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盧 明 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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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海東天子와 그 天下 Ⅲ. 天下國의 갈래와 多元的 天下觀 1. 自國中心 天下觀 2. 華夷論的 天下觀 3. 多元的 天下觀 Ⅳ. 맺음말 : 고려시대 다원적 천하관의 역사적 위상 |
Ⅰ. 머리말
고려시대에도 외부의 국가들 및 집단들을 포괄하는 ‘天下’, 즉 세계와의 관계는 중요하였고 그 천하에 대한 인식과 관점인 천하관은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의 토대가 되었다. 일찍이 丹齊는 묘청란을 통해 고려에 國風派와 華風派가 있었음을 언급했으며 그런 그의 연구는 고려시대의 사상계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고정관념을 벗어난 선구적인 역사인식라 할 수 있겠다.
단제의 그런 연구성과는 이후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줬지만 당시의 실상을 단순화시킴으로써 당시의 정파나 사상적 유파를 과연 둘로 나누어 파악해도 무방한지, 유교나 비유교적인 면으로 나눌 때 그 각각의 천하관이 모두 동질적이었는지 재검토되어야 할 여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具山祐의 경우, 최승로 등의 화풍파나 당시 국풍파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도 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서 앞선 연구에 비해 한단계 진전된 연구 성과를 내놓았지만 여전히 화풍파와 국풍파로 양분해서 보는 시각은 유지되었다.
그밖에 고려의 국가적 祭儀인 ?丘祀나 八關會를 통해서 고려시대에 다원적 천하관이 존재했다는 연구성과도 있었으나 이 역시 환구사와 팔관회가 동일한 정치적 천하관을 지닌 세력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고려 군주의 位號, 특히 그 중에서도 天子 혹은 皇帝라고 불라는 위호와 관련되어 잘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고려의 군주가 최고의 천자라거나 적어도 그러한 위치에 서게 될 운명을 지녔다는 관점, 둘째는 유교적인 사대주의 질서 속에서 강대국과의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위해 稱帝하면 안 된다는 관점, 셋째는 고려 역시 다른 천자국과 같은 병렬적인 존재의 천자국이었다는 관점이다.
첫째는 가장 적극적인 해석이고 둘째는 가장 부정적인 해석이라면 셋째는 양자를 절충한 해석인데 문제는 고려시대의 천하관을 이 셋중에 하나로 귀속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의 대외관계사나 제도정비 및 문화적인 동향은 이 세가지 천하관 계열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본고에서는 이 세가지 천하관들에 대해 그 내용과 그 사상적 경향의 윤곽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되 특히 그 중에서도 고려 전 ? 중기에 걸쳐 주류를 이룬 다원적 천하관에 대한 검토에 더 큰 비중을 두기로 한다.
Ⅱ. 海東天子와 그 天下
『高麗史』「樂志」를 보면 風入松이라는 俗樂에 고려군주를 지칭하는 ‘海東天子’라는 단어가 확인된다. 이 노래는 곡이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도 자주 연주되었는데 다만 조선시대의 악곡집에는 ‘聖明天子’로 바뀌어 명나라 황제의 성덕을 노래하는 곡으로 바뀌었다. 이는 고려의 군주를 천자 ? 황제라 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래의 관념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서 天子라는 위호와 함께 천자국으로서의 국가적 제도를 사용한 흔적은 이미 태조때부터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에게 귀부하며 올린 글에 태조를 天子라고 한 표현이 있으며 奉御 崔遠이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여 올린 글 역시 황제에게 올리는 表였다. 이처럼 태조 ? 광종대부터 고려는 건원칭제를 하고 국가체제를 황제국 체제로 만들어 실시했는데 이런 분위기는 이후 성종대부터 현종 초까지 중단된 적은 있지만 대체로 고려 중기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이런 고려 군주에 대한 표현은 공적인 문서는 물론 사적인 문서에서도 확인되는데 이것들은 하나같이 고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국가이며 고려 군주는 그 국가를 다스리는 천자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풍입송을 보면 주변 세계를 ‘外國’과 ‘蠻狄’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후자는 고려에 토산물을 진헌하는 등 하위에 있거나 그렇게 될 집단이며 전자는 그보다 격이 높은 집단들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풍입송에서는 고려가 이 두 부류의 집단들로부터 추종을 받는다고 적고 있다.
