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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토론방

삼국시대 연표중 백제 4~5세기: Ver 0.3 - 1부

작성자자이수|작성시간13.08.15|조회수480 목록 댓글 0

 

삼국시대 연표중 백제 4~5세기: Ver 0.3 - 1부


갱신일 : 2013년 8월 15일 


제작자 : 풍쿠 박사

개작자 : 자 이 수 


 


2 ~ 3세기 - 히미코, 토요의 규슈 - 금관가야(구야한국)와 내빙하여 밀접한 교류를 했다.


서기 3세기 말 - 요서 라마동고분군 축조 시작

중국 길림대 형질인류학연구팀은 서기 3세기 말에 축조 시작하여 4세기 중반에 축조가 중단되기까지 
모용선비와 함께 
존속한 요서의 라마동 고분군이 기존 설대로 삼연문화의 모용선비족이 이룬게 아닌 부여족이 주체적으로 이룬 
것이라고 밝혔다.

서기 4세기 중 - 북방의 선비 집단은 요동의 모용부(慕容部), 요서의 단부(段部), 요북의 우문부(宇文部), 
막남의 탁발부(拓跋部), 하서의 독발부(禿髮部), 농서의 걸복부(乞伏部)의 여섯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에 흉노에서 기원하여 선비와 융합된 철불부(鐵弗部)와 독고부(獨孤部)가 추가되었다. 
또 모용부와 탁발부에서 갈라져 나온 일파가 각기 청해의 토욕혼(吐谷渾)과 막북의 유연(柔然)으로 독립하면서 
선비 집단은 초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외에도 하란부(賀蘭部)와 같은 기타 여러 부락이 
비록 역사의 전면에 대두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그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서기 302년 - 고구려 미천호태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명을 붙잡아
  평양(요동)으로 옮겼다. 현도군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다.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본기


서기 313년 -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 대방군을 멸망시키자 낙랑군의 왕준이 낙랑태수 장통을 설득하여 
요서의 모용외에게로 유민 1천명을 이끌고 배타고 도망가다.
모용외는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고 요서에 낙랑군을 새로 설치하였다.
한편 대방군은 요서로 도망가지않고 황해도에 그대로 남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지방 한계漢系 호족이 된다.

"낙랑군의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천여가(家)를 거느리고 모용외(慕容[廟-朝+鬼])에게 
귀복(歸服:돌아와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자기가 지배하는 영역 안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자치통감 진기10 민제 건흥원년4월조.-


"미천왕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본기


서기 333년 - 동수冬壽가 모용황의 동생인 모용인에게 투항해 모용인의 사마司馬가 되다.


서기 336년 - 동수冬壽는 주군 모용인이 모용황의 기습공격에 패하고 죽자 
곽충(郭充) 등과 더불어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그 후 동수는 중국 동진과 고구려의 외교 연락선을 이어주며 낙랑, 대방의 중국인들을 통치하는 낙랑,대방 태수가 되고
전연과 고구려의 외교 라인도 연결해줬다.

동수는 동진으로부터

사지절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창려 현토대방태수 도향후

使持節都督 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昌黎 玄菟帶方太守 都鄕侯 라고 책봉되었다. 

당시 낙랑, 대방엔 중국인 세력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고구려는 동수라는 중국인을 낙랑, 대방 태수로 삼아 이 지역을 간접 통치했다. 


서기 342년 겨울 - 모용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 제국의 모용황은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두갈래길로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격했다. 
험준하고 좁은 산악길인 南路에 4만을, 평탄한 개활지 길인 北路엔 1만5천을 투입했다.
 
거꾸로 수비병력의 전부를 北路방어에 쏟았던 고구려 는 허를 찔려 환도성이 불태워져 초토화되였고, 
미천왕의 무덤 도굴. 미천왕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가 볼모로 잡혀가고 5만의 고구려인들 포로로 
압송당함. 이후 고구려는 무려 13년 동안(355까지)이나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반면 장사와 왕우의 지휘로 北路로 신성을 향했던 선비족 기마군단 1만5천은 고구려 고무장군에 의해 
모두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죽은게 아니고 부여 지역을 빙 돌아 함흥=>강원도를 거쳐 경주의 사로국 땅으로 진군한다.

