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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에서 대를 가지고 신을 내리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작성자산지기|작성시간07.12.27|조회수85 목록 댓글 0

굿을 할 때 '대'를 잡는다. 특히 중부 무속에서는 성주거리에서 '성줏대'를 잡는다. 성주대라는 것은 소나무 가지를 말하는데 원래 대라는 것은 대나무를 의미했던 것 같으나 이것이 반드시 대나무가 아니라도 가능했던 것 같다. 소나무 가지에 흰 백지를 묶어 굿청에 놓아 두었다가 성주거리에서 대를 잡는다. 대를 잡는 사람은 보통 그 굿을 의뢰한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가 내리는 사람이 잡는다.

'대가 내린다'는 것은 대를 잡은 사람이 대의 동작에 대해 자기 의사가 아니고 대가 하는 대로 따르는 상태를 말한다. 대가 춤을 추면 춤추게 되고, 대가 뛰면 뛰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때로는 대가 강물로 들어가는 위험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처음에 대를 쌀그릇에 세워 잡고 있으면 무당이 옆에서 제금을 울리면서 축원한다. '어서 설설히 내리십시오'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하면서 축원한다. 빨리 내리는 사람은 몇 분 후에 내리지만 오래 걸리는 사람은 몇십 분씩 걸린다. 전혀 내리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대신 잡기도 한다. 처음에는 축원에 따라 소나무 가지가 조금씩 움직이고, 드디어는 심하게 흔들리다가 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자유자재로 다닌다. 방이나 부엌을 다니면서 이상한 곳을 가리키며 심지어는 사람을 때리기도 한다. 그러면 신이 노한 것이라 하여 굿 의뢰자들은 용서를 빌게 된다. 대를 잡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흥분된 상태로 대를 쥐고 움직일 뿐이다.
필자는 대를 잡은 사람(대잡이)이 대를 쥔 채 철도에 서 있는 위험한 상태도 목격한 적이 있다. 마지막에는 대를 잡은 사람이 굿당으로 돌아와서 춤을 추고 난 다음에 다시 무당이 축원으로 처음 내렸던 '성주반'(쌀)에 대를 놓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러면 비로소 한숨을 쉬고 정신을 회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를 내리는 장면을 보면 거의 최면술에 가까운 행위이다. 우선 무당이 최면을 거는 유도를 계속하여 대 잡은 사람의 최면상태를 재촉하는 것이다. 우선 대를 잡은 사람은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최면에 걸리기 쉬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전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최면이 불가능한 사람일 것이다. 점점 격한 음성과 제금을 연주하여 대잡이로 하여금 심한 심리적 자극을 받게 한다. 그리고 대를 잡은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과정이 있고 그렇게 하는 유형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으로 유발되는 것 같다. 대를 내린 사람은 최면상태에서 행동하게 된다. 격한 춤을 추고 기분을 푼다음에 무당의 유도에 따라 다시 평상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이와 같은 최면적인 상태가 무속신앙에서는 일찍부터 신앙적으로 많이 이용 되었던 것 같다.