또한 태조가 30세 되던 해에 바다 가운데 솟아있던 9층 금탑에 오른 꿈을 꾸었다거나, 궁예 말년에 古鏡의 識文이 발견되었다는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시키는 설화에서도 당대 고려인의 천하관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후 문종대와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인된다. 그리고 이처럼 고려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귀부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는 관념은 고려 군주에게 바쳐진 글 뿐만 아니라 신료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주고받은 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규보가 고종 44년(1257)에 지은 연등회 致語에서는 ‘聖上 陛下의 높은 德으로 夷와 夏가 찾아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후자는 남송이 될 것이나 전자로 지칭될만한 대상은 이미 없다고 봐야하며 이는 고려 전기의 대외관계에 대한 기억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고려 초기 고려는 흑수말갈 소집단을 받아들이거나 흑수말갈, 철륵 등의 경기병 9,500기를 후백제 정벌전에서 동원하기도 하는 등, 북방의 여진족을 비롯한 많은 유목민족들을 통제하였다. 단, 이들이 고려의 국력에 큰 보탬은 되었지만 종족적 동질성을 적게 가졌던 만큼, 통합이 어려웠고 고려의 국력에 따라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변동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려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그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고 여러 주변 세력들과 발해 유민들이 세운 興遼國 등이 천자의 나라로 대우하였다. 물론 여진족의 금나라가 초기에 고려 황제 운운한 것도 다 이같은 연유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 군주는 국내와 자국의 세력이 직접 미치는 지역범위인 천하를 설정하고 그 속에서 천자나 황제를 칭하였으나 그 외부의 송 ? 요 등에 대해서는 이들과의 교류에서 실리를 추구하며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선에서 왕을 칭하였다. 즉, 外王內帝의 형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국가인 송이나 요 역시 고려의 칭제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트집잡지는 않았다. 오히려 송에서는 고려의 사신을 다른 나라들과 같은 朝貢使가 아닌 대등한 국가의 사신인 國信使로 대접했으며 고려와 송 모두 다 양측의 사신을 대접하는데 상당한 국고를 소모해 그 지나침이 논의될 정도였다. 물론 요에서도 고려의 방물을 國信物로 취급했으며 금에서는 국초 고려 군주를 황제로 칭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실을 본다면 송과 요, 그리고 금같은 주변 국가들이 고려의 칭제와 그 천하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타협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려 전 ? 중기 대부분의 시기동안 稱王과 稱帝가 공존하고 있었고 이는 천하관과 연관된 군주의 위호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이 나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병존하는 것이 가능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를 통해 고려시대의 천하관을 크게 셋으로 나누고 다른 자료들과 결합하여 검토하는 것이 가능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Ⅲ. 天下觀의 갈래와 多元的 天下觀
1. 自國中心 天下觀
세갈래의 천하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뿌리깊은 자국중심 천하관으로서 이미 고구려의 모두루묘지만 봐도 동명신화를 서술한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5세기경 작성된 이 묘지문에는 전형적인 자국중심 천하관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런 동명신화는 이후 고려때까지 이어져내려와 하층민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후 고려에서는 묘청과 정지상 및 그 일파에 의해 이런 자국중심 천하관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외왕내제가 아닌, 대외적인 칭제를 실시하며 금과의 정면승부를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김위제 등이 이런 자국중심 천하관을 강하게 표출한 바 있으며 공민왕대의 승려 普愚 역시 한양 천도를 주장하면서 36국이 조회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보우의 불교사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조심스럽게 봐야하겠지만 반원세력 척결, 정동행성 철폐, 쌍성총관부 수복, 원의 연호사용 중지 등을 실시한 공민왕의 정치적 자문에 적극적으로 응했던 보우였던만큼 그의 주장에는 자국중심 천하관이 스며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자국중심 천하관은 고려초는 물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천하관의 한 계통이었는데 이것을 고려의 국가적 최대 제전인 팔관회와 연결시켜 이해할 수도 있다. 태조대에도 숭배된 팔관회의 토속신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대상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묘청 일파가 주장한 八聖은 대개 토속적인 신에 선인이나 불교적인 겉옷을 씌어 가장 성스러운 신으로 포장된 것이며 그들은 이것들을 통해서 고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대개 미신적이고 당시 국제사회를 보는 포괄적인 안목이 부족하였기에 화이론적 천하관 계열에서는 처음부터 반대했으며 다워적 천하관 계열에서는 초기에 尹彦? 등이 한때 동조했으나 이후 대립하게 되었다. 다원적 천하관은 자주적이고 전통문화에 공감하고 그를 존중하는 면에서는 이들과 공통점이 있으나, 선진문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현실세계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지향했다는 점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 華夷論的 天下觀
