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시제중의 정신으로 저를 대해주시는 좋은 스승 덕에 봉황단총을 처음 맛보게 된 관련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차 중에 이름이 멋드러진다고 생각한 것이 봉황단총입니다. 이름에 무려 봉황이 들어가있지요. 왜 주작단총이라고 안했을까 잠시 궁금했습니다. 이름의 유래를 알기 전에 제가 상상한 봉황단총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한 낙서입니다. 보암직스러운 차나무 위에서 봉황이 꽥꽥거리며 푸드덕거리느라 떨어지는 찻잎을 사람들이 소중히 담아 모으는 모습입니다. 봉황이 떨어뜨린 찻잎으로 만들었음직한 대단한 차다 뭐 그런 상상을 한 것이지요.
허나 봉황산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으로 약간 김이 샜습니다.
[찻잎 관찰]
조명때문이지 사진보다는 훨씬 초록을 품고 있습니다. 초록만 있지 않고 약간의 부드러운 황색도 담겨있습니다. 찻잎은 고수차에 비해 두께가 얇으며 줄기도 거의 없었습니다. 쳇지피티 말로는 줄기가 거의 없으면 선별된 중상품의 좋은 차라 합니다. 찾아보지 않고 먼저 마셔볼걸 잠시 후회했습니다. 확증편향이 생기면 이 차는 고급이다, 맛있어야만 한다 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투차량은 6~7g정도, 물은 개완과 자사호 크기에 맞춰 각각 150cc씩 넣었습니다.
잎과 차의 향기를 코로 들이마시며 어디서 맡은 향과 비슷한지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복숭아아이스티? 했으나 아이스티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직선적인 단맛입니다.
분명 어디서 맡아본 향이다 싶을 때 떠올랐습니다. 저희 동네에 형제과수원이라는 과일가게가 있는데(형제는 안보이고 아줌마가 운영) 그 곳을 지나갈 때 이런 향이 났었습니다. 형제과수원에서 늘 맡을 수 있는 향은 아닙니다. 참외철, 딸기철이 있듯 특정 기간에 매대가 복숭아로 수북히 쌓여있을 때 나는 은은한 향이었습니다. 복숭아 중에 백도입니다.
프루스트가 마들렌 냄새를 맡고 그 지난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면 저는 차의 향을 맡고 기억 속에서 채택하는 쪽이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족이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책 초반 마들렌 이야기만 유명한 것이 그 방증이겠지요. 저 역시 1권만 사서 읽어보았는데 결과적으로 1권만 사길 잘 한 짓이었습니다.
다시 봉황단총으로 돌아와서, 과일향 중에 백도나 살구쪽의 소위 핵과류라 불리는 것들의 향이 납니다. 진하게 우리면 약간의 떫음도 희미하게 올라오는데 이것도 백도를 베어물었을 때 안의 씨앗이 깨져 입 안에 들어와 느껴지는 떫음과 닮았습니다.
지난 번 백차에서 느꼈던 난향이란 것이 따사로운 느낌이었다면 이것은 왜인지 여름날의 과수원이 떠올랐습니다. 풋풋하고 기분 좋은 향입니다. 과수원에서 같이 팔면 잘 팔릴 것 같습니다.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 남편은 맛을 설명해주자 질색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매 탕마다 단 맛은 점점 희미해갈 지언정 그 향은 지속됩니다. 1탕과 7탕의 색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탕색 변화]
찻잎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물 안에서 일렁이는 찻잎은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필리아 배경이야기처럼 청승이 느껴지는 맛은 절대 아닙니다.
개완과 자사호의 차이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5탕부터인가 약간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어떻게든 차이를 느껴보고 싶어서 나름 집중해가며 맛을 보았지요.
자사호가 복숭아씨앗 떫음을 좀 더 잡아주는 듯 합니다. 목젖 근방의 혀가 약간 조이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이건 쓴 맛이 아니라 미세한 떫음이었습니다. '나도 드디어 차이를 느꼈군!!!' 하며 자사호의 미세한 구멍에 탄닌들이 신나게 들러붙는 상상을 했습니다.
봉황단총까지 마시며 또 하나 느낀 것이 있습니다. 세차 후 첫 차보다 두번째 혹은 세번째부터 맛과 향이 차오른다는 점입니다.
