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신왕은 즉위를 하였나
백제의 구이신왕은 참으로 그 존재가 희미한 왕이다. 그는 7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그에 관한 기사는 즉위와 死去 기사가 전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구이신왕은 전지왕(餘映)의 맏아들로, 420년 전지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리고 427년에 죽었다. 구이신왕이 죽자 맏아들인 비유왕(餘毗)이 뒤를 이었는데 비유왕은 전지왕의 서자, 즉 구이신왕의 배다른 형제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455년 비유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 餘慶이 즉위하여 개로왕이 되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포위공격 시에 붙잡혀 죽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지왕(405~420) - 아신왕의 맏아들
구이신왕(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비유왕(427~455) - 구이신왕의 맏아들 (혹은 전지왕의 서자)
개로왕(455~475) - 비유왕의 맏아들
하지만 중국의 宋書에는 구이신왕은 나오지 않으며, 전지왕(餘映)이 430년경에 죽고 뒤를 이어 곧바로 비유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즉
420년 宋의 武帝는 즉위하자 餘映을 진동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武帝本紀).
424년 餘映은 長史 장위를 宋朝에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백제국전).
425년 文帝는 餘映에게 詔를 내리고 전왕의 官爵을 계승케 했다. 그 후 매년 백제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상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백제국전).
429년 7월 백제왕이 사자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송서본기).
430년 백제왕 餘毗가 다시 그 이전과 같이 견사조공을 해왔다. 그래서 (文帝는) 전왕 餘映의 작호를 餘毗에게 수여했다(백제국전).
450년 餘毗는 국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백제국전).
(455년) 餘毗가 죽고 아들 餘慶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백제국전).
한편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이 나온다. 즉 일본서기 應神25년 조에는
應神25년(414),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 아들 구이신이 즉위하여 왕이 되었는데 왕이 幼少했으므로 木滿致가 國政을 맡았다. 목만치는 王母와 음행을 일삼았는데, 천황은 이를 듣고 그를 소환했다.
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직지왕(전지왕)의 사거년은 삼국사기의 것과 6년 차이가 난다. 나는 작년 <역사문>에 올린 글에서 이것은 일본서기의 잘못임을 지적했다. 일본서기의 이 기사가 잘못임은 구이신왕 代에 목만치가 등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목만치는 고구려의 공격에 의한 한성 함락 시 활약하는 인물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만치가 구이신왕의 모친(전지왕의 비 팔수부인)과 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음의 일본서기 자체의 기사내용과도 모순된다.
應神39년(428), 백제의 직지왕이 그 여동생 신제도원을 파견하여 천황에게 봉사하도록 했다. 신제도원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일본열도로) 왔다.
應神39년은 428년이 되는데 그때도 백제의 왕은 직지왕(전지왕)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宋書 및 일본서기의 기사로 볼 때 구이신왕은 즉위를 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왜 삼국사기는 즉위하지도 않은 구이신을 왕이라고 했을까. 나는 그 힌트가 비유왕 즉위년 조의 기사 즉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비유왕은 전지왕의 서자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왜냐하면 그를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왕위계승 적법성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하는 식의 조작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백제본기를 집필할 때 참고로 한 史書 중에는 구삼국사. 三韓古記. 古記. 古典記 등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는 다행스럽게도 비유왕이 전지왕의 서자라고 사실을 기록한 책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구삼국사가 백제본기의 基本原典이었고 삼한고기. 고기. 고전기 등은 보조원전이었다. 그러므로 구삼국사가 비유왕을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라고 했음은 거의 확실하며, 백제본기 동성왕23년 조에 실린 牟都(문주왕)의 기사로 미루어볼 때 삼한고기에도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라고 되어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구삼국사와 삼한고기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지왕부터 개로왕까지 왕위는 모두 맏아들이 상속했다고 기사를 조작했던 것이다.