선진국제 문화인 唐 문화의 도입에 고무되어 적어도 신라 下代에는 화이론적 천하관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적 선진문화를 습득한 엘리트들인 이들에게 중화문화는 절대적 가치를 갖게 되었으며 토속 전통문화는 비야하고 낙후된 혁파대상으로 평가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최치원인데 그는 신라는 동방의 夷라 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존재라고 했으며 신라사에서 기자의 동래설을 강조하고, 신라 고유의 군주명칭을 비루한 것으로 보고 그 저서『帝王年代曆』에서 모두 ‘~왕’으로 바꿨다. 중화문화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을 자국의 역사 속에서 최대한 찾아 강조함으로써, 신라의 제도들을 중국의 제도로 개혁하기를 바라는 입장을 합리화하려는 것으로서 이는 김부식의 사관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화이론적 천하관에 입각한 인물들은 고려초부터 확인되는데 최승로를 비롯한 신라 6두품 출신들과 김부식 가족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국초로부터 원간섭기까지 이 계열의 인물들이 정치적으로 주도했던 시절은 불과 30년 정도에 불과했던만큼 그들은 소수였다. 최승로를 두고 화풍론자들 사이에서는 고려초 개혁론자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고려를 중국의 변방으로 인식하며 태조의 치적 중 제일 첫째를 ‘事大’로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중국으로부터의 책봉에 큰 의미를 두기도 하였다. 물론 다원적 천하관 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의 책봉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성종대 고려는 모든 체제를 제후국에 맞게 바꿨으며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려가 동이 국가들 중에서 가장 중화문명을 잘 받아들인 문명국이라는 소위 小中華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김부식이 활약하던 인종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대소의 국가들이 유교적인 사대질서에 따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고 당연히 고려는 소국으로서 대국에 사대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한족의 중국에는 사대를 하면서 정작 이질적 문화에 뿌리를 둔 가공할 군사력의 잠재된 위협, 즉 북방 세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북방 세력의 위협에 굴복하면서 이를 權道라 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천자국은 중화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유교문화를 단순한 선진문화로 보는 것을 넘어 至高의 문화로 숭배하여 ‘華夏의 제도’, ‘華風’이라고까지 높여 불렀다. 이들에 대한 연구가 과대포장된 경향이 있으며 특히 선진문화 도입을 이들에만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하지만 어떠한 면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바로 다원적 천하관 계열의 인물들이었다.
3. 多元的 天下觀
앞에서 본 2개의 천하관은 모두 단일한 천하를 설정하고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천자는 하나뿐이라고 여기는 것들이었으나 다원적 천하관은 여러명의 천자가 병존하고 각자가 지배하는 천하가 다양했다는 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던, 자주적인 관점에서 실리를 추구하며 강대세력에 대처하던 천하관이었다. 13세기 무렵까지 천자국은 복수로 존재했는데 해동천자, 대금황제, 송조천자 등이 바로 그러하다. 실제 이러한 관념은 태조 시기부터 등장하며 심지어는 원지배 간섭기에도 확인이 되는데 즉 동방은 중화와는 다른 문명권으로 오래도록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고려는 거란과의 강역 담판에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강한 계승권을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지리적 강역을 통해서 발해, 혹은 여진과의 동류 의식도 엿보인다. 즉, 요하 이동 小天下의 중심이 고려임을 자처한 것인데 그런 고려인들이 중요하게 여긴 소천하는 바로 북방 왕조와 중화 왕조였다. 비록 일본도 천자국을 자처하였지만 고려와 일본은 서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예도 확인된다. 고려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사대를 하면서도 필요하면 一戰을 불사할 정도로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했었다. 이는 태조가 중화의 문물을 唐風이라 칭하면서 선진적이지만 동방의 상황과 맞지 않기 때문에 맹신하지 말라고 했던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는 기본적으로 북방 왕조에 대해서는 비하하고 중화 왕조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대했는데 이는 북방 왕조의 남하를 막아내는 동병상련의 처지도 포함되겠지만 태조가 언급한 것처럼 중화 문명의 우수성을 어느정도 인정했기 때문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는 분명히 자국중심 천하관, 화이론적 천하관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려는 북방 왕조에 대해서는 문명적으로 후진국이라 인식했으며 현실적인 군사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은 계속적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처럼 고려 군주를 천자, 황제로 인식하던 다원적 천하관 계열의 인물들은 화이론자들이 주도하던 성종대 전반기와 인종대 후반기, 자국중심 천하관 계열이 주도하던 인종대 중반을 빼고는 대부분의 정국을 주도하였으며 그 숫자도 다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 맺음말 : 고려시대 다원적 천하관의 역사적 위상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은 고구려의 ‘삼차적 천하관’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양자 모두가 동아시아 천하에 대한 객관적 현실 인식에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는 그러한 공통점을 갖는 것이나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에는 새로운 요소가 부가되었다.
