정된 느낌으로 구체화 될 때만이 시 창작의 동인인 시적 체험으로서의 정서 체험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정서는 인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우리가 세상을 인지라고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정서의 양상이 달라진다. 같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모두 같은 정서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 주체 개개인 내면의 인지적 과정에 해당하는 각자의 해석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정서는 대상이나 타자에 대한 연결 즉 어떠한 정서적, 인지적 지향성이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연결된 관계에 공감이 발생하게 된다.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상호 연관시키는 능력이다. 외적 사물과의 교섭하면서 느낀 정서 체험들과 동일성으로 일체화가 될 때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는 시가 창출되게 되는 것이다. 시적 체험은 크게 나와 세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정되는 공시적 시적 체험과 통시적 시적 체험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반드시 체험은 상상력과 더불어 작용하게 된다.
공시적 시적 체험이란 순간성이라는 시간성을 바탕으로 대상과의 합일의 체험, 카이저가 말한 “서정적인 것 속의 세계와 자아는 정녕 자기 표현적 정조의 자극 속에서 융합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이다. 심령적인 것이 대상성에 깊이 파고 들어서 그 대상성은 내면화되는 것”으로 순간적인 감정의 고조로 인해 실현된 공시적 동일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에 통시적 시적 체험은 시간의 순간의 지속 중 종단면과 관련된 것으로 과거와 현재의 관계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즉 통시적 동일성은 체험 주체의 여러 기억들이 동시적으로 작용하는데 이것은 주체에 의해 해석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좀 난해한 말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시를 보면 통시적 시적 체험을 형상화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적 체험은 주로 동기, 인지, 정서 등의 요소로 나누어 설명되기도 하는데, 동기는 주체와 객체간의 공존성이라는 관계를 지향하여 결합하게 된다. 즉 정서적 관심이 창작 주체와 세계의 상호 관계 형성에 최소한의 동기로 시 창작하려는 정서적 충동을 일으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고, 인지 요소는 시적 체험을 이루는 세계와 창작 주체 간의 인지적 특징을 지닌 창작주체의 의미 생성 차원과 관련이 깊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체험이 결국에는 창작 주체가 생성하는 의미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시적 체험은 인지 요소를 따로 분리되어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서와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정서 요소는 창작 주체의 마음의 상태와 관련된 요소로써 정서란 심리 작용을 통한 자아의 내적 상태를 말한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지닌 감성은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대상에 의하여 촉발되는 방식 여하에 따라서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이성과 구분되는 직관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시 창작은 감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며, 이 감성이 직관을 통해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을 취한다.
동기, 인지, 정서 등 세 요소를 공감성, 인지성, 정서성으로 재개념화 해서 설명하면 동시는 곧 공감성으로 세계와 창작 주체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구체화되어 지는데, 이때 세계와 창작 주체가 서로 연결 되는 지점이 바로 정서적 관심을 촉발하는 공감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지성은 시적 체험의 인지적 요소는 시적 대상에 대한 의미의 생성과 관련된다. 창작 주체가 되는 시인이 시적 대상을 그것이 감각적 체험, 또는 사건적 체험(통시적 체험)을 해석화 하는 방식은 창작 주체의 정서에 영향을 주게 된다. 창작 주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주로 사회·문화적 맥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맥락이 고착되어 더 나아가지 못하는 현상에 매몰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시적 체험은 맥락을 돌아보고 고착을 발견하여 사고의 방향을 정직하고 능동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인지적 체험을 포함한다. 맥락에 고착된 경우는 고정관념의 고착, 관습화된 표현 고착, 원인 결과 고착, 태도 가치 고착 등을 들 수 있다. 고정관념의 고착이란 개념에 함몰되어 더 이상 생각을 멈추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많은 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나나하면 노란색, 사과하면 빨간색, 까마귀하면 검은색을 떠올린다. 관습화된 표현 고착이란 매미가 운다와 같은 표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서성을 구성하는 정서의 네 가지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이 감정, 목적의식, 신체적 각성, 사회적 표현적인 요소로 구별할 수 있다.