전지왕은 태자시절 왜국에 가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사로 미루어 그는 그곳에서 應神천황의 딸과 결혼을 했으며, 그 부인이 팔수부인으로, 구이신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구이신은 그가 즉위했다고 하는 420년에는 적어도 15세 이상의 청년이었을 것이다. 幼少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왜국은 일본열도가 아니라 한반도 충남지역이었으며, 應神은 백제의 호족 眞氏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405년 태자 전지가 왜국에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백제와 왜국(충남)은 고구려의 步騎 5만에 의한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고(410년) 그 결과 왜국은 일본열도로 쫓겨 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이후 백제조정에서의 진씨의 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고 본다. 전지의 즉위는 眞氏(왜국)과 解氏(국내)의 후원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진씨의 주력이 일본열도로 쫓겨 간 이후에는 해씨가 권력을 독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진씨세력이 급격히 약화됨에 따라 전지왕은 자신의 사후 아들 구이신의 安危 및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진씨의 주력이 일본열도로 쫓겨 간 420년경 구이신을 태자로 내세움과 동시에 그 이후 국내에서는 그에게 왕의 代行을 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구이신의 지원세력이었던 진씨는 미약한 힘밖에 없었기 때문에 429년 전지왕의 사후 비유후원세력(아마도 해씨)에 의한 궁정쿠데타가 일어나 구이신은 쫓겨났고 왕위는 서자였던 비유에게 돌아간 것이라고 본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이 427년에 즉위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429년 7월 백제왕이 사자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송서본기)고 하는 백제왕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전지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송서 백제국전의 430년(元嘉7) 조에 나오는 비유왕의 견사조공이 429년 전지왕 사후 즉위한 그가 행한 첫 조공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429년 즉위한 비유왕은 以前의 관례에 따라 430년 宋에 조공을 하고 전지왕의 작호 襲爵을 승인받은 것이라고 본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있는 百濟新撰에도 비유왕의 즉위년이 429년으로 되어있다. 즉
백제신찬에서 말하기를 기사년(429)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아레나코를 백제에 보내 귀족의 딸을 요청했다. 백제는 모니부인의 딸 適稽女郞을 단장시켜 천황에게 바쳤다 (雄略2년 조)
여기서 개로왕이 즉위하였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改作이고 원래 백제신찬에는 개로왕이 아니라 비유왕이라도 되어있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일본서기는 기년상의 문제로 비유왕은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 백제신찬의 기술대로 비유왕은 429년에 즉위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왜 삼국사기는 그의 즉위를 427년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김부식이 참조한 國內原典 중 그렇게 기술되어있는 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427년 비유왕 즉위를 반드시 잘못된 것 또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중국. 일본의 사서 내용으로 볼 때 429년 즉위라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것 같다. 국내원전을 중시한 김부식은 그렇기 때문에 427년 비유왕 즉위와 모순되는 중국사서의 기술내용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았다.
끝으로 백제의 역사에서 왕비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서너 명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가 전지왕의 비 팔수부인이다. 그것은 그녀가 應神천황의 딸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는 전지왕 사후 아들 구이신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 전지왕의 사후 그녀가 목만치와 음행을 일삼았다는 것은 목만치의 생존年代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일본서기의 날조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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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聖君 仁宗大王 작성시간 12.03.03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중요하다 아니다 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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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多勿 亞羅氣人 작성시간 12.03.03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요로 수정합니다..글한마디한마디가 감정이 상하는 곳이라 조심조심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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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시간 12.03.05 진씨 가문을 왜국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계시는데, 남당유고를 살펴보면 신라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근구수왕의 처이자 침류왕의 어머니 아이부인을 진씨라고 하는데, 남당유고에 의하면 신라인 백발의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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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성일 작성시간 12.03.05 남당유고에 의하면 전지왕의 비이자 구이신왕의 어머니 팔수부인은 인덕천황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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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성일 작성시간 12.03.05 429년은 비유왕3년으로 개로왕의 즉위 년간이 아닙니다. 428년 비유왕2년에 백제에 일본사신이 오고간 일이 있는데 남당유고에 의하면 백제와 일본과의 혼인기사입니다. 아마도 429년은 개로왕의 출생기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