모용황을 배신한 이들은 선비족화된 흉노족으로 이들의 대장은 모미추(慕味鄒)였다. 
삼국사기는 미조(味照)라 했고 삼국유사는 미추(味鄒)라고 쓰고 일명 미조(未租)라고도 썼다.



서기 345년 - 요서 라마동고분군의 부여,구려,백제,우문부,단부 십만여 인구가 모용황을 긴장케하다.

- "모용황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간언하였다. "구려와 백제 및 우문부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의를 사모하여 온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십만여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진서(晉書) 권109 재기9 모용황



서기 4세기 중반 - 요서 라마동고분군 축조 중단


서기 346년 - 요서부여(라마동고분군:요서백제)가 전연 제국 모용황의 침략에 망하자 라마동고분군 왕자인 오구나가 대통을 
계승하여 근초고왕이라 불리다. 



백제 DNA 론 :

초기 백제 수도 경기도 광주와 한성 = O3가 주류 

후기 백제 수도 충청도 웅진과 부여 = O3가 주류

(백제인은 O3를 주류로 한다.) 


전라도 = 마한 침미다례 =  o2b+d2

(전라도는 삼국시대때 토착 마한인으로써 삼국에 비해서 비주류였다.)


 

서기 342년 겨울 - 모용선비족의 '모미추'가 이끄는 흉노족 기마대가 고구려를 공격하지않고 부여 지역을
빙 돌아 함경도,강원도를 거쳐 경북 경주의 사로국으로 가다.


4세기 중반 - 모용선비족  모미추와 금관가야(구야한국)가 서로의 최고 수장의 신물神物을 교환할 정도로 합일合一 경지로 가다. 

당시 금관가야는 낙랑,대방군 멸망과 사로국과 포상팔국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바람에 고래 사이 새우 신세가 되서 
금관가야 왕자가 모미추 수장을 방문하고 통형동기 창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하며 모미추 해군,무사들의 도움을 
간절히 구했다. 그래서 금관가야는 나라를 맡겼다는 뜻의 '임나'로 국호를 바꾸고 
모미추 무사들에게 강철판갑을 제작해 주어 강철판갑 입은 모미추 무사들이 포상팔국,사로국을 위협하다.
그 후 모미추는 임나가라에서 쌀 , 철 자원 채취해서 갑옷 만들고 가야 기술자를 육성한다.

서기 353년 - 모미추 군대가 사로국을 침공하였다. 사로국 왕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다.
바람을 따라 불을 놓는 화공 작전으로 모미추의 전함들을 불태우니 모미추 군대들이 놀라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신라측 기록이다.

 

이사건을 계기로 모미추는 석우로에게 복수할 틈을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석우로가 이후 얼마 안가 서기 369년에 모용선비족 모미추(신공황후)에게 

목이 잘리어 나간다.


참고 사료 : 삼국사기 신라본기 233년 기록(이주갑 인상 353)


서기 357년 - 고구려의 낙랑,대방 땅을 다스리는 동진의

 

사지절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창려 현토대방태수 도향후

使持節都督 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昌黎 玄菟帶方太守 都鄕侯 인  '동수冬壽'가 사망했다.


서기 357년 10월 - 황해남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동수 무덤(안악 제3호분)'이 축조되다.
동수 무덤은 벽화가 그려져있으며 전형적인 요동반도의 중국식 벽돌 무덤이다.  
(당시 요동 지방의 벽돌식 무덤들에는 무덤 주인이 휘장을 친 방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벽화가 그려져있다.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 고분이다.
동수는 요동에서 건너온 전연前燕의 요동 호족이다. 

동수 무덤엔 유명한 고구려 군사 대행렬도가 그려져있다. 이 행렬도 안엔 성상聖上(고구려 태왕)이 탄 어가와
위풍당당한 고구려 개마무사들과 보병들의 행진이 그려져있다. 
동수는 고구려 태왕의 행렬도를 무덤에 그리고 싶어할 정도로 대단한 고구려 매니아였다.