정서는 감정 뿐 아니라 신체, 목적의식(동기), 사회적·표현적 의사소통과 관련지어 진다. 특히 감정은 주관적 경험, 현상학적 인식, 인지와 관련되며 이것은 정서가 인지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정서성은 공감성과 인지성을 연결하는 요소이기도 하며 또한 공감성과 인지성 전반에 걸쳐 있는 요소이다. 공감성에 의해 정서성이 촉발되며 또한 정서성에 의해 공감성이 확장되기도 한다. 정서성은 창작 주체의 마음의 상태와 관련된 요소이다. 시적 체험은 창작 주체로 하여금 대상이 구현하고 있는 정서의 상태나 또는 유사한 상태에 도달하게도 하고 또한 인지적 과정인 해석을 통하여 정서를 능동적으로 생성해 내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는 시인의 시적 체험(공시적 체험과 통시적 체험)을 재료로 하여 동기, 인지, 정서 등 세 요소를 공감성, 인지성, 정서성으로 동일성을 추구하며 재개념화 하는 과정을 거쳐 상상력으로 형상화되게 되고 묘사와 진술의 언어적 표현으로 시가 창작되게 되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시는 곧 체험이다.”라고 말했듯이 결국 시는 체험을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체험을 재구성하고, 공감성, 인지성, 정서성으로 형상화, 감각화, 객관화하여 보여주는 언어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시적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 감각화, 객관화하여 묘사와 진술로 표현했는가하데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한다.
3. 『자유문학』 2019년 여름 호 계평
이번 호의 〈시 열다섯 편의 특선〉에는 金汝屋의 「한 슬픔이 가면 한 기쁨이 오는 것」 외14편의 시를 게재했다. 「한 슬픔이 가면 한 기쁨이 오는 것」은 시제부터가 정서 상태를 표현하는 관념어로 정서의 변화 상태를 경구로 제시하고 있다. 정서적인 관념의 상태는 체험의 영역에서 추상적인 체험을 진술하기 때문에 그 범위가 넓어 공감도가 낮아지기 마련이다. 시어를 관념어나 추상어로 사용할 때는 그 범위가 넓어 구체적이지 못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색깔을 혼합색을 선택하여 그림을 그리면 무슨 그림인지 불분명해지는 이치와 같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되도록 단색으로 선명하게 대상을 드러낸다. 물론 추상화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혼합색을 사용하여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는 언어가 바로 그림의 색깔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좋은 시는 어떻게시어를 선택하고 배열했느냐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각 연의 종결어미를 “∼있더이다.”라는 고어체하고 있는데 이 또한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요인이 된다. 좋은 시는 뜻이 넓은 관념어나 추상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형상화하여 구체적인 감각어로 묘사되고 진술되어야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의 부위에서 멀어질수록 공감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신체와 가깝게 표현될수록 공감도가 높아지는 것이며, 한자어보다는 우리말이 더 공감도가 높은 까닭은 한자어 자체가 사물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든 상형문자이기 때문이며 우리 한글은 소리글자이기 때문에 사물이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단색의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시인은 모국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늦으믄 어쩌, 까짓거」는 시제가 충청도 방언인 일상어이다. 과거의 어린 때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진술로 리얼한 현장감을 살려내기는 했으나 형상화가 되지 않고 산만한 구성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진술했다. 「적과에 대하여-사과 과수원에서」 과수원에서 너무 많이 달린 열매를 속아내는 적과작업 경험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상상력으로 비판의식을 진술한 시이나 관념적인 진술로 주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주관적인 시각에 의한 기도문으로 일관했으며, “〜하소서”, “〜이다.”로 종결어미가 일관성이 없어 기도와 진술의 혼선을 빚어내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또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인도의 여행경험을 담았고, 「우리 모두의 통일은」은 통일에 대한 환상을 진술하고 있으며, 「불온한 생각」은 언어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과 내면의식을 기술했으며, 「꽃눈을 뜨다-사회에 첫발을 딛는 아들에게」는 자식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을 관념적으로 어려운 낱말을 시어로 사용하여 장식적으로 진술했다. 시는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그 느낌을 시각화하여 보여주어야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잣대」는 30년 전에 본 방송 프로그램을 떠올려 진술했으며, 「술잔을 돌리면 뺨도 돌려라」는 조선 후기 때의 이야기를 기술했다. 시적인 영역을 벗어난 산문의 영역의 옛날이야기의 기술이며, 「21세기 캐치프레이즈」는 빌게이츠의 이야기다. 「사람은 궁하면 거짓말을 한단다.」는 5.18 민주 항쟁에 대한 생생한 역사적인 사례를 기술했다. 체험사실을 그대로 진술하고 했을 뿐 시적인 형상화 작업을 거치지 않아 시적인 감수성을 자극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바다로」는 인도의 장례식 풍경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진술했으며, 「꽃은 또 피는가」는 우리나라의 정치문제를 진술했다. 「엄마, 안녕」은 편지글 형식의 사모곡이다.
