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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토론방

[스크랩] 4. 관산성 전투와 탄현 마. 성왕은 왜 구천에 왔는가

작성자아람|작성시간19.07.11|조회수514 목록 댓글 0



  마. 성왕은 왜 구천에 왔는가


    (1) 성왕은 왜 구천에 왔는가.
    일본서기에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는 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주101)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주102)  


   일본서기에 성왕은 여창이 전쟁의 피로를 위로하기 위해 구천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신라습격을 위해 50명의 병력으로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단지, 여창의 위로를 위해 밤에까지 무리해 가면서 구천을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 같고, 50명의 병력으로 왕이 신라를 습격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일본서기 의하면 백제여창이 돌아가신 성왕을 받들기 위해 출가하여 수도를 하고자 했다. 주103) 라고 기록은 성왕이 구천까지 오게 된 원인이 여창에게 있다고 추정을 하게 합니다.


   관산성 전투는 여창이 주도는 했으나, 이는 백제의 전쟁 즉, 성왕의 전쟁으로 전쟁 전에 성왕과 여창이 큰 틀의 작전 계획을 했을 것입니다. 공격목표가 한강유역과 경주와 연결되는 상주나 신라의 도성 경주라면, 신라가 전쟁 준비가 되기 전, 속전속결로 최소한 상주쪽 백두대간의 고개 정상을 확보해야  다음 전투가 유리해지는데, 삼국사기 의하면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여창과 싸워 불리는 했지만 신주 군주 김무력의 참여로 방어선이 뚫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면 여창이 구축한 구타모라 성채는 속전속결로 공격하는 작전을 일시 멈추고 진영을 정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고, 구타모라 성채의 위치가 백두대간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어 성왕과 같이 계획한 큰 틀의 작전이 수정되었다고 받아드려집니다.


   성왕은 여창의 작전변경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직접 현장에 와서 확인하기 위하여 호위병 수준의 병력 및 보좌진(좌평 4명)과 급히 야간에 구천을 지나다가 신라군에게 납치내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관산성 전투의 중심에 있지 않아 작전에 대해 모르는 왜군이나 일반 백제군에게는 여창을 포함한 백제군을 위문하기 위해 성왕이 왔다고 말할 수도,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구천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성왕이 구천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천(狗川)의 위치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주104)


    첫번째는,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고도는 협곡인 구진벼루로 비정하는 견해로 구진(狗津)벼루는 개구자에 건널진자이고, 벼루는 벼랑이라는 뜻이다.
    백제의 왕도 공주를 웅진, 웅천이라 불렀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1년 겨울 10월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冬十月 移都於熊津)라 하고, 삼국유사 권2 기이 남부여/전백제 문주왕 직위년에 웅천(熊川)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熊川[今公州])로 기록되어 있어 공주=웅진=웅천이 같은 곳을 의미하고, 내와 나루를 혼용하여 쓴 경우가 있어, 웅진(熊津)을 웅천(熊川)이라 하였듯이 여기서도 구진(狗津)을 구천(狗川)이라 할 수 있다고 하여 구천이라 하였으나 지형 상 여기서 성왕이 죽었다는 것과 연관 짓기가 어려워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주105)


    두번째는 구천을 군북면 이백리의 갯골(식장산 자랏)로 보는 견해 주106) 로  이는 전설을 기초로 고리산에 여창이 주둔을 하였고, 신라군이 고리산 황골(승지골)로 여창을 공격을 하는데 성왕이 이 것을 보고 배후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성왕과 여창이 같이 있을 수 없어 할매산성으로 이동 중 갯골에 이르렀을 때 신라의 비장 도도에 기습을 받아 죽었다는 내용의 전설로 갯골이 성왕이 죽은 구천이라 하는 견해입니다.


    구진벼루를 구천으로 보는 견해와 전설에 의한 갯골을 구천이라 하는 견해는 성왕이 죽은 구천이라는 지명을 설명하기에 명쾌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성왕이 백제의 왕도 부여에서 육로로 관산성으로 온다면  부여 - 논산 – 흑석동산성 – 사정성 - 이산성 - 계현성(닭재) - 구천 - 관산성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아래 지도 07는 닭재 지도로 대전쪽에서 닭재를 넘는다면, 덕산말에서 닭재골로 들어가 닭재를 지나 수캐골로 해서 명경소류지를 지나 서화천에 이릅니다.  따라서 백제인들이 서화천을 수캐골에서 ‘개’와 냇가의 ‘천’을 합하여 구천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러면 구천은 어느 한지점이 아니라 명경소류지 앞 서화천부터 구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서화천이 구천입니다.


지도07 닭재 (옥천군 문화유적분포 지도, 2005, 옥천군과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행한 지도) - 서화천과 산성이름을 제외하고 지도의 지명글씨가 작아 필요한 지명을 크게 함.


     (3) 성왕은 어디에서 납치 아니면 죽었을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백제 본기를 참고할 시 성왕이 온다고 이야기를 듣은 신라군이 사전에 매복하여 성왕을 기다리고 있다가 성왕을 기습을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현대에도 매복을 할 때 매복지점은 적이 지날 것으로 예측되는 지점이고, 기습해서 쉽게 타격을 줄 수 있고, 바로 그 지역을 이탈 할 수 있는 탈출로가 확보된 지점에서 매복을 합니다.
     
    지도08를 보면 매봉산 보루 위쪽으로 연한 노란색으로 표시 된 부분이 닭재 수캐골을 지나 상장리에서부터 서화천을 따라가면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다가 길이 한곳으로 모이는 곳이 동평리이고, 매봉산 보루와 동평산성 사이로 길과 매복지 사이에 높이(고도) 차이도 있으며, 백제군이 주둔할 것으로 추정되는 계현성(닭재)와 관산성과는 적당한 거리가 있고, 또한 김무력 장군이 신라군을 모아 정비 후 관산성을 공격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대골(마항리)이 옥천쪽 고개 너머에 있습니다.

   김무력장군의 신라군이 신라에서 출발하여 대골에서 모였다면, 대골에서 신라로 탈출할 수 있는 탈출로가 있는 것으로 탈출로가 확보된 매복장소로 적격 장소로 생각합니다.


지도 08  구천 주변 지도 (1919년 오만분의 1 지도)


   반면 구진벼루는 길이 갈라지고, 관산성이 너무 가까이 있어 기습과 동시에 인지가 되어 탈출하기 어렵습니다. 매복지점으로 부적격한 장소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성왕이 납치 내지 죽음을 당한 곳은 매봉산 보루와 동평산성 사이의 동평리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 성왕의 납치 후 죽는 과정이 보다 상세히 기술된 것은 성왕이 납치된 곳이 왜군이 주둔하여 관리하는 지역 내에서 발생하여 자세히 기술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주101)   日本書紀 卷十九 欽明天皇 十五年(五五四)冬十二月 其父明王憂慮餘昌長苦行陣久廢眠食 父慈多闕 子孝希成 乃自往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斷道擊破

주102)  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聖王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주103)  日本書紀 卷十九 欽明天皇 十六年(五五五)八月 百濟餘昌謂諸臣等曰 少子今願奉爲考王出家脩道

주104)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59쪽 

주105)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59,66-67쪽; 관성동호회, 1984, 「옥천향지」 375-377쪽

주106)   관성동호회, 1984, 「옥천향지」 377-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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