 

무덤에는 동진의 연호가 쓰여있다.(영화永和 13년) 이는 낙랑,대방 땅의 중국계 태수,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주고 받고 동진의 연호도 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안악3호분 묵서명>
영화(永和) 13년 초하룻날이 무자(戊子)일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이며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昌黎)ㆍ현토(玄토)ㆍ대방(帶方)태수(太守)요 
도향후(都鄕侯)인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 출신 동수(冬壽)는 
자는 □안(□安)인데 나이 69세에 관(官)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


서기 369년 - 모미추(신공황후)와 목라근자가 오구나타케루(근초고왕)와 함께 가야7국,침미다례를 평정하였다.

 

모미추 (이하 신공황후라 칭함 또한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 내용을 바탕으로 꾸며짐. 이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음)

오구나타케루(근초고왕 여구)와 그의 아들 귀수(근구수)가 침미다례를 단독으로 격파하여 학살했으므로 침미다례 즉 전라북도,전라남도를 백제가 갖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근초고,근구수는 전라북도,전라남도의 침미다례 마한인들의 이후 반발,항쟁을 우려하여 당분간 그들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이후 근초고,근구수는 고구려 사유와 전쟁하느라 전북,전남에 백제 관리를 파견하여 점차 백제의 땅으로
만들어나가는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행치 못했으며 또한

근구수왕 때 대기근으로 인한 참혹한 흉년, 대對고구려전에서의 전쟁 실패 , 신라의 성장은 백제 내부를

크게 혼란케하여 전북,전남의 백제화化 프로젝트는 실패하고 말았다.)  


-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대구)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모미추 군대의)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比自벌?南加羅?녹國?安羅?多羅?卓淳?加羅 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

比利?벽中?布彌支?半古 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제위 49년조 (일본서기 249년)  실제 369년

서기 369년 -  모미추(신공황후)가 사로국을 정벌하여 사로국 왕 석우로를 사로잡아 해변으로 끌고가서
석우로의 무릎뼈를 자르고 돌 위에서 기게 하엿다.
주유를 뺨치는 화공 작전의 대가는 고통에 신음하였다. 
고통에 신음하는 최고의 전략왕 석우로를 신공황후가 조금 있다가 목을 칼로 싹둑 자르고
모래 속에 묻었다. 몸뚱이는 불에 활활 태워버렸다. 

사로국(신라)인이 우로 왕의 어린 아들 '흘해'를 급히 말에 태우고 도망갔다. 

모미추(신공황후)는 모용선비족중 한명을 사로국의 재상으로 삼고 모용선비족(여기서는 이후 야마토라 표기한다)의

관가館家를 설치하고 회군했다.

석우로의 아내인  사로국(신라)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命元夫人)(사로국 왕비)은 복수를 다짐했다.
명원부인은 사로국의 재상이 된 야마토인에게 강간당하였다.


"서기 249년 여름 4월에 왜인(倭人)이 서불한(舒弗邯:신라 관등1등급) 우로(于老)를 죽였다." -삼국사기 첨해 이사금 3년
실제 369년

"왜국(모미추)의 사신 갈나고가 객관에 와 있었는데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모미추)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걷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에 왜국(모미추)의 대신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석우로열전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을 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군선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신라정벌 부분


'(흘해 이사금 즉위시) 흘해는 어리지만 노성한 덕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 흘해이사금본기-


서기 369년~서기 4세기 후반 사이 - 사로국 왕비 명원부인이 사로국 총독(모용선비족:야마토인)을 죽이고 
모미추에게 반란하였다.
모미추(야마토) 관군이 당도하자 사로국 사람들이 명원부인의 목을 베어 모미추(야마토) 관군에게 항복하였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을 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군선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신라정벌 부분


서기 4세기 후반~서기 381년 또는 382년 사이 - 흉노선비족의 수장 내물 메르겐(매금)이 흉노선비족 약탈기병대를 거느리고
사로국 땅을 밟아 사로국을 점령하고 신라新羅를 세우다. 
신라는 '새로운 나라'란 뜻이다. 


