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대학 시절 술집 한쪽 모퉁이에 모여 앉으면 고량주에 불을 붙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술에는 물과 불이 섞여 있어. 그것이 바로 음양의 본질이야."라며 자연의 섭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납니다.
음양과 오행!
이 말을 하지 않고 동양을 이야기할 수가 있을까요?
유불선(儒佛仙)의 종교세계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어렵고도 신기한 역(易)과 기문둔갑(奇門遁甲) 흥미로운 사주(四柱)와 관상(觀相) 단전호흡(丹田呼吸) 무속(巫俗)의 신명세계(神明世界) 등등‥. 뿐만 아니라 정치, 의학, 문학, 건축, 미술, 음악 등에 녹아 있는 심오한 사상들‥.
동양의 문화유산들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의해 이루어진 음양오행을 뿌리로 자양되고 길러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이들이 음양오행의 참 뜻을 모르며, 심지어는 오도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습니다.
"비인(非人)이면 부전(不傳)이라."
진리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非人) 전해 주지 않는다(不傳)는 뜻입니다.
이러한 전수 과정의 특수성으로 인해 동양 정신 세계의 심오한 진리는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음양오행의 참진리는 숨어 버리고 신비와 미신의 너울을 쓰고 만 것입니다.
'신비(神秘)'란 내용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밝혀진 후에는 이미 신비가 아닙니다.
'미신(迷信)'이란 미혹된 믿음입니다. 아무리 진실된 뜻도 신비에 가려져 있으면 미신과 야합(野合)합니다. 허무 맹랑한 거짓이 기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비는 벗겨져야 합니다. 미신은 배쳑되어야 합니다.
동양은 깨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음양오행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음양오행의 올바른 이해는 뿌연 안개로 뒤덮인 동양의 바다를 항해하는 데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음양오행을 모르고는 미신과 신비의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은 동양의 세계에 뛰어들어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매던 저희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보고서입니다.
부디 이 글이 열정 가득한 동도(同徒)의 길에 작은 등불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들의 둥근원
동양의 원(圓)인 태극도(太極圖)입니다. 태극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일전에 어느 대학 교수 한 분이 외국에서 개최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연회(宴會)가 베풀어졌을 때, 각국의 학자들은 자연스레 어울려 담소(談笑)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합석한 벽안(碧眼)의 한 학자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은 한국에서 오셨는데 불교와 동양 사상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그 교수는 갑작스런 질문에 난처해져서 "저는 서양 학문을 전공한 사람이라 동양 사상은 잘 모릅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서양 학자는 벌떡 일어나며
"동양인이 동양 사상을 모르고 서양 학문을 하다니! 당신의 학문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다름없소." 라는 말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위에 그려진 태극도는 동양의 원입니다. 우리는 태극도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요?
서양은 물질문명의 반성과 그 해결책으로 동양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다가올 21세기에는 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물질문명을 대통합하여 신문명(新文明)을 창조해야 합니다.
신문명 창조의 주역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정신문화는 바로 우리가 주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기 것도 모르면서 남의 것만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남들과 동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원은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굴리시던 드높은 정신의 굴렁쇠입니다.
그리고 그 원은 오늘이 지닌 물질문명의 폐해를 해결하여 보다 나은 내일의 정신적 바탕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며, 소중한 선조의 유산인 동양의 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은 동양의 원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접근 방법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연의 둥근 원을 걸어가 봅시다.
하나를 알면 만을 안다
그러면 과연 우주(宇宙)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宇)는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를 뜻하고 주(宙)는 고금왕래(古今往來)를 뜻합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면, 우주란 공간과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공간과 시간이 합일(合一)되어 우주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조물주가 베틀에 걸터앉아 시간을 날줄로 하고 공간을 씨줄로 하여 삼라만상의 조화를 짜내고 있는 걸 상상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태로서의 공간과 보이지는 않지만 공간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주를 관찰하는 동양의 기본적인 사유 방법을 일본만수(一本萬殊)라 합니다.