김여옥의 시는 시제가 너무 길고 시를 대표할 만한 상징적인 시제로 독자의 호기심을 끌 수 있는 간결한 시제로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로 경험을 가공하지 않은 채 관념어로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방식의 정공법적인 작시법으로 시를 쓰고 있다. 시는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객관적 상관물을 등장시키고 화자와 청자를 설정하여 정서를 직접 노출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시적 대상과 일체화시켜 묘사와 진술로 표현하는 장르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가 주관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이미지로 느낌을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미지로 드러내지 않고 장황한 관념적인 진술에 의존하면 시의 영역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김종제의 「꽃 절」 외1편은 진천 보탑사를 방문한 체험과 소감을 진술했다.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그대로 진술하면서 느낌을 곁들이는 일기체 형식의 시이다. 「복사꽃밭에서」는 영덕의 황장재를 지나갈 때 본 복사꽃밭을 본 소감을 기술했을 뿐 시적인 형상화작업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소감문 형식의 작시법으로 시를 창작했다. 이러한 소감문 형식의 시는 주관적인 정서가 그대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시적인 공감을 얻기가 힘들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작시법은 시적 대상과의 화자의 거리가 가까워 숲의 전제를 객관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숲 속의 나무만 보는 주관에 치우칠 개연성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형상화 작업을 거쳐서 시적 대상과 거리를 적당한 거리에서 조망함으로써 느낌을 객관화하여야 공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춘의 「창가에 서서」 외4편은 ‘너=별’로 의인화하여 감정이입하여 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오는 자신에 깨달음을 진술했다. 그러나 자기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랑아”라는 불필요한 감탄사로 토로하고 있고, “문득문득 멀리 나간다.”라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역동적인 표현이 현실감에서 멀어지는 관념속의 유희로 마무리한 점이 아쉬웠다. 「바람길」은 관념속의 “사랑”, “슬픔”, “기쁨” 등의 정서를 바람으로 은유하여 표현했으나 형상화가 되지 못한 관념의 기술에 머무르고 말았으며, 「켜」는 몸속에 켜가 있다는 발상으로 시상이 전개되었으나 몸과 관련이 없는 시간에 따른 경험의 축척을 켜의 개념으로 끌어온 관념의 유희적 진술로 일관하였으며, 「風景이 없는 마을-아파트」는 도시의 아파트 공간에 대한 단절의식을 표현했다. 「大地」는 대지를 어머니로 은유하여 표현했으나 “아아!”와 같은 감탄사로 대지의 이미지와 어머니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드러내지 못하고 관념 속에서 막연하게 ‘대지=어머니’라는 억지스러운 결합으로 시상을 전개하여 언밸런스의 구조를 보였다. 물질적 상상력 이론을 전개한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 불, 대지, 공기 등 4원소로 집약하여 상상력 이론을 펼쳤는데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을 읽어보시면, 시인은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4원소 중의 하나인 대지를 곧바로 어머니와 일치시켜 시상을 전개하는 것보다는 형상화로 경험 정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할뿐 시인 자신이 시 속에 직접적으로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辛宙源의 「젊은날 거울속 쌍둥이-아버지를 간호하면서」는 아버지에 대한 삶과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감상적으로 진술했으나 주관적인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꿈꾸듯 거꾸로 걷는 사람들 속에서”, “子時 꿈기둥 물면속으로 잠겨 들어가” 등 이미지로 구체화하지 못한 주관적인 상황만을 제시했다.