서기 4세기 - 적석목곽고분이 경북 경주에 출현. '신라 토기'가 등장.
경주의 적석목곽고분이 서기 6세기까지 지속됨. 

경주 일원에만 존재한 적석목곽고분의 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쿠르간 계통의 흉노족 묘제로 보고 
이를 만든 신라 김(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증명한다.
 
최초의 적석목곽고분의 주인은 4세기 신라를 개국한 '내물 메르겐(내물 마립간 : 광개토왕비문 매금)'이다.
 


서기 4세기 초에서 6세기 중엽 - '신라.가야 토기'의 유행 기간
      (4세기 초 이전은 원삼국시대 토기 혹은 진.변한 토기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6세기 중엽 이후는 가야가 멸망했으므로 '신라토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서기 370년 - 전진前秦이 전연前燕을 멸망시키자 전연의 선비족 유민들이 엄청나게 고구려에 유입이 되다. 

그 후 나비효과가 일어나다. 중국에서 바람이 부니 한국에서는 태풍이 되다.. 
전연이 멸망당하니 그 후로 세월이 흘러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갑자기 강성해져가다..!

선비족의 대거 유입으로 인해 나온 현상이다.


서기 371년 - 백제의 오구나타케루(근초고왕)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다. 
고구려의 왕 쇠(釗 = 사유 =고국원왕)가 군사를 내어 막다가 백제 태자 귀수(-여수=근구수)의 활에 쳐맞고
사망했다. 귀수가 고구려 왕 '쇠'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달으니 고구려군이 붕괴되어 모조리 도망쳤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유시(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그리하여 신(개로)의 선조인 수(須 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만에 쇠(釗:사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백제 근개루 왕의 편지

 


서기 381년 - 신라를 세운 흉노족 내물 메르겐(매금:마립간이 북중국의 기마민족 국가 전진前秦의 부견 황제에게 사신 
위두衛頭를 보내 흉노 기마족이 신라를 세웠음을 알리다. 사신 위두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전진으로 가다.
이에 백제 조정(근그수왕)이 신라의 단독 외교 행동에 분노하지만 백제의 근구수왕은 이상하게 아무런 미동도 하지않는다. 

서기 381년(내물 메르겐 제위 26년) - 신라新羅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符堅(부견)과 신라 사신 衛頭(위두)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符堅問(부견문) 衛頭曰(위두왈), 卿言海東之事(경언해동지사), 與古不同(여고부동), 何耶(하야),
<부견황제가 위두사신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答曰(답왈), 亦猶中國(역유중국) 時代變革(시대변혁) 名號改易(명호개역) 今焉得同(금언득동)
사신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 메르겐에 (356-401) 들어서서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昔(석)씨 임금 시대가 끝장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내포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 메르겐(마립간) 이후 昔(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昔씨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내물 메르겐 집권기에 석昔씨가 철저히 제거,학살,순장됐음을 암시한다. 


서기 403년- 황해도 하타 궁월국의 임금 '궁월군'이 고구려 왕 담덕을 피해 120현 인구를 이끌고 임나가야로
피신한 후 일본 야마토로 피난하려하다.
응신천황(모미추 후계자)이 장군 습진언과 모용선비 군대를 임나가야로 파견하여 궁월군과 하타 궁월국인들을 구출하여 
오게하려했으나 신라의 방해로 3년 동안 지체되고있어 응신천황이 크게 분노하였다.

-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 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14년조(서기 283년) 실제 403-2년=401년

 

- 400년 담덕이  임나가라에 있던 모용선비족(광개토왕 비문에 왜)을 무찌르자 대방에 있던 궁월군이 일본으로 이주하려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계획이 순조롭지 못하여 신라의 방해로 약 3년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당시 신라는 담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서기 399년-  응신천황이  목토숙니와 적호전숙니와 날랜 군사를 신라에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고 정벌하였다. 신라 수도 서라벌을 함락하고 신나게 약탈하고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로 구원을 요청하였다.
모미추 군대들은 궁월군,궁월인들을 야마토로 무사히 보내고 신라인들도 무수히 끌고 갔다.
광개토태왕이 뒤늦게 5만 보.기군을 보내나 이미 왜군은 잽싸게 도망치고있었다. 