하나로써 만 가지를 유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즉 우주간의 어느 공간이나, 어떤 순간이든 하나의 대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의 자연주의 사유 방법은 연역적으로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닷물의 맛을 알기 위해 바다를 다 마셔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닷가에서 한 모금만 떠먹어 보아도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우주를 바다라고 가정한다면 인간, 들풀, 나무, 돌, 지구, 태양계, 이 모두가 하나의 소우주이며 한 모금의 물과도 같습니다. 특히 인간을 소우주라 하는 것은 천지간에 인간이 가장 대우주의 본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인간 스스로의 아전인수격 해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치에 밝아지고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면 천지간에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한 모금의 바닷물로 바다 전체가 짜다는 것을 알듯이 소우주를 관찰함으로써 대우주 전체의 숨은 뜻을 역추론할 수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단순한 공간은 원운동을 한다
유형(有形)으로 존재하는 공간과는 달리 무형(無形)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관찰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원운동을 하고 있는 본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원자와 행성을 들 수 있습니다.
극히 작은 원자의 구조와 극히 큰 행성간의 구조에서 동일한 원운동이 나타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단순하다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단순함에서 비로소 우주는 자신의 시공적(時空的)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 단순한 공간은 원운동을 통해 스스로 완벽함을 보여 줍니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다
시간과 공간의 고정 관념을 없애기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를 한가지 더 들어봅시다.
옛날 중국 진(晉)나라에 왕질(王質)이라는 사람이 도끼를 가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어떤 두 동자(童子)가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구경하다가 바둑이 다 끝난 뒤 집에 돌아오려고 보니 어느새 도낏자루는 썩어 없어지고 녹슨 도끼만 남아 있더라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를 난가부(爛柯斧)라 하고 지금도 중국에는 난가산(爛柯山)이라는 산이 있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붕괴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현대 과학에서도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광자(光子)를 이용한 간단한 실험을 해 봅시다.
Box 1의 A지점에서 출발한 광자는 B점까지 도달하는 데 1초가 걸렸다고 합시다. Box 2 역시 동일하게 A점을 출발하여 1초만에 B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Box 1은 움직이지 않고, Box 2는 등속으로 운동 중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Box 2의 광자는 A에서 B′까지의 거리를 간 셈이 됩니다.
광속은 일정한데 움직인 거리가 다르다니, 이게 어떻게 된 사실입니까?!
혼란스럽겠지만 이것이 우주의 본모습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밝혀진 이러한 개념들의 이론적 바탕은 음양오행을 통해 우주라는 말뜻 자체를 통해 이미 동양에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얻기 위해 비우자
Only let me make my life simple and straight, like flute of reed for thee to fill with music.
갈대피리처럼 저의 삶을 단순하게 하여 주소서. 비어 있는 피리를 채우듯 그대의 음악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의 '키탄잘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판단 기준을 버린다는 것은 참다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며, 가득 찬 잔은 더 이상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구의 학문체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동양의 학문에 관해서는 거의 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지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의 학문 체계는 동양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동서양은 기본적으로 사물을 추론하는 사유의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서구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 혹은 발상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 하여 기존의 유물론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의 반성을 통해 동양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는 동양을 바라보고 있는 방법론 자체가 기계론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동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양에서는 서양을 볼 수 있습니다.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동양은 북방에 본체(體)로 존재하며 서양은 남방에 쓰임(用)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높이 사며 또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양은 물질 위주의 사고를 완전히 비우지 않고는 동양 학문의 진수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자연계의 완벽한 도형인 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비웁시다. 잔을 비운다는 것 역시 동양의 대표적인 사유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음양의 탄생
자! 먼저 음양이 어디서 왔나, 그리고 어떻게 탄생되는 가를 이야기 해봅시다. 음과 양은 상대적인 두 개의 힘으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음양이 최초로 탄생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소우주(小宇宙)를 통해 대우주의 실상을 엿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이나 신화(神話), 전설 등을 통해 추론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서의 창세기 1장을 잠시 봅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
음양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보입니까?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서 하느님이 천지창조 첫째날 태극(太極)과 음양을 만드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 이번에는 소우주인 언덕을 통해 이 상황을 좀더 상세하게 관찰해 봅시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말의 본뜻은 언덕에 생긴 응달과 양달이라는 말입니다. 응달과 양달이 어떻게 생기나 잘 살펴봅시다.
하루해가 지고 밤이 되면 천지가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편의상, 별빛과 달빛도 없다고 가정합시다.) 이런 상태에서는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아무런 판단이 설 수 없습니다.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없는 것도 아니며 적막(寂寞無朕)한 상태로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무극(無極)이라 합니다.