어딘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차의 거품은 아이가 깨어날 때 징징거림과 닮았으며 첫탕은 아직은 덜 깬 아이의 모습입니다. 두번째, 세번째 탕부터는 온전히 잠에서 깨어나 재잘거리며 생명력을 뽐내는 것이 어린아이와 닮았습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고 보는 편인데 차 덕에 사고 자체가 확장되는 듯 합니다. 후각이라 생각한 향의 개념을 입으로도 느끼게 되어 그 표현을 언어로 포착하고싶기 때문입니다.
이 차나무는 어떻게 생기고 몇 살일까, 차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윤택한 생활을 할까, 다기 만든 사람은 애써 만든 것을 팔기 아깝게 여기지 않을까, 차 이름은 누가 명명하는가 등이 궁금해지니 차 문화라는 것은 차가 주인공으로 보이지만 그 저변의 매개체 같습니다. 차와 관련된 수많은 직업들, 표현 언어, 도공 등의 관련 기술, 문학이나 회화에 이르기까지 말이지요.
저는 아직 매번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차와 같이 논다는 기분이 든달까요.
개완뚜껑과 잎, 찻잔에 코를 박고 향 설명을 할 때 가족들은 '미안하지만 네가 뭔 말을 하는지 당췌 이해를 못하겠어' 라는 반응이라 같이 즐기지 못한다는 것에 조금은 실망스럽지만 취향이나 기호를 강요할 수는 없지요. 그들은 오늘도 보이차 차고를 마시며 나름대로 매우 흡족해했습니다.
첫 세차를 할 때 이는 거품과 거름망에 걸리는 차 부스러기도 신기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자사호에 따뜻한 물을 끼얹었을 때 금새 물기가 사라지는 것 하며 니료의 입자들이 물을 머금었을 때 미세하게 반짝이는 색감과 질감을 통해 눈으로도 호사를 하는 기분입니다.
자사호 양호라는 것도 찾아보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글에 따르면 하나의 자사호에 계속 같은 차를 우리며 찻물로만 씻어 말리면 맹물을 부어도 그 향이 난다고 하더군요.
왠지 설거지 안한 스파게티 접시에 소면을 얹고는 '이거봐, 스파게티 맛이 느껴지지? 이 접시는 일품 자기인게야'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건 그저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봉황단총 향이 절로 나는 주전자라면 마다할 이유 없겠지만 그래도 늘 새로운 기분으로 자, 다시 나랑 놀아볼래? 하는 주전자가 저는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은 건 이제는 제법 개완을 잘 다루게 되었다는 점이랍니다.
저에게 차는 새로 사귄 좋은 친구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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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얼베이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8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봉황단총은 향의 세그먼트가 분명한 듯 하여 재미를 느꼈습니다. 마치 개성이 희석되지 않도록 따로 모여있는 정예부대같군요. 덕분에 공부되었습니다. 이쯤에서 또 궁금해지는 것이 유전적 다양성이 낮을수록 병충해나 환경에는 취약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실 수 있을 때 맘껏 즐겨야겠네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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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咖 啡 郎 작성시간 26.06.08 푸얼베이비 우려하시는 취약성은 그보다는 조금 더 유전적으로 상위 레벨에서 결정됩니다. 즉, 단총을 타겟으로 하는 병충해가 생길 때는 밀란향 행인향 압시향 구분없이 초상집이 됩니다. 대신 아주 세세한 아종 단위까지 컨트롤되면, 단총이나 에티오피아의 몇몇 마이크로랏처럼 컴플렉시티를 희생해서 유니티를 끌어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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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얼베이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8 咖 啡 郎 유니티 분류의 커피를 접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선명한 수박 향이 나더군요. 커피도 차도 안정되고 균일한 질을 확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몇 년간의 인고가 있었을지 관련 농업기술 및 종사자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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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咖 啡 郎 작성시간 26.06.08 푸얼베이비 앗!
만약 수박향의 커피 원산지가 남미쪽이라면, 그건 선별된 아종에 의해 발현된 것이 아니라 가향 프로세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커피 아로마 휠에서 수박이 존재하지는 않거든요. -
답댓글 작성자푸얼베이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8 咖 啡 郎 오!!! 덕분에 하나 더 배웠습니다. 알고 접하는 것과 모르고 접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