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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토론방

근초고왕과 왜 - 백제와 왜는 언제 교류를 시작하였나?

작성자귀거래사|작성시간11.06.21|조회수521 목록 댓글 2

근초고왕과 왜 - 백제와 왜는 언제 교류를 시작하였나?

 

일본서기는 <백제기>를 원 사료로 하는 기사에서 367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귀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귀국’과 통교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그 전 해, 탁순국에 사신을 보내 ‘귀국’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서 탁순왕에게 ‘귀국’과의 사이를 중개해줄 것을 부탁했다. <일본서기>는 탁순왕의 말을 인용한 형식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甲子의 해(366) 7월 중순에 백제사람 久氐, 彌州流, 莫古의 3인이 우리나라(탁순국)를 찾아와서 “백제의 왕은 동방에 日本 貴國이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들을 파견하여 그 귀국에 조공케 했습니다. 그래서 귀국을 찾아가던 중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귀국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주시면 나중에 우리 왕은 매우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일본’은 원 사료에는 없었던 것을 일본서기편자들이 집어넣은 것이 분명하다. ‘일본’이라는 말은 4세기에는 없었다. ‘귀국’은 2인칭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고귀한 나라’라는 뜻의 일반명사로 쓰인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이 ‘귀국’이 일본의 야마토정권이라는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품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귀국이 야마토정권이라면 <백제기>가 굳이 ‘귀국’이라는,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용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천관우씨는 이 ‘귀국’을 신라라고 보았다. 나는 이 ‘귀국’을 금관가야라고 본다.

 

‘귀국’을 일본이라고 할 경우 왜 백제의 사신이 탁순국(대구달성)에 와서 일본과의 중개를 요청했는지 잘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귀국’을 금관가야라고 보면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탁순국은 백제의 수도 위례성에서 금관가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가야의 일국이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탁순을 창원으로 比定하고 있지만 그것은 ‘귀국’이 일본이라는 전제하에 대구에 대한 代案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다. 근초고왕은 금관가야와 통교를 하기 위해 가야의 일국인 탁순국에 그 중개를 부탁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근초고왕에게 절실했던 것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여 신라 및 가야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바다건너 일본은 백제와 국경을 접한 것도 아니므로 왕의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366년과 368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良馬 2필을 선물했다. 즉 백제는 367년경 신라 및 가야제국과 통교를 했던 것이다. 특히 가야제국과는 주종관계를 맺었음을 다음과 같은 기사로 알 수 있다.

 

— (백제의 성왕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치세에 안라. 가라. 탁순의 왕들이 처음 백제에 사신을 보내와 통교하고 서로 돈독한 우호를 맺었으며, 가야제국은 백제의 子弟가 되어 영원히 융성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일본서기>

 

— 처음에는 백제가 가라를 종속(附庸)하였는데 나중에는 신라가 가라를 종속하였다. <수서> 신라전

 

 

한편 <일본서기>는 백제가 367년 ‘귀국’과 통교했다는 기사에 이어 369년에 왜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와 함께 가라 7국을 평정하고 전라도지방을 복속시킨 다음 이 전라도지방을 백제에 할양했으며, 백제는 그 감사의 표시로 칠지도를 제작하여 왜에 바쳤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일본학자들은 현재 石上神宮에 소장되어있는 칠지도를 그 증거품이라고 하면서 이 <일본서기>의 기사를 근거로, 369년부터 일본이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임나일본부설). 하지만 칠지도의 명문에 의하면 이 칼은 상위자인 백제의 왕이 하위자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

 

나는 이 369년의 군사작전의 주체가 일본이 아니라 眞氏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의 호족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 이 지역은 삼한시대부터 목지국 진왕의 영향 하에 있었는데 목지국이 백제에 통합된 뒤 이 지역에서 자립 움직임이 일자 백제왕실의 외척이 된 목지국의 眞氏가 이 지역을 다시 복속시킨 사건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369년의 이 ‘가라7국 평정’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사 全文이다.

 

神功 49년 3월 神功황후는 荒田別,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신라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들은 백제의 구저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탁순국에 이르렀다. 막 신라를 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병력이 적어 신라를 깰 수 없다. 증원군을 요청하자.’ 그래서 沙白. 蓋盧가 본국으로 가 증원군을 요청했다. 神功황후는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이 두 사람은 그 씨성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단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정병을 주어 사백. 개로와 함께 보냈다. 탁순국에서 합류한 이들은 신라를 쳐부수고 比自㶱. 南加羅. 喙國. 安羅. 多羅. 卓淳 등 가라 7국을 평정한 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계진에 이르렀다. 이어서 南蠻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이를 백제에 양도했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 부자가 군사를 이끌고 와 합류했다. 그러자 비리. 비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 자진하여 항복했다. 근초고왕 부자와 荒田別. 목라근자 등은 의류촌에서 만나 전승의 기쁨을 나누었다. 근초고왕부자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한 뒤 돌려보냈다. 근초고왕과 千熊長彦(치쿠마나가히코)은 백제로 돌아와 벽지산에 올라 맹세를 했으며, 다시 고사산에 올라 함께 반석 위에 앉았다. 이때 근초고왕은 다음과 같이 맹세의 말을 했다.