영원한 변함이 없을 것 같던 어둠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동쪽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순간, 텅 비어 있던 천지가 밝은 햇빛 아래 갑자기 드러나게 됩니다.
태초에 빛이 생겨 밝음과 어둠이 나뉘어지던 상황이 어렴풋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밝음과 어둠은 순간적으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태양이 떠올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언덕입니다. 빛이 비치자마자 언덕에는 양달과 응달이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양달이 먼저다 응달이 먼저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양은 순식간에 함께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큽니다. 음이 있는 곳은 항상 양이 따라가게 됩니다. 거꾸로 양이 있는 곳은 언제나 음이 따라가게 됩니다. 음과 양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빛과 그리고 그림자'입니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말뜻이 좁게는 응달과 양달이지만, 위와 같은 특성 때문에 동양의 자연주의 사유 방법의 기초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이 생길 때 동시에 양이 존재하게 되는 음양의 특성을 '음양(陰陽)의 상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언덕을 주시해 봅시다. 언덕이 빛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 후 응달인 음과 양달인 양이 뚜렷하게 나뉘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각을 한번 바꾸어 언덕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비록 음양의 작용에 의해 밝은 쪽과 어두운 쪽으로 나뉘어졌지만 언덕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양달과 응달의 나뉘어짐과 관계없이 음양이 실현되는 장(場)인 언덕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태극이며 음양은 하나 속에 들어 있는 둘입니다.
이러한 음양(陰陽)의 특성을 '음양(陰陽)의 일원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위의 두 그림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언덕은 응달과 양달이 직선으로 나뉘었는데 태극은 응달과 양달이 곡선으로 나뉘어져 있네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해는 동에서 떠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서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언덕에 비치는 응달과 양달의 비율은 한쪽이 많아지면 다른 한쪽이 적어지고, 또한 반대편이 많아지면 다른 반대편이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음양은 (A)의 도형이 아니고 (B)의 도형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과 양을 나누는 선이 곡선을 이루는 것은 시간이 직선이 아닌 곡선 운동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언덕에 시간의 개념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음양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응달과 양달이 균등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력권의 판도가 달라지고 음양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태양을 동(東)에서 서(西)로 움직이게 하고 태양 빛은 언덕을 비추면서 시간에 따라 응달과 양달의 세력 변화를 일으킵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개입되면서 드디어 음양은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 의해 부여된 음양의 이러한 특성을 '음양의 역동성(力動性)'이라 합니다.
태극도 이면에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곡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음양은 항상 변화가 일어나고 또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쥐와 녹색 식물
1772년경 프리스틀리(Priestley J.)는 식물이 광합성을 할 때 발생하는 기체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위와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림 (A)에서 볼 때 밀폐된 유리집 속에 녹색식물만 두면 죽어버립니다. (B) 역시 생쥐만 두면 죽습니다. (c) 동물과 식물이 함께 있으면 둘 다 삽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실험의 처음 목적은 녹색식물의 광합성 연구에 있었지만 그 결과는 예기치 않았던 자연의 비밀을 보여 줍니다.
즉 (A)에서는 홀로 있는 陰은 살 수 없다. (獨陰不成) (B)에서는 홀로 있는 陽은 살 수 없다. (獨陽不生) (C)에서는 陰과 陽이 만나 조화를 이룬다.
유리집에서 시각을 확대해 봅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 전체를 유리집 속이라고 할 때 모든 생명체는 크게 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식물이고 또 하나는 동물입니다.
지구상에서 식물과 동물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음과 양입니다. 식물은 동물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고 있으며 동물은 식물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
음양(陰陽)이 화합하지 않으면 도(道)의 조화(造化)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결혼이란 꼭 결혼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음양(陰陽)의 화합(和合)이 남녀의 육체적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아이를 낳은 것이 도(道)의 결실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이 책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천지(天地)가 화합하여 인간인 우리를 내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천지의 길(道)을 따라가는 것이 도리(道理)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음양(陰陽)이라는 양대(兩大) 힘이 각인되어 있어서 음양(陰陽)의 화합(和合)을 통하지 않고는 천지의 도(道)에 합일(合一)될 수 없습니다.
남녀라는 음양이 화합(和合)하면 생명을 가진 아이를 탄생시키는 결실을 맺고, 몸과 마음이라는 음양이 화합하면 갈등과 번민을 뿌리친 절대 자아를 완성시키며, 천지가 화합하면 이상(理想)이 현실화되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結婚)을 통하여 다른 한 쪽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대립과 화해를 통해서 가장 훌륭한 삶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승들은 자기 자신과 결혼해 '깨달음'이라는 자식을 낳습니다.
