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기 전에 앞서서, 사택천복과 상영등이 같은 주장을 하던 같은 일파라는 주장에 대해선 제 주장이 너무
경솔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부분에 있어서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분명 그때 의직이나 상영간의 의견충돌등,
성충 실각 이후의 좌평들사이에서도 서로 일치되지 않고 의견충돌이 있었으니깐요.)
다만, 부여장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백제말기 좌평의 정원은 6명에서 서자들 +41로 인하여
달솔보다도 좌평인원이 대거 늘어납니다. 또한 이들에게 식읍까지 주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보더라도
그냥 단순히 명예직의 개념이 아닌 좌평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다고 사료되어지는군요...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귀족들의 반발이 엄청날텐대도 의자왕이 해냈다는것은 그만큼 백제의 왕권이 더 강화되었다는
반증이며, 좌평들의 권위가 많이 축소되었다고도 볼수있습니다. 또한 이사건이 좌평 성충이나 흥수같은 인물들이
정계에서 실각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의자왕의 서자 41명에게 주어진 식읍은 좌평 성충이나 흥수같은 인물들이
실각되면서 이들의 식읍을 몰수해서 충당하였을거라는 추론도 가능해집니다....
뭐, 부여장님께서도 이정도의 의견에는 동의하실것입니다. 다만 그 뒷 부분부터 달라지리라 보는대요.
부여장님은 이들 서자 41명이 과연 좌평에 준하는 권력까지도 가졌는지에 대해서 저는 큰 의문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네, 삼국사기엔 분명 이들에게 좌평의 직위를 내려주었다고는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정말 제가 몰라선 묻는바입니다만..
그 뒷기록에서 이들 의자왕의 아들들에 대한 직함에 좌평이라는 칭호가 붇는 사례가 단 한차례라도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백제부흥운동기에는 몇몇 관찰되는 인물도 보이는거 같긴 합니다만, 이시기에는 복신도 좌평이라 칭하고 너도나도
좌평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이들 관직이 백제멸망직전의 관직이라고 보이기가 매우 애매합니다...
즉, 소정방에게 음식을 바치며 애걸하였던 서자 부여궁이라는 인물도 좌평이라는 관직이 나와있지 않으며, 그당시 태자인 부여효나 태,융 같은 왕자들 역시 관직에 좌평이라는 칭호를 쓴 사례는 전무합니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분명 백제왕자들을 6좌평과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 서자 41명에게 주어진 좌평으로써의 역활은 분명 식읍을 하사했을정도로 단순 명예직의 개념으로써 볼순 없겠으나 실제 대외 직함으로써의 기능이나 권력을 나타내는 것 또한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서자들에게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주었다는 것에 대해서 단순히 좌평성충,충상들의 식읍을 몰수해서 하사했다는 기록에 대한 오기로써 해석을 하던지(개인적으로는 저 역시 이 의견은 동의하진 않습니다), 아니면 대외에 널리 공포하거나 사용되어지는 직함이 아닌, 귀족들에게 우리의 왕권이 이렇게 강화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한 일종의 위협용으로 실제 대외 외교관계시 사용되어지지 않았으며, 실제 6좌평만큼의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방증한다고 보여집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백제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1.09 기록에도 전무한대... 여자신을 의자왕의 아들로 보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알기로는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된건 없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단지 부여씨라는 이유만으로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단정짓는건 어폐가 크다고 봅니다. 또한, 의자왕의 서자 41명역시 의자왕의 아들이 아닌 양자라고 표현한 근거 역시 도대체 뭔지 궁금합니다. 저역시 부여장님의견대로 41명의 서자들의 좌평임명이 좌평직의 권한을 축소시킨것은 맞으나, 이 서자41명이 6좌평에 준할만큼의 권력을 가지진 않았으며 좌평의 권한이나 권력이 대폭낮아지긴 했어도, 달솔과 계급이 아예 뒤바뀌는 역전현상은 없었다는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
작성자백제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1.08 서기 660년시점에 달솔이 좌평보다 계급이 높고 권력이 쎗다면 부흥운동을 주도한 복신이 좌평이라고 칭하지 말고 달솔이라고 칭해였어야겠죠...(머, 글을 다시 읽어보니 부여장님도 이정도로까지 의견을 주장하신건 아닌것으로 사료됩다, 단지 좌평의 권한이 예전에 비해서는 축소되었다는 선이라면.. 저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여튼 부여장님과 저의 의견은 80%정도는 맞는거 같은대 20%정도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는듯 싶군요.^^
-
작성자부여장 작성시간 10.11.09 정작 ' 핵심이 되는 6좌평은 결국 따로 두었을 ' 거라면 41좌평을 둔 취지 자체가 무색해 지지요.... 때문에 실질적으로 어느 좌평이든 똑같이 실질적인 권한이 축소되었을 거라고 보는 겁니다. ' 좌평 6명과 함께... ' 에서의 6명의 좌평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 듯 한데, 굳이 같이 교섭하러 간 6명의 좌평을 ' 좌평 중에 가장 우두머리 급으로 보아야 한다 ' 는 정황근거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리플에서 여자진을 의자왕의 아들로 보는 부분이 있다고 했습니까? 왕족의 성씨를 하사받은 형식적 수양아들 개념으로의 서자라고 했지요~
-
작성자백제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1.09 그 형식적 수양아들 개념이라고 보시는 근거가 뭔지가 궁금합니다.... 백제의 경우 부여씨에서 흑치씨나 귀실씨등 다른 성씨로 갈라져 나오는 사례는 있어도, 왕이 직접 부여씨를 하사한 사례는... 뭐, 신라야 그런 경우가 몇차례 보이긴 합니다만(그래도 수양아들까지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백제는 적어도 역사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백제무왕같이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워서 수양아들로 보인다고 주장하시는건 아닐테고요..
-
작성자부여장 작성시간 10.11.09 ' 서자 ' 의 개념을 혈육으로 이해하기엔 힘든 면이 많으니까요.... 친위 측근 세력의 양성 및 기존 좌평 권한의 희석화을 통해 신예 세력층에게 성씨를 하사하고 다수의 좌평 체제로 나아간 걸로 보는 겁니다. ' 실질적인 의미 ' 측면으로 따지면 수양아들 정도의 입지적인 비유라 보는 거지요... ' 너는 이제 내 수양아들이다. 날 아버지라 부르거라... ' 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삼국사기에 나온 ' 서자 ' 의 실질적 의미가 대략 저러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게 백제 기존 역사 기록에 보여야만 가능한 체제입니까? 엄연히 7세기 그 당시는 백제의 전무후무한 개혁 시대였다는 점도 참고해 봐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