고구려 5만 보.기군은 재빠르게 추격하여 서라벌을 되찾고 임나가야 종발성(부산 복천동 고분군)으로 추격하여 
종발성을 함락시키고 안라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5만 보.기군은 계속 추격하여 임나가야 수도 염성(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점령하고 야마토 군대들에게 신민臣民이
되어버린 가야인들을 구원한다. 
 

- "평군 목토숙니와 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궁월군)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
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조(서기 285년) 실제 405년-2년


참고 사료 : 일본서기, 광개토태왕비


서기 4~5세기 - 백제의 말사육 기술자 아지카이가 야마토 지방으로 건너가 말사육 시설을 건설하다.

★  4~5세기 오사카 동부 시조나와테시의 시토미야키타 유적 

-다수의 말뼈,고대 한반도 양식의 등자,안장,재갈 등의
말갖춤,백제풍의 주거지,이동식 부뚜막,유U자형 아궁이 장식판,도질.경질 토기 
전남 영산강 일대와 충청도,중부권 유물들과 닮은 것들이 수두룩.
재갈은 재갈과 손잡이를 고리를 이용해 연결하는 백제.가야 재갈과 거의 똑같다.
새발자국 무늬(조족문),직선 무늬가 섞인 타날문토기,부뚝막 장식판 등은 전라남도 서남쪽 해안이나
충남.충북의 전형적 양식이며 백제 특유의 벽기둥(벽주) 건물 터까지 확인되다.

이 시설은 백제의 말사육 전문가들이 소금 토기를 만들었던 왜인 인부들을 부려 말을 먹이고 키운
시설이다.
이 유적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의 말사육 기술자 아직기가 오사카 부근 간사이 지방으로 건너온 연대
,기록과 일치한다.


서기 404년 - 부여왜와 백잔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파기하고 배를 타고 황해도를 침입하여 백제 병사와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했다. 광개토왕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평양을 떠나 이들을 토벌하러 나섰다. 
대방에서 왕의 군사가 부여왜의 선봉과 만났다. 광개토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부여왜군은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광개토왕 비문 -  3면 3행
請□□□朝貢.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파)石城, 

□(왜)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
14년(서기 404년) 갑진에 부여왜는 불괘하여(법도를 지키지 않고 즉양국의 관계를 파괴하고) 대방의 경계를 침입하여 
백잔병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했다. 
...왕이 몸소 병사를 영도하여 토벌했다. 평양을 떠나
3면 4행
□□□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왕의 군사가 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 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왜구는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 
 - 광개토태왕비 


주석 : 삼국사기,광개토태왕비는 이때 백제는 이미 서기 396년에 고구려에 항복하고 
백제 왕(아신왕) 이 노객이라 하며 무릎꿇었지만 와신상담 하여 부여왜와 대방을 함께 공격하였다.
백제 왕이나 백제 왕국의 의지가 부합하여 백제군사들이 왜군과 함께 벌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황해도를 침입한 왜군을 모조리 궤멸시킨다.


서기 407년 - 광개토왕이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왜의 본거지 임나에 수만 단위의 군대로 
사방 포위하여서 그들의 개마무사들을 만여명이나 넘게 무참히 살륙하고 그들의 군대를 전부 참살시켰다.
노획한 군자 기계가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백제의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성등 6개 성을 격파하였다.


- "17년(서기 40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토록 하여...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 탕진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백제의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성이었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3면 5행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3면 6행
□城. □성이었다" -광개토태왕비



서기 5세기 초반 - 모미추 군대들이 전라도로 진입하여 과거 오구나 타케루(근초고왕)에게 주었던 전라도를
차지하였다.  임나 사현四縣을 설치하고 제2의 임나국을 세우기 시작하다.