결혼이란 천지의 자식인 우리 인간이 부모를 닮으라는 자연의 엄숙한 가르침입니다.
하늘과 땅이 이루는 짝
동양의 공부란 추상화가 걸려 있는 전람회의 회랑(回廊)을 도는 것과 같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조용히 관조(觀照)해보면 많은 추상화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지혜와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시각을 엄청나게 확대하여 지구 밖에서부터 지구를 관찰하는 공부를 시작해 봅시다. 동양의 공부란 관찰자의 입장을 수시로 바꾸어야 하고 시각 또한 고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작게는 한 방울의 이슬 속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어야 하고 크게는 대우주도 손바닥에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큰 시각에서 바라볼 때 하늘과 땅은 하나의 짝이 됩니다. 서로의 성질은 정반대이며, 하늘을 양이라 하고 땅은 음이라 합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존재합니다. 이 해와 달 역시 좋은 짝이 됩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내어 낮을 밝히고 달은 스스로 빛나지는 않지만 해의 빛을 반사해서 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를 양(陽)이라 하고, 달을 음(陰)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별을 나누어 성(星)과 신(辰)이라 합니다. 황극경세(皇極經世)의 관물편(觀物篇)에서 소강절 선생이 성(星)을 소양(少陽)이라 하고, 신(辰)을 소음(少陰)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해와 달의 선상에서 성신(星辰)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星)은 빛나는 별이고 신(辰)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星)을 양(陽)이라 하고 신(辰)을 음(陰)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양(陽)인 하늘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음에는 땅을 봅시다. 땅에도 역시 해와 같은 존재가 있는데, 바로 불(火)입니다. 불은 스스로 타오르는 능력이 있어 양(陽)에 속합니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 짝이 되는 것이 물[水]입니다. 물과 불은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이 대비되어 상대적인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신[星辰]과 비유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바로 돌[石]과 흙[土]입니다. 물과 불은 쉽게 이해되지만 돌과 흙은 음양으로 잘 유추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빛나는 별[星]이 차츰 빛을 잃어 가다가 나중에는 빛을 내지 못하는 별[辰]이 되듯이, 단단하던 돌[石]이 세월에 깎여 차츰 부드러운 흙[土]으로 부서지게 됩니다. 그래서 단단한 돌[石]은 양이라 하고 부드러운 흙[土]은 음이라 합니다. 이상으로써 음인 땅에는 수화토석(水火土石)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화토석(水火土石)은 소강절 선생께서 확고한 자연관을 바탕으로 추론하신 것입니다. 추상화를 관람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돌아서 버리면 그림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지(天地)가 짝이 되고 일월(日月)이 짝이 되고 성신(星辰)이 짝이 되고 수화(水火)가 짝이 되고 토석(土石)이 짝이 됩니다.
다시 일월성신과 수화토석 역시 짝이 됩니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짝들이 처음 만나서 삼라만상의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천지 바둑에서 첫번째 포석인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원운동
음(陰)과 양(陽)이 만나 짝을 이루는 우주의 기본 이치는 그 이면에 큰 뜻을 숨기고 있습니다. 즉 마주 보던 짝이 합일(合一)되면서 비로소 그들의 일생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삶과 죽음의 순환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뚜렷한 짝의 구분은 유성생식(有性生殖)을 하는 생물에서 볼 수 있는데 고등해질수록 더욱 확연해집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이면서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하는 박테리아(bacteria)를 통해 짝의 개념을 더욱 소상히 밝혀 봅시다. 박테리아는 자연계에서 토양, 천연수, 공기, 식물과 동물의 표면 등 거의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박테리아는 가장 원시적인 단세포 생물인데 오직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대단히 작은 생물입니다. 그 크기는 약 1~10미크론 입니다. 실제로 이놈은 생물과 무생물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데 종류에 따라 산소 없이도 살 수 있고 끓는 물 속, 영하의 추위에서도 무한정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이놈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바로 짝이 없이(암수의 구별이 없이) 영원히 살아간다*는 겁니다.