기실 고구려가 존재하던 고대에는 황제칭호 혹은 황제국 체제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고조선 이래 최고의 위호인 ‘~왕’을 계속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발해 시대에는 당 문물의 유입으로 인해 칭제 현상이 조금씩 확인되는데 이는 과도기적인 면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독자적 천하의 설정과 함께 새로운 군주상을 설정하려는 변화의 조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유교정치문화가 유입되면서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려가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소천하의 주인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당연히 그런 상황 속에서 칭제는 필연적인 부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제문화화한 유교문화의 수용이 크게 진전된 결과인데 단, 유교문화의 진전뿐 아니라 그것이 전통문화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다원적 천하관을 바탕으로 심지어 고려는 송을 앞지를 수 있다는 문화적 자부심까지 표출했으며 고려 군주가 명목상 황제 혹은 천자로 떠받들여지던 무신집권기에도 다원적 천하관은 주류였었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원의 제후국으로서 위치가 축소됨에 따라 점차 위축되어졌고 이후 공민왕대 원세력을 몰아낸 시점에서는 성리학이 주도적인 이념으로 등장함에 따라 화이론에 입각한 小中華論이 팽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Ⅴ. 비평
고려는 외왕내제했던 국가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도 필자는 그런 견지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다만, 기존에 너무 이분법적인 해석방법은 지양하면서 대신 다원적 천하관이 시간이 흐르면서 가변적으로 유지되었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그로 인해 국초부터 원간섭기까지 고려의 정치적 주류는 다원적 천하관 계열이었으며 화이론자 혹은 자국중심 천하관 지지자들의 정국 주도는 불과 30여년뿐이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이러한 인식 역시도 그 당시의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의 연장선은 아닐까 생각한다. 즉, 그 30여년의 시간 속에서도 다원적 천하관은 존재했으며 다원적 천하관이 주류를 차지하던 시대에도 역시 다른 두 천하관 지지자들은 존재했었다. 그리고 필자 역시 그런 흔적들을 본문에 남기고 있어 약간 모순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즉, 본인이 보기에 천하관을 3개의 형태로 분류하는 것은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기존의 2개의 천하관에서 하나가 더 추가되어 보다 다각도로 고려시대의 국제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천하관이라고 하는 사상적, 관념적 체계가 분류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심지어 필자가 철저한(?) 화이론자라고 규정한 김부식조차도 국가적 사업의 결과물이었던『三國史記』에서는 자국중심 천하관 혹은 다원적 천하관의 일면을 표출했기 때문이다1). 즉, 같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혹은 같은 시대, 같은 黨派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100% 어느 한쪽이다, 라고 규정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고려가 조선 같은 경직된 정치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더욱 그러하다.
이처럼 천하관과 같은 관념적인 부분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복원하지 않는다면 어디까지나 추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필자의 연구는 분명 눈여겨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관념적 체계를 3개의 천하관 구조로 파악하고 이를 고구려의 3차적 천하관과 연결시킨 부분도 그러하며 양자의 차이점을 언급한 것 역시 주목해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보기에는 건원칭제라는 부분 자체가 이미 중화문명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언급했듯이 이미 본격적인 유교정치문화가 동아시아에 팽배해 있었고 중화문명의 영향이 고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확대된만큼 고려 역시 자국 나름의 문명권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양성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표현에 있어서는 중화문명의 것을 차용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이 부분이 고대, 특히 고구려와 가장 다른 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천하관 역시 중화문명을 基底로 해서 이뤄진 것이니 이것이 다 부질없는 논쟁이다, 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동아시아가 唐이라고 하는 거대제국의 출현과 그 문명권의 확대를 경험한지 수백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문명 혹은 문화는 개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당 출현 이후의 사회에서의 고려의 독자성은 분명 주목되어야 마땅한 부분이며 그들이 가졌던 다원적 천하관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이은 것이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도 같이 인지해야만 할 것이다.
1) 그는 고구려본기에서 호동의 죽음을 유교적인 입장에서 논평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주필산전투를 언급하면서 당나라측에서 그들의 수치스러운 기록을 일부러『양당서』와『자치통감』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혹평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우리측 기록과 중국측 기록을 동시에 기록하면서도 우리측 기록의 신뢰성을 더 높이 평가한 점, 삼국사기에 본기등의 표현을 쓴 점은 그가 철저한 화이론자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