서기 5-6세기 - 전라도에 가야계 유적과 유물들이 도배되는 엄청난 상황! 
그것도 일부 지역이 아니라 전남 신안, 영암 그리고 전북 남원, 장수 등 전라도 전 지역에 해당된다.

모미추 군대의 모미추 양식 투구, 모미추 양식 판갑, 모미추 양식 토기, 모미추 양식 묘제 등이 
전라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서기 5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모미추 군대들은 전라도에 주둔하며 전라도를 지배하고있던 것이다.
이즈음 영산강 유역에는 모미추의 통치자들의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나타난다.


 

서기 414년 - 장수왕 거련이 광개토호태왕비를 세웠다.


서기 445년 - 남조 송나라의 범엽이 후한서를 저술하다.


서기 455년 - 백제쿠다라제국의 왕자 경사(慶司)가 백제 왕에 즉위하고 근개루(近蓋婁)라 불리다. (개로왕)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


서기 461년 - 백제 근개루 왕(개로 왕)이 고구려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407년 이후 참살탄진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 야마토로 그의 아우 곤지를 보내 천황을 섬기게하고 백제를 구원할 원군을 빌어오게하였다. 

만약의 일을 대비해 곤지에게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주었다. 


- "백제 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采女)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군군(軍君, 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다다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 근개루왕이란 별칭은 그동안 백제와 일본열도의 왜로 분리된 양국을 통합한 왕으로써 이때부터 백제와 일본왜는 하나의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그래서 개로왕을 근개루왕이라 칭한다. 아우곤지를 일본왕에 역임하게 하게 위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을 <일본서기>가  일본입장에서 내용을 각색한 것이다.

 

* 곤지는 일본으로 가서 왜5왕중 [제]가 되고 후여 섬에서 내어난 사마는 왜5왕중 [무]가 된다 [무]는 백제로 돌아와 무령왕이 되어 백제를 다스린다. 



서기 464년 2월 -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들어와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왕이 임나왕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다. 
임나왕은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에게 신라의 구원 요청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영산강유역에 있던 모미추의 장군들인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 가 출동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


-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본부 행군원수

(日本府 行軍元帥: 영산강 유역에 있었던 모미추의 세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조

서기 470년 - 신라 자비왕이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삼년산성'을 쌓다.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며 실로 철옹성 요새였다.
이곳은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접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신라가 이곳에 견고한 산성을 
쌓음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고 나아가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 654~661)이 당나라의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맞았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이 산성은 신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고려의 왕건이 이곳을 공략하다 크게 패하기도 했다.


서기 472년 - 백제쿠다라왕국의 근개루 왕(개로왕)이 북위 제국에 편지를 보내 옛날 자신의 선조인 근구수왕이 
평양에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의 목을 베었다고 알렸다.


- "신(개로)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 고국원왕)가 이웃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수(須 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만에 쇠(釗:사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 이러한 일이 고구려에 알려지자 고구려는 개로왕을 혼재주기위해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기 475년 -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 위례성을 정벌하여 
백제의 근개루 왕(타케루 : 개로왕)을 참수하다.

고구려 장수왕 거련 :  근초고가 군사 3만으로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웡왕을 죽였듯이 장수왕도 똑같이 3만의 군사으로 백제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살해함.  이 때 개로왕은  아차산으로 달아났으나 도중에 태자와 왕비와 함께 고구려 군사에게 죽임을 당한다. 


-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의 장수 걸루 등은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 


서기 477년 3월 - 일본 야마토의 타케루 천황(왜왕5주의 무武 : 웅락천황 )이

백제에게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인 

웅진(구마나리)을 선물해 주어 근개루 왕의 동생 '문주汶洲'로 하여금 백제를 다시 복구하게 하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
타케루 천황은 전라도의 야마토 군대로 하여금 백제 왕실을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야마토의 타케루 천황(무武 : 웅락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 일본서기 웅략천황 제위 21년조

- 이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며 개적되고 각색되어 있다. 사실은 이 당시 개로왕 시절부터 백제와 야마토는 한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2국가 1체제였다.