(*생명체(生命體)는 다른 힘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의 명(命)이 다하면 죽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박테리아는 다른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命이 없습니다. 생체(生體)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라도 생명체(生命體)는 아닙니다.)
후손을 만드는 작업이 없고 단순히 자기 몸을 둘로 쪼개서 두 개의 박테리아로 늘어납니다. 약 10~20분이면 둘로 나뉜 박테리아는 먹이를 먹고 적절히 자라나 또다시 분열해서 4개로 늘어납니다.
이들에게 짝이란 개념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죽음이라는 개념 역시 통하지 않습니다.
박테리아를 죽이는 바이러스나 백혈구 혹은 항생제가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이중 분열을 하거나 멈춘 상태에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 부럽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박테리아는 영원히 살아 있다는 표현보다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영원히 살아 있음은 영원히 죽어 있음과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삶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테리아를 보는 관점에 따라 무생물로 볼 수도 있는 겁니다.
반면에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무생물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박테리아 같은 것을 양(陽)이라 한다면 영원히 죽어 있는 무생물 같은 것은 음(陰)이라고 합니다.
여러 박테리아 중 조금 더 진화되어 짝이 있는 놈을 살펴봅시다. 에스케리키아 콜리(Escherichia Coli)는 대장균의 일종인 박테리아입니다. 이놈들은 형태상 보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길쭉한 놈, 둥글둥글한 놈으로 구별됩니다.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길쭉하게 생긴 수컷 대장균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암컷 대장균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곤 짧은 관을 암컷 대장균의 세포벽에 밀어 넣고 유전 물질을 투입합니다. 그 결과 암컷은 소위 말하는 자식 박테리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짝을 이루는 가장 원시적 모습으로 비로소 암컷과 수컷이 나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몸의 일부만 떼어 내 새로운 자식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 수컷과 암컷의 대장균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합쳐서 자식 대장균에게 물려준다는 사실입니다. 자연히 자식 대장균은 부모에 비해 보다 더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몸의 일부만 떼어 내었던 암수 대장균은 그 대가로 늙어서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性)을 통해 짝이 생기면서 다음 세대의 진화를 이루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법 상태의 불멸은 상실했지만 다음 대에 보다 우수한 형질을 선택적으로 물려줌으로써 후대(後代)가 보다 진화되고 독특한 개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동식물들은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해 짝이 있는 것이며 보다 나은 다음의 세대를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짝이 있음으로 삶과 죽음이 반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생물과 무성생식의 단계에서는 영원히 죽어 있거나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로 직선 운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짝이 있는 생명체로 진화함으로써 비로소 삶과 죽음의 원운동이 완성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대의 삶이 끝나는 것을 죽었다는 표현보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보편적으로 씁니다.
죽음이란, 한없는 직선의 길을 걷다가 그 길의 끝에 벼랑이 있어 떨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삶이 시작되었던 어떤 점에서 출발하여 둥근 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그 점으로 돌아간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즉 짝이 생기면서 죽음이 시작됐지만 그 죽음은 삶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삶이 죽음을 돕고 죽음이 삶을 돕는 태극 속의 죽음인 것입니다.
태극도를 잘 보십시오. 살아 있음은 완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까? 죽은 것은 완전히 죽은 것입니까?
몸과 맘
사람을 하나의 언덕이라고 한다면 응달과 양달은 무엇일까요?
바로 몸과 맘(마음)입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합쳐져서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표면(表面)에 몸을 두고, 그 이면(裏面)에 맘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맘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몸과 맘이 음양으로 존재하며,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과 맘이 두 개로 나뉘게 되면 '죽었다'고 합니다.
짝이 있는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가 음양으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의 개체 입장에서 볼 때도 역시 음(陰)과 양(陽)이 합쳐져서 그 개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의 개체는 언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몸과 맘은 언덕의 응달과 양달입니다.
즉, 개개의 사람은 현상계에 태극(太極)으로 존재하며 몸과 마음을 음과 양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따뜻한 남자 차가운 여자
하나 속에 정반대 되는 음과 양의 성질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개체의 형태나 성질은 반대되는 두 힘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통해 보다 쉽고 다양한 모습의 '하나 속의 음과 양'을 알아봅시다.
조개의 껍데기는 딱딱합니다. 조개의 껍데기가 딱딱하다는 것은 그 속이 부드럽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조개나 소라의 껍데기가 단단한 것은 그 속에 부드러운 알맹이를 숨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조개처럼 단단한 껍데기를 가지고 있는 소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라를 먹을 때 입에 씹히는 부드러운 맛을 기억하시겠지요?
