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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원한의 거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5.02.18 大欽茂 1. 영산강 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시기가 5~6세기에 한정되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 볼 때 그 형성과정이 열도에서 상세히 관찰되는 반면, 한국에서는 그런 면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왜계 갑주도 그 출토량이나 형성과정이 열도 내에서 더 뚜렷이 보입니다.
2.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백제의 무령왕릉 등이 남조의 벽돌무덤 풍으로 건축되었는데, 그러면 백제는 남조의 지배를 받았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열도에서 백제의 금동관모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 곳이 백제의 영역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대흠무 님이 말씀하신대로 그것도 일종의 문화교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요. -
답댓글 작성자 大欽茂 작성시간15.02.18 원한의 거리 영산강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을 축조했던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게 됨으로 그곳에서 더욱 발전했다고 보여지고요. 왜계 갑주도 초기에 사용하던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감으로 더욱 발전과정을 밟으며 대량 생산되었다고도 볼 수 있죠. 금동관모는 백제의 제후 수장들이 하사 받은 것이라는 연구가 있는만큼 규슈가 한때 백제의 영역일 가능성이 농후하죠. 일본서기에도 열도에 담모라(=담로)가 있다는 기록도 있으니 더욱 그렇죠. 남조의 영향으로 축조된 벽돌무덤은 무령왕릉 하나 밖에 없고 계속 굴식돌방무덤이 축조되고 있거늘 무슨 묘제 교체라 주장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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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원한의 거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5.02.18 大欽茂 영산강 일대의 전방후원분은 그 시기가 5~6세기에 그치는 반면, 열도 내의 전방후원분은 4세기를 전후한 고분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하거니와, 그 형성과정도 열도 내에서 확인될 뿐, 한반도 내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방후원분은 어디까지나 왜계 고분일뿐입니다. 왜계 갑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제의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와의 교류의 영향일뿐입니다. 이를 확대해석할 생각은 없거니와, 대흠무 님이야말로 후다야마 쪽에서 나온 백제 금동관모 하나로 그런 주장을 하시는 것은 이중잣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송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2개 정도의 벽돌무덤으로 근거로 백제는 남조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궤변도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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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그리운길 작성시간15.03.05 원한의 거리 역사는 흐름을 중시해야지.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전체를 해석하는건 지양 해야 한다고 봅니다..전방후원분의 전신은 주구묘이고.주구묘는 한반도에서
열도 왜로 갔다는게 일반 정설인걸로 압니다..가야 와 영산강 지역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열도로 이주 하였고 여러 영향을 끼쳤다는건 부인 할 수 없을겁니다.
즉, 주구묘의 풍속을 가진 영산강 집단이 열도에서 주구묘를 전방후원분으로 발전 계승시키다가...5~6세기 ..열도에서 크게 성장한 영산강 가문이..백제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큰 군사집단을 파병하였고..그 흔적이 나주 뿐만 아니라 ..영산강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전방후원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
답댓글 작성자 원한의 거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5.03.16 그리운길 저도 그정도 가능성까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주구묘가 왜계 전방후원분의 형성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조유전 선생이나 강인구 선생 등을 비롯한 여러 고고학자들도 주장한 바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반도 주구묘와 전방후원분의 상관관계도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았을 뿐더러, 전방후원분이 설마 한반도 주구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일본 열도에서 생겨났으며 또한 발전했습니다. 전방후원분 자체는 결국 왜계 고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해도 중국의 불교문화와 한국의 불교문화가 엄연히 구분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