‘만약 풀을 깔고 앉으면 풀이 불에 타 없어질 우려가 있다. 나무를 꺾어 그 위에 앉으면 나무가 홍수에 떠내려갈 염려가 있다. 이 반석위에서 맹세를 하는 것은 영구히 썩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이후 千秋萬歲 끊어짐 없고 다함없이 늘 西蕃을 칭할 것이며 춘추로 조공을 할 것이다.’

 

이 기사는 <백제기>의 내용을 조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이 기사에서 왜는 목지국이고, 사백, 사사노궤, 개로, 목라근자 등은 각각 백제의 호족 사씨, 해씨, 목씨 등이다. 千熊長彦(치쿠마나가히코)은 일본이름처럼 써놓았지만 사실은 진씨 일족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한다(‘천’과 ‘진’은 발음이 비슷하다). 荒田別(아라타와케). 鹿我別(시카가와케)은 목지국사람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본다. 본국은 백제를 지칭한다.

 

백제는 불과 2년 전에 신라 및 가라제국과 우호를 맺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라 7국을 평정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여 가라제국과 마한제국에 대하여 백제의 무력을 과시하고 그들의 복속을 확인할 목적으로 약간의 기마병을 파견하여 행한 순방이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본다. <일본서기>에도 ‘가라7국 평정’이라는 말과는 달리 침미다례를 도륙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전투기사는 없다. 진씨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호족들이 탁순(대구달성)에 집결하여 막 출발을 하려고 할 때 근초고왕으로부터 휘하의 將卒도 합류시키겠다는 전갈이 와서 그 장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라고 본다.

 

한편 근초고왕이 산 위에서 千熊長彦에게 했다는 맹세는 그때 복속해온 전라도의 일부 소국을 진씨의 領地로 영구히 인정하겠다는 약속이었다고 해석된다. 이것은 원래 중국의 漢나라에서 天子가 諸侯에게 행했던 ‘封爵의 의식’으로, 封地에 대한 보증 서약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백제에 전해졌던 것이다. 그 서약의 말은 다음과 같다.

 

長大한 황하가 띠처럼 작아지고 高大한 태산이 숫돌처럼 평평해져도 封國은 영원히 안전하게 그대의 자손에게 전해져 변함이 없을 것임을 맹세하노라.

 

그런데 이 왜군을 일본군이라고 할 경우, 어떻게 그 군대가 탁순(대구달성)에 집결했는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태식, 田中俊明 등은 탁순을 창원으로 比定하고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창원에 상륙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왜가 일본이라는 전제하에 거기에 맞추기 위한 비정이지 별도로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학자들이 왜 처음에 탁순을 대구에 비정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구의 옛 이름 달구벌(= 달성)의 ‘달’은 ‘닥’, ‘탁’과 같은 말로, 닥, 탁, 달은 신라를 포함한 진한 땅 여러 곳의 지명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달구벌의 원 이름은 ‘탁순’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금관가야나 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초기부터 北九州나 本州의 시마네지방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설화> 및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등 일본의 고문서에 나오는 <신라왕자 天日槍 설화>, <가야왕자 아리시토 설화>, <신라 땅 끌어오기> 등이 이를 말해준다. 삼국사기에는 173년 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왔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백제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마한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에 교류를 할 여건이 안 되어 있었다. 나는 광개토왕시대 이전에는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접촉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369년의 이른바 ‘가야7국 정벌’은 한반도 내의 사건이었지 열도의 왜가 관여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왜국간의 첫 교류는 397년(실제는 396년) 백제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냄으로써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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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불사조 | 작성시간 11.06.21 아신왕 때의 왜는 목지국인가요? 아니면열도의 다른 세력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21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58성 700촌을 빼앗긴 뒤 아신왕이 광개토왕에게 무릎을 꿇고 고구려와의 화평정책을 취할 것을 맹세한 직후 이에 불만을 품은 진씨가 독립하여 '왜국'을 건국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원래의 목지국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역사드라마 같은 이야기지만 저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태자 전지가 볼모로 간 곳도 일본열도가 아니라 충청전라도지방의 왜국이었다고 봅니다. 진씨가 분리독립할 때 자신의 외손자를 데려간 것 뿐입니다. 그들의 일본이주는 404년의 패전 이후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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