여름에 먹는 참외와 수박도 생각해 보세요. 참외와 수박을 만져 보면 단단합니다. 그러면 그 속이 부드러운 것은 당연하겠지요.
자라나 거북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등과 배는 너무나 단단해서 마치 돌과도 같습니다.
그 정도로 단단한 껍데기에 싸여 있는 자라와 거북의 몸통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알 수 있겠습니까? 딱딱함과 부드러움(剛柔)은 서로 반대되는 성질로서 하나의 개체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이 딱딱하면 속이 부드러운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겉이 부드러우면 속이 딱딱한 것 역시 동일한 원리입니다. 자두나 복숭아 등을 생각해 보세요.
겉이 부드러운 만큼 속에는 딱딱함을 감추고 있습니다.
또한, 물고기를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물고기의 겉은 조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만큼 속에는 딱딱함을 감추고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물고기의 몸 속에는 날카롭고 딱딱한 뼈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 속에 공존하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이치를 인체에도 적용해 봅시다. 동양의 이치는 만능열쇠(master key)와도 같아 어디에든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체의 상부에서부터 하부로 관찰해 봅시다. 먼저 머리는 바깥에 단단한 두개골로 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부드러운 뇌가 들어 있습니다. 외강내유(外剛內柔)한 모습입니다.
눈, 코, 귀, 입이 있는 얼굴 부분은 대체로 겉에 부드러운 조직과 기관이 있으며 속에 뼈가 들어 있습니다. 내강외유(內剛外柔)한 모습입니다.
목을 경계로 하여 목의 위쪽은 얼굴과 머리가 음과 양이 되어 맞물려 있습니다. 또한 얼굴과 머리 각각은 겉과 속이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목 아래의 몸통을 봅시다. 가슴은 바깥에 단단한 갈비뼈로 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부드러운 허파 등이 들어 있습니다. 외강내유한 모습입니다. 더 밑의 복부와 골반까지는 속에 단단한 척추와 골반뼈를 숨기고 바깥은 부드럽습니다. 내강외유한 모습입니다.
목의 아래는 가슴과 배가 음양이 되어 맞물려 있습니다. 또한 가슴과 배 각각은 겉과 속이 딱딱함과 부드러움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 가슴, 배의 부위는 놀라운 강유(剛柔)의 짝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인체를 통째로 관찰해 봅시다. 하늘로 올라갈수록 바깥에 뼈가 있어 겉이 딱딱하고 속이 부드러우며, 땅으로 내려갈수록 속에 뼈가 있어 속이 딱딱하고 겉이 부드럽습니다.
인체에 있어 양(陽)인 상부(上部)는 외강내유하며 음(陰)인 하부(下部)는 내강외유합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하나 속에 맞물려 있는 것은 형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물의 성질을 통해 강유(剛柔)를 살펴봅시다. 이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토록 부드러운 물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본성을 숨기고 있다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것도 딱딱하게 되지 못합니다.
쉽게 들 수 있는 예가 바로 콘크리트(Concrete)입니다. 시멘트는 물을 만나지 못하면 가루일 뿐입니다. 물이 시멘트를 결집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딱딱한 콘크리트가 되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만물을 하나로 붙이는 것은 물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부드러운 물 속에 숨은 본성이 딱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수(水)를 북방(北方)에 배속하고 천지의 기운이 하나로 응결된 모습으로 추상(抽象)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도 이와 같습니다. 여자는 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여자의 이면에는 강인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강해 보이는 남자의 이면에 한없이 약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근육질의 운동선수 마음이 더 연약하고 순진한 것이며, 사교성 좋으며 유들유들한 사람의 속마음이 더 독합니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여자의 속마음이 활화산같이 타오를 수 있으며, 항상 친절한 여자의 속마음이 의외로 냉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겉이 부드러우면 속이 딱딱하고, 속이 부드러우면 겉이 딱딱합니다.
강유(剛柔)는 하나 속의 음과 양이 되어 태극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심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일까요?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은 비유로만 가능합니다. 가령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몹시 무더운 날씨입니다. 당신의 몸이 더운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덥다고 느낀 것이 당신의 '마음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피부와 살의 신경이 받아들이고 뇌에 전달한 것을 인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당신이 덥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동시에) 시원해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당신은 부채나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실 것입니다.