정하선의 「치자꽃 피는 밤」은 치자꽃 피는 밤의 아름다움을 이미지로 형상화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진술했다.
이계자의 「화창한 날에 그분의 은혜를」은 종교적인 자신의 생각을 진술하였다. 시적인 형상화 과정이 없이 자신의 종교관과 견해를 기술한 신앙 고백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분순의 「1회용 희극」은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을 관념적으로 노래한 시조이며, 「손끝에 유토피아」는 시 창작의 행위를 미화한 시조이나 “유토피아”, “은익”, “찬미”, “데미안”, “오디세이어”, “축제” 등 외래어와 한자어를 남발하여 시상을 전개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했다.
靑詩 조영실의 「밤에 자란다」외6편은 원예 시간에 배운 대로 고구마 순을 심은 농사경험을 통해 고구마 순이 뻗어나가는 모습을 꼬맹이들로,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물을 주는 자신을 초년생 농부로 진술했으나 “초롱초롱 별빛 비추는 밤이 오면 우리는/ 함께 초록빛꿈 꾸며/함께 쑥쑥 자란다.”는 사물에 대해 세밀한 관찰하지 않고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으로 진술한 점이 시적인 미감을 격감시켰으며, 「엿들은 대화」는 부부간의 에피소드를 대화체로 진술했고, 「열 일 곱」은 어머니의 완고한 교육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진술했다. 「하루는 어떻게 오나」는 하루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진술했을 뿐 시적인 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인의 소감을 피력한 산문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장님 가수」는 장님 가수가 무대에 등장한 사례를 기술했고, 「빙판」은 소년이 빙판에서 스케이트 타는 특정한 사례를 기술했으며, 「한번에 하나씩 좋은 생각을」은 이순신 장군 이야기와 트럼프 미 대통령 이야기 나라 걱정에 대한 이야기하루의 일상을 생각이 떠오르는 데로 기술했다. 시적인 형상화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이라는 시적인 미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유스러운 생각의 기술로 이어졌다.
김종상의 「사람은 생각까지」 외4편은 곤충들과 동물들이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간다는 평범한 시상을 진술했고, 「몸을 맡겼다」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모습에 대한 물활론적인 동심적 상상력으로 “지구는/가려운 곳 긁어주는/아버지, 어머니께/몸을 맡기고 엎드렸다.”고 재미있게 표현했으며, 「손이 많은 나무는」은 겨울 날 나뭇가지에서 눈이 떨어져 맞아본 경험을 동심으로 진술했다. 「사랑을 받으면」은 매미, 솔나방, 부나비의 애벌레 이름이 굼벵이, 송충이, 풀쐐기 등 듣기 거북한 것과 닭, 개, 소의 어린 것의 이름이 병아리, 강아지, 송아지 등으로 사랑스런 이름으로 불리듯이 사랑을 받으면 귀엽고 재롱스럽게 보인다는 곤충과 동물의 이름에 대한 발상이 특이했다. 「우리 땅 모양」은 우리 땅을 누에로 만주를 뽕잎으로 비유하여 말한 애국지사와 한반도는 토끼로 비하하여 부른 일본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 강토를 호랑이 비유하여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부상할 국토에 대한 생각을 진술했다.
