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그러고 보면 재즈는 그 자체가 불운의 음악인지도 모르겠다. 재즈가 만들어낸 객관적인 음악적 성취에 비해서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운이 사실 재즈만의 것은 결코 아니다. 본문에도 썼다시피 음악은 인류의 역사속에서 진지한 감상의 대상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인류사에 업적을 남긴 음악가들이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대 혹은 생전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18∼19세기의 음악 거장들에 비하면 대중매체가 존재하는 20세기에 살면시 영예를 얻었을 수 있었던 암스트롱, 엘링턴, 베이시, 파커의 생애는 다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 전체를 놓고 보면 재즈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안락함, 휴식, 즐거움을 위해 봉사하기에 재즈는 너무나도 과도한 음악적 내용들로 가득 차 있고, 따라서 이 음악은 늘 뒷전으로 밀려있다. 21세기 서울에서 재즈의 위치는 19세기 초 빈에서의 베토벤의 위치와 매우 흡사하다. 빈의 시민계급이 모두 베토벤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의 음악은 듣지 않았듯이 지금의 사람들은 모두 재즈를 이야기하고 재즈 페스티벌에서 휴식을 즐기지만 정작 재즈를 감상하지는 않는다.
재즈가 안고 있는 더 큰 문제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이 대중들의 외면 속에서도 18세기 귀족과 19세기 부르주아의 문화 안에, 다시 말해 문화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반면 재즈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재즈는 미국의 소수 인종 안에서 태어났고 거대했던 20세기 주류 음악 산업의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불운했지만 문화의 중심부에 속해 있었던 18∼19세기 거장들의 음악은 세월이 흐르면서 인류의 보편적인 교양이 될 수 있었던 반면, 암스트롱, 엘링턴, 베이시, 파커의 음악이 그와 유사한 위치에 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열렬한 재즈 팬이었던 역사학자 에릭 흡스봄은 재즈가 그 위치에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재즈를 더욱 응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예술은 늘 지배 계급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재즈는 기막힌 역사적 반전이었다. 대부분의 예술이란 풍부한 물적 토대,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후원 없이 유럽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성립할 수 없었고, 대량 소비와 그에 따른 이윤 없이 20세기 팝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재즈는 그 틈바구니에서 그리 풍성하지 않은 물적 기반을 토대로 지금의 성과를 이루었다. 그 성과를 만듦에 있어서 수많은 인생이 가난과 차별, 술과 약물로 자신들의 삶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지만 그럴수록 이 음악이 남긴 보석 같은 작품들은 더욱 엉롱하게 빛을 발한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 유머와 여유, 그리고 위엄은 고상한 예술이라면 죄다 섭렵하고 살아왔다는 현재의 우리에게 씨익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검은 피부의 우리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어. 최고급 악기도 갖고 있지 않지. 우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연주하는 유랑 악단이야. 그런데 들어봐. 이 장돌뱅이들이 만든 음악을. 우리가 만든 음악이 이 정도야. 그런데 고상한 여러분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건가요?”
- <다락방 재즈> (저자: 황덕호)에서 발췌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