지금 3단계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 1단계 덥다 → 온도를 체표가 감지 → 더운 것을 인식한다. (상황발생)
* 2단계 시원해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상황을 역전시키려는 의지)
* 3단계 부채, 선풍기, 에어컨 등을 통해 시원하게 만든다. (상황을 역전시킨다.)
2단계를 주시하십시오. 마음은 항상 인식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순간의 반발력에 의해 일어납니다.
또 다른 예로써 도둑질을 한다고 합시다.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훔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모른다면 마음(良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둑질을 하면 '나쁘다'는 반대의 힘이 생기는 순간 마음은 불쑥 나타납니다.
이 때 반대의 힘이 이기면 도둑질을 안 할 것이고, 그래도 괜찮다는 힘이 이기면 도둑질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어떤 상황이 일어나서 인식될 때 그 상황을 해결하려는 반대의 힘이 팽팽하게 작용할 때 일어납니다.
즉 없었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음양(陰陽)의 두 힘이 반대로 작용할 때입니다.
사실 마음이란 없습니다.
마음은 아무 형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단지 음양(陰陽)의 두 힘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할 때 그 줄의 무게중심이 바로 당신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두 힘이 대립될 때 뜬구름처럼 일어납니다.
마음이란 형체도 실체도 없지만 내가 어딘가로 기울 때 그 기우는 것을 잡아서 똑바로 세워 주려는 중심 자리 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혹은 갈등이 일어날 때는 중심(中心)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에는 중심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중심을 마음이라고 하며 동양은 이 마음을 중앙의 태극(中央之太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형체 없는 마음이 인체의 한 장기(臟器)에 거(居)한다고 할 때 물질적 실체로서 추상(抽象)될 수 있는 것이 심장입니다. 심장은 그 형태가 태극을 상징하는 콩과 같은 모습이고 음양이 공존하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심장이 인체의 정중앙에 있지 않고 왼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갈등하게 되고, 치우친 사심(私心)의 함정에 빠져 허덕이는지도 모릅니다.
여름에는 삼계탕 겨울에는 냉면
여름을 지내는 데 대표적인 음식이 삼계탕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왜 그 더운 날에 뜨거운 삼계탕을 먹는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식문화(食文化)에는 우리 선조의 지혜가 비밀스럽게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 비밀은, 여름이 되어 날씨가 더워지면 몸의 표면(表面)은 뜨거워지거나, 몸의 이면(裏面)은 차가워진다는 이치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뜨겁다, 차다는 뜻은 실제 온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의학적인 한열(寒熱)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한여름에 날씨가 더워지면, 성질이 몹시 뜨거운 닭고기, 인삼, 대추 등을 함께 달여서 차가워진 속을 데우는 것입니다. 여름에 시원한 팥빙수나 성질이 찬 과일을 먹으면 쉽게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몸의 외부가 더워지면 자동적으로 몸의 내부가 차가워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여름에 즐기는 냉면은 본래 겨울 음식이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께서 한겨울에 얼음이 둥둥 뜨는 동치미 국물에 성질이 찬 메밀국수를 말아 드신 것은, 겨울에 뜨거워진 속을 식히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음식도 자연의 이치를 바탕으로 드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여름에 즐기는 냉면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가움과 뜨거움이 인체에 공존하는 원리는 지구라는 생명체에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북반구에 여름이 오면 남반구는 추운 겨울이 됩니다.
반대로 북반구에 겨울이 오면 남반구는 뜨거운 여름이 됩니다. 이런 사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공전에 의한 영향입니다.
또한 이러한 공전의 영향에 관계없이 지구 자체로서도 한열(寒熱)이 맞물려 있습니다.
지표면은 차게 굳어 있지만 속으로 들어갈수록 뜨거워지고 중심핵(core)에 다다르면 엄청난 고온으로 인해 액체상을 띄고 있습니다.
지구도 하나 속에 차가움과 뜨거움이라는 두 개의 힘이 공존하는 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보다 다양한 예를 들어 응용해 볼까요? 주인과 손님을 찾아보세요.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추위와 더위 위와 아래 선과 악 나아감과 물러섬 물과 불 정신과 육체 진보와 보수 시간과 공간 연역과 귀납 과거와 미래 색과 공 팽창과 수축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nb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