4. 나오며
릴케는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다.”이라는 시에 대한 정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체험이 없는 시는 머리로 쓰는 시이기 때문에 감동을 주지 못한다. 머리로 쓰는 시, 가슴으로 쓰는 시, 몸으로 쓰는 시가 있다. 머리와 가슴과 몸을 총동원하여 쓴 시가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많은 시인들이 체험이 없는 머리로 시를 쓴다. 체험이 없으니 생생한 느낌을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막연하게 관념어나 추상어에 의존하여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을 머리를 쥐어짜내 고통스럽게 관념 속에서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을 그대로 옮겨 적고 시라고 하기 쉽다. 자신이 체험하지 않으면 그 생생한 느낌을 시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일 것이다. 그래서 가슴으로 시를 쓰라고 하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가슴과 몸으로 생생하게 느낀 정서 상황을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진술해야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도 대중교통을 타보지 않는 부유층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때 만원전철에서 서로 밀치며 진땀을 흘렸던 체험을 누군가에게서 듣고 피상적으로 기술한다면 공감이 가겠는가하는 말이다. 체험한 사람의 개성대로 만원 전철의 부대낀 상황을 시로 형상화했을 때 이와 유사한 상황으로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의 모습으로, 명절날의 고속버스 정류장이나 해외유명가수의 내한 공연으로 매표소의 수라장 장면으로 비유된다거나. 또는 전철에 올라타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려 곤혹을 치렀던 특수한 체험이야기를 통해 생생한 느낌이 시로 형상화되어 표현되었을 때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대중교통을 한번도 이용하지 않는 재벌집 아들이 친구에게서 듣고 떠벌리는 이야기는 거짓으로 밝혀져 웃음거리가 되는 것처럼 관념 속에서 말장난을 하거나 피상적인 체험을 관념어로 표현하는 시를 쓰면, 자기 혼자만 알아듣지 누가 공감하는 반응을 보이겠는가 말이다. 시는 일기가 아니다. 혼자 쓰고 혼자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정서를 전달하려면 정서 체험상황과 유사한 경험이나 사물을 끌어들여와 누구나 공감이 갈 수 있도록 주관적인 정서를 객관적인 정서로 연극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지은이가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는다.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주례사할 때나 연설할 때 가수가 노래부를 때이다. 시인은 가수가 아니다, 연극의 연출자, 영화의 감독이 되어야지 배우가 되어 직접 연기를 해서는 안 된다.
시인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대를 만들어 그것을 설명하려하지 말고, 그것을 완전히 밖으로 꺼내어 진짜 무대 위에 올려 그 상황을 연출하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흉악범의 범행을 올바르게 판결하기 위해 범행 현장에서 현장검증을 하듯이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호에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이 피상적인 체험을 주관적인 시각으로 머릿속으로 중언부언 진술하는 형식의 시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형상화가 되지 않는 상태의 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 언어의 전달기능에 의존하여 적절한 시어를 선택하지 않고 일상어로 시를 쓰는 분이 많았다. 시는 언어의 전달기능보다는 정서적 기능과 미적 기능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시어를 선택하고 언어를 압축하여 표현되어야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이 장황하게 설명하려 들면, 독자는 아예 그런 시를 전혀 거들어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제는 독자를 유인하는 시제여야 한다. 장황하게 시제가 복잡하거나 관념어로 시제가 붙어있으면 뻔한 소리라고 여기고 독자는 시제만 보고 짐작하여 시를 읽어보지도 않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시제가 붙어있거나 시어로 사용하면 독자는 그런 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얀 눈’, ‘초록 잎’, ‘해가 동쪽에 뜬다.’ 등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왜 사물 앞에 당연한 색깔의 형용사를 넣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상투적인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겨울에 내리는 눈은 하얀 것이 당연하지만 만약 시제가 “검은 눈송이”이나 “해가 서쪽에서 떴다”라는 시제가 붙어있다면, ‘도대체 눈이 검다니 왜 그렇지’, ‘해가 서쪽에서 떴다니 무슨 일이지’ 하고, 독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제는 간결하게 시를 압축하거나 호기심을 끌을 수 있는 상징적인 시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체험 상황을 어떤 이미지로 구체화시킬 것인지 심사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 즉흥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는 시창작 방법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꾸준히 화가가 데생 연습을 하고, 운동선수가 매일 트레이닝을 하듯이 기초적인 이미지 훈련을 날마다 습관적으로 해나가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