제濟 : 유라쿠천황: 곤지왕(사이)

무武 : 웅락천황: 후에 백제 무령왕(사마)

 

주석 : 하치호리현은 하치(하타)의 호리(고을)란 뜻이다.

 


서기 495년 - 장수왕이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우다. 

중원 고구려비의 중간 구절..

"... 동이(東夷) 매금(寐錦 : 마립간 또는  메르겐)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


서기 5세기 - 고구려 장수왕이 해마다 북위 제국에 조공물을 바치는 것이 동이 제후국들 중에서
 제일 최고 으뜸이었다. 

"동이와 북적은 중국에 있어 기미(羈?, 말이나 소를 얽어매는 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속국이란 뜻이다)일 따름이다. 고려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것이 동쪽 번국의 
으뜸이었으므로, 길흉사에 중국 조정에서 보내는 것 또한 넉넉하였다. 
기타의 녹록한 나라들도 모두 조공 바칠 줄을 알았으니, 아마 소나 말들이 중국을 향하고 
동풍이 잘 불어 시절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위서(魏書 554 北齊·魏收) 열전列傳


서기 500년 전후 - 대가야가 사타(전남 순천) 지역을 지배하였다. 운평리 고분군이 세워졌다. 

전남 순천 운평리 고분군 - 서기 6세기 초엽 가야계 고총 고분으로 
사서엔 임나의 4개 현 중 하나인 '사타'로 나온다.
6세기 초엽 대가야의 순금제이식, 마구류, 대도, 꺽쇠, 토기류 등 2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운평리 고분군은 서기 500년 전후의 순천지역 지배층의 무덤이다.  
대가야계 유물들이 출토된건 당시 임나의 4개현 중 하나인 ‘사타’(지금의 순천)가 대가야와 연맹관계였음을 
확인시키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은 맹주국인 대가야의 영향이 닿는 고을이었다. 


서기 500년 이후 - 흉노묘제인 적석목곽묘가 갑자기 사라지고 가야 계통의 석곽묘가 나오고 있다.
서기 500년 이후에 신라 왕실이 흉노선비족에서 가야 계통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 왕족 성씨는 중국 사서에 모牟씨라고 나온다.
 

서기 512년 - 야마토 천황이 백제에게 임나4현(전라도)을 선물해주었다. 임나(대가야)가 분노하고
    신라가 불만을 표시했다.

백제 사신: "임나의 4현은 백제에 가깝고 임나(대가야)로부턴 멀어서 임나(대가야) 스스로 지키기 힘듭니다.
게다가 임나 4현이 백제령이 아닌 까닭으로 섬진강을 이용하지 못해 백제의 조공선이 서해와 남해의 코너를 돌때 
거친 물살에 배가 난파되거나 조공품이 물에 젖기 일쑤입니다."
  

야마토의 천황은 백제에 이 영토를 할양해주었다. 여기에 임나(대가야)와 신라가 반발했고 
후에 야마토를 원망하였다.

임나(대가야)는 당연히 자신의 영토를 뺐기고 섬진강이라는 대외 교통로를 빼앗겨 분개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수있다. 하지만  왜 경주분지의 신라가 여기에 반발했을까?

 

즉,512년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그 임나4현이라고 하는 영토에 대해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 가능한데.
그렇다면 이들 당시 신라 왕실은 그 임나,즉,가야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라고 봐야 논리가 자연스럽다로 귀결된다.
서기 500년 이후에는 흉노묘제인 적석목곽묘가 갑자기 사라지고 가야 계통의 석곽묘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서기 500년 이후에 신라 왕실이 흉노선비족에서 가야 계통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사료: 일본서기

참고 사이트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689840

서기 527년 이전 어느 때 - 신라가 임나의 남가라와 탁기탄을 차지하다.  
        야마토 천황이 신라의 궤씸한 짓에 여러번 신라를 책망하였다. 


참고 사료 : 일본서기  

 

현재 참고 중인 사이트: http://ragwangfal.egloos.com/176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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