필자는 어는 여대생이 춤을 추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여대생은 어머니가 굿을 하는 것에 대해 미신이라고 여겨 언제나 불만을 품고 굿을 반대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의 고집에 의해 굿이 있었다. 이때 무당이 여대생에게 무감을 설 것을 권유했다. 여대생은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어머니의 흉내만 잠깐 내라는 강한 권유에 따라 신복을 입고 무녀가 치는 장단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무녀는 계속 세게 강한 무악을 우리고 괴성을 질렀다. 드디어 여학생은 갑자기 심한 도무를 하였다. 무당들이나 가족들이 정말 신이 내렸다고 하며 무악이 빨라지자 가족들은 절을 하였다. 여대생은 그칠 줄 모르고 장단에 딸라 거센 도무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신이 슬퍼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한 가족들은 같이 울면서 빌었다. 한동안 기운이 다하도록 춤을 춘 여대생은 차츰 기운을 잃는 듯하더니 장단이 약해지면서 주저 앉았다. 그녀는 계속 울었다. 나중에 자기정신으로 완전히 돌아왔다고 싶을 때 가족들이 정말 신이 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모두 사기이며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가족들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런 것을 경험한 여대생은 이것이 최면술과 마찬가지 상태라고 필자에게 고백하였다. 의식은 있으면서도 장단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실증적으로 최면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대학에서 경험한 최면술과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최면술이 과거에는 신의 의미로 신앙시되고 설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날 필자의 연구실에 한 대학생이 찾아 왔다. 이 학생은 필자에게 자기가 무당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고백하였다. 수험공부를 힘들게 마치고 대학에 들어왔으나 학업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고 잡념이 많아서 심리적 고충을 받다가 급기야 점을 치니 무당이 되는 중이었다고 한다. 이를 부정하면서도 자기의 심리나 꿈 같은 과정을 살펴보니 정말 무당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이것은 자기가 미신을 믿는 의식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과학적이라 한 것은 과학이 아니고 과학적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필자의 견해를 듣고, 자신의 체험이 반드시 무속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후 그의 소식은 알 수 없었으나, 아마 그는 무당이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무당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실제 신에 의한 사실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신앙에 의해 무당이 될 수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당이 되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고 실제 무당의 점이 맞는다는 이야기는 사실 무속신앙을 어느 정도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기반은 신앙이다.
무속은 이 신앙적 요인을 최면적 현상으로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신앙에서 최면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종교로서 당연한 것이며, 무속신앙이 사기라고는 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대를 내리는 사람이 무당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점에서 매우 신앙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무녀는 대잡이의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사실은 최면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무당이나 일반인이 이를 최면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신에 의한 것이라는 데 무속신앙의 기초가 있다. 무병이나 모든 의례는 신의 작용이라는 전제하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반을 무시하면 무속신앙은 존재 할 수 없다. 이를 최면술이라고 밝힘으로써 무속이 미신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고등한 기성 종교는 아니라 하여도 그것들과 다른 형태로서 또하나의 종교지 미신은 아니다.
그런데 대를 가지고 신을 내리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서낭당에는 서낭목이라는 신목이 있고 이것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 신목의 경우는 일정한 장소를 지목하여 신의 임배하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나무를 베거나 접근하는 것을 금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에 있는 나무에게로 가서 신에게 비는 것이다. 나무는 옮길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하고 이곳에 인간이 찾아가서 비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산이나 바위와 함께 장소를 상징하는 신목을 찾아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 나무로부터 신을 옮겨 모셔오는 경우가 있다. 동해안 무속에서 서낭신을 나뭇가지에 올려다가 굿당 앞에 세워두고 부락제를 지내는 것이 그 예이다. 즉 신목을 옮김으로써 신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사고구조이다. 대를 내리는 것은 이보다 훨씬 이동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을 옮겨 오는 것이 아니고 나뭇가지를 마련하여 신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자유럽게 부르고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은 무속에서 가능하다. 무당은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신능 ㄹ불러서 즐겁게 해드리고 모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동성은 우리 민족이 이동성과 관련이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민족은 농경민족이고 이동을 자라 하지 않는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일본인에 비하면, 우리는 이동하는 경향이 많다고 느낀다. 사실 우리가 농경을 하기 때문에 정착성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무속신앙 면게서 볼 때엔 이동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 집은 이동하지 않는 것 같으나, 사실 사람들 자체는 이동성이 매우 강하다. 도시 생활에서는 더욱 쉽게 이동할 뿐만 아니라 이사에 대해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세를 들어도 오래산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않는다. 이런 것은 아주 당연하다고 할 수 있어도, 그런 태도에는 무속적 사고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새로이 이사간 곳에 대를 내릴 수 있고, 안택할 수 있다는 사고가 바로 우리들 머리 속에 은근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고구조는 북방민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간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가는 곳에다 새로이 신간을 세운다는 생각이다. 몽고에는 '오보'라는 신간이 있다. 우리에게도 '솟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유목민족적 이동성을 전제로 한 신앙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에 대한 신앙은 비슷해도 그것을 이동성으로 보느냐, 아니야는 것은 민족에 따라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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